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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다정소감 (김혼비 저 / 출판사 안온북스)

by hyeranKIM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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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독 여행 분야에는 '그것 오답입니다!'라고 정답지를 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개탄의 대상은 단지 중년 단체와 여행객만이 아니었다. 성별 나이 구분 없이 누구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A가 일컬은 '그런 사람들'은, "수박 겉핥기 식 패키지여행이나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 "여행까지 와서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요즘 애들" "인터넷 정보만 믿고 현지인들은 거들떠보지 않는 관광객용 식당에 뭣도 모르고 줄 선 사람들" "역사적 명소에는 관심도 없고 쇼핑만 하다 가는 애들"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되어 여행기 곳곳에 등장했다.

아니, 그러면 좀 안 되나요. 어차피 여행지에서 몇 달 살 것도 아니라면 누구도 수박 속까지 다 파먹을 수 없는데, 그냥 수박 겉만 즐겁게 핥다가 오면 안 되나. SNS를 잠시 끊고 고즈넉한 여행을 즐기는 즐거움과 그때그때 SNS 친구들과 여행의 순간을 활발히 나누는 건 엄연히 다른 종류의 즐거움인데. 뭣도 모른 채 그냥 가보고 싶던 곳에서 먹고 싶은 거 먹고 나오면 안 되나. 그래서 맛이 없었다면 그건 실패한 경험인가. 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정원 사진을 찍고,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미술관에 가면 좀 어떤가. "유명한 스폿에서 사진 한 장씩 박고 가는 게 여행의 전부"면 또 어떤가. 타인이 더 나은 경험을 해보길 진심으로 바라서 하는 조언과, 무작정 던져놓는 냉소나 멸시는 분명 다르다. '세상의 빛을 보자'라는 게 '관광'이라면, 경험에 위계를 세워 서로를 압박하기보다는, 서로가 지닌 나와 다른 빛에도 눈을 떠보면 좋지 않을까.

 

- 문명의 선을 지키며 살되, 저 선을 넘어버린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할 때, 공포와 억압에 가로막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말라는 뜻이다. 은희는 왜 맞서 싸우려 생각하지 못했을까? 또 나는 그전까지 왜 맞서 싸울 생각도 못 한 걸까? 큰 소리 내면 안 돼, 때리면 안 돼, 싸움은 나빠, 여자가 나대고 과격하면 못써, 여자는 어차피 지게 되어 있어, 같은 것들만 잔뜩 배우고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에만 도가 트느라, 고함치고 때리고 맞는 원초적 싸움에서 나를 주체로 놓아보지 못한 것이다.

여성들도 소리 지르고 때리고 맞는 훈련을 해야 한다.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원초적 싸움의 세계'를 경험을 통해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손발을 결박하는 공포와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스텝으로 도망치든, 도와달라고 소리치든, 주머니 속 무기를 침착하게 꺼내 들든, 맞서 싸우든, 가드를 올리고 방어하든, 뭐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 '자기 인생에 대해 가장 많이 걱정하고 고민하는 건 언제나 자신이다. 거기에 대고 타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없다'라는 말도 나처럼 시야가 좁은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못한다. 내가 인생의 여러 방향 중 남동쪽만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남동쪽만 바라보며 천 번 걱정하고 만 번 고민한들, 죽어도 북서쪽은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쉽게 던지는 말이더라도 그중에 북서쪽을 상기시키는 말이 끼어 있던 경우를 생각하면, 충고 듣기를 포기할 수가 없다. 청하지 않은 충고도 마찬가지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 지금이 충고가 필요한 순간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때, 청하지도 않았는데 날아든 충고가 아집의 한쪽 끝을 깨부수기도 한다. 물론 어떤 충고들은 무척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기분 나쁘게라도 북서쪽도 바라볼 수 있다면 기분 좋게 남동쪽만 계속 바라보고 사는 것보다 나은 것 같다.

 

-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뜻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 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공기를 흘려보내주기를 바란다.

 

- 지식의 양과 지식을 지혜로 응용하는 능력은 엄연히 다르고, 아는 것이 많은 것과 제대로 아는 것,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 역시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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