적당히 가까운 사이 (스노볼 에디션)
2019년, 오랜 무기력증 극복의 기록을 담은 <게으른 게 아니라 충전 중입니다>를 통해 독자들의 폭풍 공감과 호평을 얻은 작가 댄싱스네일이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 책에서는 인간관계 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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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레스 상황을 받아들이고 난 뒤 해소법을 찾는 것보다 애초에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데에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내 정신 건강에 조금이라도 부정적 영향을 주는 관계는 적당한 선에서 끊어 내는 '관계 미니멀리즘'을 시도하고 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생각은 없다. 내 마음이 편안하다면 남들이 내리는 평가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이미 인생의 대부분을 지나치게 타인의 눈치를 보고 부서진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할애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남은 인생은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이제는 착한 사람도, 인기 있는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내 기준에서 더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 것에 에너지를 집중하고 싶다.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 쓰고 싶은 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더 중시하면서. 해야 하는 일, 만나야 하는 사람, 써야 하는 글, 그려야 하는 그림에 들이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게 나에게 더 맞는 삶인 것 같다.
- 물을 많이 마시는 게 다이어트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루에 2L씩 물을 마시다가 손에 습진이 왔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병원에 가서 발병 원인을 물으니 안 마시던 물을 갑자기 너무 많이 마셔서 물이 몸 밖으로 나온 걸 수도 있다고 했단다. 인간 가습기가 됐던 거냐며 한바탕 웃고 떠들었지만 이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남들이 다 좋다고 말하는 게 나한테도 꼭 좋은 건 아닐 수 있구나.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편안할 수 있는 관계의 종류와 너비는 다르다. 어떤 관계에서 물 흐르듯 섞이지 못한다면 기름방울인 채로 살면 되는 거다. 나를 바꿔 가면서까지 그 무리에 섞이는 데 애쓰지 않을 생각이다. 만나야 하는 사람보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한 번 더 보며 살고 싶다.
- 타인의 공간을 함부로 침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침범하는 말과 행동 역시 조심해야 한다. 조언은 타이밍이다. 상대가 먼저 요청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인생의 진리일지언정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
- '그러려니'와 '아니면 말고'.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나 타인을 좀 더 겸허히 수용할 수 있는 방법이자, 수평적으로 내 의견을 전달하기 위한 나름의 대처법이다. 이 두 단어만 기억한다면 어떤 이상한 사람을 만나더라도(물론 이상한 정도에 따라 시간은 더 걸릴 수 있겠지만)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다.
- 내게는 인간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리트머스지로 '귀차니즘'만 한 게 없다. 사람은 다소 귀찮을 수 있는 일도 자신이 호감을 느끼는 상대라면 기꺼이 함께하고 제안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귀찮은지 아닌지 생각하기조차 귀찮다면? 그와의 인연을 과감히 놓아줄 때가 되었다!
- 아주 친밀한 사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관계에서 언제나 상대방의 의견이나 요구를 우선시하고 거기에 맞춰 주는 쪽이 편했다. 맏이로 자란 나에게 요구되던 유년기의 핵심 미덕이 '양보'였던 탓일까. 그게 나에게 익숙하고 유일하다시피 한 교류 방식이기에 편하다고 착각해 왔는지도 모른다. 결국은 스스로 편안하다고 느끼는 방식으로 행동하면서도 머리로는 늘상 내가 더 배려 한다고 여기는 인식의 함정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피로도가 높아지고 보상심리만 커질 뿐,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관계가 깊어지지는 못했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서로의 욕구를 제대로 맞춰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 입장을 기준으로 삼아서 베푸는 배려는 때로 그 의도와 다르게 전달되기도 한다. 가끔은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표현해서 타인이 나에게 맞춰 볼 기회를 주면 어떨까. 그것이 오히려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 생각은 어떤지 말해주지 않으면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
- 여기저기 잘만 굴러다니던 실핀이라도 막상 필요할 때 보이지 않는다면 제 역할을 온전하게 해낸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도 그렇다. 어딘가 있는 것 같았는데 막상 찾으면 없는, 그런 실핀 같은 사람이 주위에 곡 한 명씩 있다. 그에게 내가 필요할 때는 연락이 잘 되지만, 나에게 그가 필요할 때는 쉽게 연락이 닿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서운함을 토로하면 나를 타인 의존적인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에라, 이 몹쓸 사람아. 적어도 실핀은 나를 외롭게 하지라도 않지.
필요하지 않을 때만 굴러다니는 실핀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는 어렵듯이 필요할 때마다 곁에 없는 사람이 어쩌다 옆에 있을 때의 소중함을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그런 실핀 같은 사람을 잃지 않으려 혼자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찾을 때 꼭 없는 사람은 애초에 없느니만 못하다.
- 어떤 대상을 향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마음은 그 감정의 전이로 인해 다시 나 자신을 병들게 만들기 쉽다. 또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타인을 비난하고 화를 내지만, 상대를 거칠게 비난할수록 오히려 상대가 나를 감정 조절에 서툰 이상한 사람이라고 탓할 기회를 주는 꼴이 될 수도 있다.
- 만약 주위에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사람이 있고 그의 태도가 쉬이 바뀔 것 같지 않다면 최소한 내가 스스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주고 거리를 두자.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저 존중하는 마음, 진심 어린 응원일지 모른다.
- "너를 너무 사랑해서 이러는 거야."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도 모르게 상처가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친밀해진 만큼 다 알고 싶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상대를 아프게 하고, 그래서 다시 내가 아파진다.
돌아서면 후회하면서도, 습관으로 굳어진 배려 없는 행동은 서로에게 상처 주기를 되풀이한다. 마치 친밀함이 하고 싶은 말이나 행동을 다 해도 되는 자유 이용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나 기분대로 표현할 자유로만 마음이 가득 차서 상대를 향한 배려나 존중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면, 자유를 잃기 전에 사람부터 잃게 될지 모른다.
하트의 뾰족한 밑면은 상대방을 찌르는 날카로운 창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널 사랑하니까'라는 전제로 상처를 주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폭력일 뿐이다.
- 세상에는 '착한 사람'과 '나쁜 놈'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나 역시 속해 있는 관계 속에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면 도무지 납득되지 않던 관계까지도 조금은 아량 있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 잘못은 자기가 해 놓고 이상하게 내가 미안해지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불편함에 주로 '예민하다', '오버스럽다(과하다)'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위축되어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어진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묻게 된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기분이 나빴거든. 내가 예민한 건가?"
그러고 나서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지 고민하며 인생을 낭비한다.
나라님이 아니래도 내가 기분이 나쁘면 나쁜 거다. 내 불편함에 타인의 허락은 필요하지 않다. 이 오지랖 넓은 세상 속에서 적어도 자기감정에게만은 있는 그대로 존재할 자유를 줄 수 있기를.
-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하거나 축하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가 종종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과 위로의 말을 건네는 동시에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리거나, 친구의 성공을 축하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한없이 작아진 내 모습을 그릴 때가 그렇다.
어른의 몫을 제대로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단속하며 안도감을 얻기 위해 달려오는 동안 나도 모르는 새에 세상의 상대평가에 익숙해진 걸까. 누군가를 밀어내고 올라서야만 내 존재가 위태롭지 않을 거라는 불안에 마음이 각박해진 걸까.
'비교'의 가장 무서운 점은 현재의 내가 무엇을 얼마나 이루고 가졌는지와 관계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습관처럼 배어든다는 것이다. 진정한 자존감은 비교를 통한 상대적 만족감이 아닌 절대적인 자기 인정으로 얻을 수 있다. 이를 잊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비교 없는 위로와 불안 없는 축하를 건넬 수 있을 것이다.
- 연애는 '내일을 기대하게 하는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거라던 어느 드라마의 대사가 생각난다. 심리적 안정, 즐거움, 유대감 등 연애에서 기대하는 가치의 우선순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바라는 건 아마도 '재미'가 아닐까. 그렇다. 연애는 재미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아무리 잘 대해주고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라도 함께 있을 때 재미가 없다면 연애 관계로 발전하기는 쉽지 않다. 하다못해 개그 코드라도 맞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미와 흥미로움의 다른 이름은 불안정성이고, 안정감의 반대면에는 반드시 지루함이 있다. 안정적이면서 동시에 다이내믹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양쪽을 모두 가지기를 바라는 건 마치 심플하면서 화려한 디자인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와 같다고나 할까.
이런 불가능한 조건을 기대하기 때문인지 항상 나와 '딱 맞는' 사람은 없더라. 실은 나와 딱 맞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조건을 겸비한 사람이 원래 별로 없는 거다. 안정감을 원한다면 어느 정도의 지루함이 수반될 것이고, 재미를 잃을 수 없다면 불안정성에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불안정성을 어느 정도까지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정도는 알고 있는 게 좋다. 타인과 관계를 맺기 전에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무엇인지 나만의 우선순위부터 정해보면 어떨까.
- 걱정이 많아서 걱정인 사람이 관계를 시작할 때 꼭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일을 지레짐작해 봤자 부정적 결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는 없다는 것. 도리어 부정적 예측 이후 불안감으로 인해 과잉 행동을 하는 등 상대를 몰아붙여서 관계가 악화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물론 어린아이처럼 경계 없이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는 게 무조건 관계의 좋은 시작이라는 말은 아니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때 언제, 얼마만큼 마음을 열어야 할지 걱정하는 일에는 분명 자기 보호라는 이점이 존재한다. 또, 상대에게 마음을 열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을 가질지는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다.
다만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현재의 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순간까지 앗아가게 만들지는 않기를 바란다. 지나치게 앞서는 걱정을 조금은 뒤로 미뤄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 덮어 둔 상처, 해결되지 않은 감정이 불쑥 올라올 때마다 아픈 기억을 곱씹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 그 상처가 성장을 방해한다면 한 번쯤은 꺼내어 직면하고 넘어가는 게 좋다. 그 과정이 너무 괴롭다면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냉정하게 돌아보며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는 내가 가진 아량을 쥐어짜 내서 상처 준 사람을 애써 용서하고 마음에도 없는 면죄부를 주는 것과는 다르다. 상대를 나와의 연결고리를 배제한 채 제3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즉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이 아닌 '결함이 있는 한 사람'으로 바라봄으로써 머리로나마 이해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게 상처가 된 기억을 소환해 다시금 생각하고, 마음으로 충분히 소화시키면 아픔에서 빠져나오기가 조금은 수월해질 것이다.
- 감정에는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사랑을 시작할 때 그 이유를 정의하려고 하고, 이별할 때는 끝내야만 하는 이유를 만든다. 감정적인 선택을 하는 자신이 서투르고 어른스럽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 같은 공포 때문일까. 나의 이성에게 내 감정과 그에 따른 선택이 타당했음을 납득시켜야만 마음이 편안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그 이유들은 큰 의미도 없고 때로는 사실과 거리가 멀기도 하다. 감정이 사라진 뒤 기억은 꽤 많은 부분 재편집된다. 그래서 지나고 돌아보면 누군가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이리저리 끼워 맞춘 조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한편 더 빨리 끝맺지 못한 게 후회되는 지난 관계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진즉에 끝냈어야 마땅한 수많은 징후를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분명 당시에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순간들이다. 이렇듯 같은 상황도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그러니 관계에서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그에 들어맞는 이유를 찾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이유는 만들기 나름이다. 그럴듯한 이유가 없더라도 내가 느끼는 감정은 그 자체로 늘 옳다.
- 지나간 관계를 마음으로 정리할 때는 '운명'이 아닌 자신의 '선택'을 믿었으면 한다. 선택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관계와 세상 속에서 주체성을 갖겠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처받을까 두려워 닫아 둔 마음의 문을 다시 열 수 있는 선택지 역시 내 손에 쥐어진다.
누구와 관계를 이어 가고 어떤 사람을 정리할지, 그들과의 거리는 어느 정도로 유지할지,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만약 후회되는 선택을 했다면 그것 또한 괜찮다. 우리는 지난 선택으로부터 배우고 언제든 더 나은 선택을 해 나갈 수 있으니까.
- 나이 듦의 순기능이란 이런 걸까. 이전보다 많은 일들에 초연해지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나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에 있어서 그렇다. 몇 년 전이라면 내 탓부터 했을 자잘한 물음에도 이제 스스로를 넉넉히 이해해 준다. '내가 과연 충분히 좋은 사람일까?' '성숙하고 어른스럽게 행동한 걸까?' 같은 연결된 모든 관계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마음의 짐으로부터 나를 해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자신의 마음조차 확신하지 못하면서 남의 마음을 넘겨짚거나 상상하는 데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곤 한다. 내 마음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타인의 마음을 파악하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는 발상 자체가 말이 되는 걸까.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다. 남의 마음에 신경을 쏟기보다는 나를 먼저 돌보자. 마음대로 안 되는 일에는 마음 가는 대로.
- 사람의 마음이란 적당한 선에서 멈추기 어렵다는 것, 한번 자라게 놔두면 손쓸 수 없이 커진다는 것을 이제는 경험으로 한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겁이 나서 누구도 선뜻 믿기 어렵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용기를 내기에 설렘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때, 삶의 무대 위에서 잠시 내려와 관객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한 번 지켜볼까'하는 마음으로 내가 놓인 관계를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본다면 훨씬 더 흥미로운 시나리오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 우정의 깊이가 꼭 흘려보낸 시간과 비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옛 친구든 새 친구든 관계에 들인 시간, 함께 보낸 세월에 너무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길 것인지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일 뿐이다. 되도록이면 즐거움을 온전히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며 살고 싶다. 한 번 사는, 짧은 인생이니까.
- 사랑을 하다 보면 무언가를 '주는'데 더 마음을 쓰게 된다. 사랑하는 만큼 서로를 배려해 주고, 걱정해 주고, 아껴 주고, 보호해 주고 싶으니 말이다.
관계에서 그 '주는' 행위 뒤에 따르는 보상심리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내가 사랑을 준 만큼 무언가를 돌려받고 싶은 마음은 상대방의 삶을 일정 지분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알아챈 상대방은 자신이 받은 사랑을 언젠가 돌려주어야만 한다는 부채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나한테 그렇게 잘해준 사람인데', '나를 위해 그동안 희생한 사람인데' 같은 생각은 내 선택보다 상대방의 기분을 우선시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상대가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일에는 결정을 주저하거나 내 인생을 위한 선택에조차 확신을 갖지 못하고 이유 모를 압박감을 느끼며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러다 결국은 상대가 동의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시도도 해 보지 않고 포기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과 선택을 오직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은근한 부채감을 심어 주며 상대를 조종하는 것. 그건 사랑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을 주려고 하기보다 서로의 삶에서 한 걸음씩 떨어져 자신에게 더 집중한다면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는 건 의외로 대단치 않은 순간들이다. 나만 아는 특유의 표정이나 사소한 버릇, 따스하게 느껴지던 지극히 작은 순간들. 시간이 지나 기억은 희미할지언정 그 순간의 감정만큼은 진짜였다는 걸 알기에.
- 사람은 자기가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해질 수 있다.
-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가 느끼는 결핍의 지점을 타인에게도 적용하는 경향이 있어서 정작 상대에게 진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알고 보면 서로가 같은 마음인데 전하는 방법은 왜 이리 어렵기만 한 걸까.
- 사람에게는 각기 다른 결핍의 지점이 있다. 성취감이 고픈 누군가, 인정이 고픈 누군가, 애정이 고픈 누군가... 그런데 모두가 자신이 가진 결핍의 렌즈로 타인의 상황을 바라보니 초점이 엇나간 위로나 조언을 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결핍을 똑바로 인지하고 살아가야 하기에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이 만든 렌즈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이따금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선에 맺힌 조금은 다른 관점의 세상에 마음을 내어 주면 좋겠다. 그렇게 또 다른 사랑의 방법을 배워 나갈 수 있지 않을까.
- 의미 없고 형식적인 관계를 더 이상은 애써 유지하고 싶지 않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젠가 나도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까' 같은 이유들로 묶여 있는 그런 관계의 무게를 덜어 내기로 했다. 중요한 건 바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란 걸 알았으니까.
- 사랑을 하기 전에 꼭 알아야 할 것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키지 못할 약속과 함께 사랑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건 그 모든 이야기들은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라는 것. 마음을 전부 꺼내어 보여 줄 수 없어 말로 대신하는 그런 진심.
-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우주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는 각자의 취향, 가치관, 성격, 외양, 습관 등의 여러 행성이 부유한다. 그래서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가 만날 때는 반드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난다. 분명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덕분에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혼자라면 하지 못했을 새로운 경험을 하고, 교집합을 발견하며 공감하고, 서로 다른 점을 수용해 나갈 수 있다. 그리고 딱 그 깊이만큼 나의 감정과 생각의 지평이 넓어진다.
얼마 전 수관 기피라는 현상을 알게 됐다. 비슷한 수종의 나무가 함께 있을 때 각자의 가지가 서로 닿지 않고 자라 그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상대 나무가 불편하지 않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배려하며 동반 성장하는 이 현상의 원인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침범하지 않으면서 연결된 이 식물들을 보며 공존의 의미를 배운다. 함께 서로의 세계를 넓혀 나가는 아름다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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