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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류시화 저 / 출판사 더 숲)

by hyeranKIM 2022.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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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때로 도둑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때는 자신이 낯선 별에 불시착한 갈 곳 없는 영혼처럼 느껴진다. 산티아고는 어디든 갈 수 있는 바람을 부러워한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모험을 떠나지 못하게 자신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소명을 사랑하면 필시 세상도 사랑하게 된다.

 

- 경험을 통해 스스로 가짜와 진짜를 알아보는 눈을 갖는 일은 어떤 조언보다 값지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의 판단력을 갖게 된 사람은 남을 의심하거나 절망하느라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을 섣부른 충고나 설익은 지혜로 가로막지 말아야 한다. 경험하지 않고 얻은 해답은 펼쳐지지 않은 날개와 같다. 삶의 문제는 삶으로 풀어야 한다.

 

-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은 우리 안의 불순물을 태워 버린다.

 

- 강박적인 생각을 내려놓을 때 마음과 가슴이 열린다.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문제들에 너무 쉽게 큰 힘을 부여하고 그것과 싸우느라 삶의 아름다움에 애정을 가질 여유가 없다. 단지 하나의 사건일 뿐인데도 마음은 그 하나를 전체로 만든다. 삶에서 겪는 문제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괴물이 되어 우리를 더 중요한 것에서 멀어지게 한다. 영적인 삶의 정의는 '가슴을 여는 것' 혹은 '받아들임'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 지금 내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생각의 눈송이들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는가. 생각만큼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없다. 마음은 한 개의 해답을 찾으면 금방 천 개의 문제를 만들어 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작가이다. 마음이 자기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때 완전히 다른 세상을 경험한다.

 

- 말기 암 진단을 받은 한 여성이 충격을 받고 심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한 영적 스승에게 조언을 청하자 스승이 말한다.

"그것을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아요."

암에 걸린 것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그것을 스스로 더 크게 확대시켜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평소 수행을 해 오던 그녀는 그 조언의 의미를 이해하고 차츰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암은 자신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주위에서 놀랄 정보로 과거보다 더 활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암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자 두려움과 싸우던 에너지가 생명력으로 바뀌어 스스로를 치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와 화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문제는 작아지고 우리는 커진다. 실제로 우리 자신은 문제보다 더 큰 존재이다. 행복한 일이든 불행한 일이든 이것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라.'

물론 이런 조언은 함부로 흉내 내선 안 된다. 만약 큰 성공으로 행복해하거나 불의의 상실로 고통받거나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이에게 '그것을 그렇게 큰일로 만들지 말라.'라고 조언했다간 당신은 당장 쫓겨나거나 절교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 조언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때 의미가 있다.

 

- 마음속에서 하는 말을 조심하라는 격언이 있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해도 자기 자신이 듣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단어는 무의식 속에서 정신을 부패시키고 어떤 단어는 기도처럼 마음의 이랑에 떨어져 희망과 의지를 발효시킨다. 부패와 발표는 똑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어떤 미생물이 작용하는 가에 따라 해로운 변질과 이로운 변화로 나뉜다.

'네 말이 내 귀에 들린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라는 단순한 성격 속 구절이 아닐 것이다. 가면이 얼굴을 누르듯 우리는 내면의 부정적인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되뇐다. 앤드류 뉴버그는 <단어가 뇌를 바꾼다>에서 "단 하나의 단어일지라도 신체적, 감정적 스트레스를 통제하는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설명한다. '사랑'과 '평화'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뇌 기능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 모든 상처에는 목적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우리를 치료하는지도 모른다. 상처는 우리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돌아보면 내가 상처라고 여긴 것은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과 다르지 않았다. 삶의 그물망 안에서 그 고통의 구간은 축복의 구간과 이어져 있었다. '축복 blessing'은 프랑스어 '상처 입다 blesser'와 어원이 같다. 축복을 셀 때 상처를 빼고 세지 말아야 한다.

 

- 작자 미상의 누군가가 말했듯이 인생은 폭풍우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아니라 빗속에서 어떻게 춤을 추는가 하는 것이다.

영적 전사는 부서진 가슴을 가져야 한다고 티베트 출신의 영적 스승 초감 트룽파는 말한다. 부서진 가슴 없이는 전사 자격이 없다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고통은 추락이 아니라 재탄생의 순간이고 새로운 여행의 시작이다. 가톨릭에서는 이 고통을 펠릭스 쿨파, '행운의 추락'이라고 표현한다. 상처가 구원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원주민 중 라코타 수우족은 고통을 겪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신과 가장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아플 때 에고의 껍질이 부서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고 그 사람에게 자신들을 대신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곤 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의 기도가 신에게 가닿을 만큼 절실하고 강력하기 때문이었다.

 

- 구차하게 의존하는 것, 시도와 모험을 가로막는 것을 제거해야만 낡은 삶을 뒤엎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전하게 살아가려고 마음먹는 순간 삶은 우리를 절벽으로 밀어뜨린다. 파도가 후려친다면, 그것은 새로운 삶을 살 때가 되었다는 메시지다. 어떤 상실과 읾음도 괜히 온 게 아니다. '신은 구불구불한 글씨로 똑바르게 메시지를 적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 페르시아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는 썼다.

이 문제 많은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걸으라.

중요한 보물을 발견하게 되려니.

그대의 집이 작아도, 그 안을 들여다보라.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밀들을 찾게 되려니.

나는 물었다.

'왜 나에게 이것밖에 주지 않는 거죠?'

한목소리가 대답했다.

'이것만이 너를 저것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에게, 삶에게 묻곤 한다. '왜 나에게는 이것밖에 주지 않는 거지?' 그러나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답한다. '이것만이 너를 네가 원하는 것에게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속삭임을 듣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과의 내적인 논쟁에 시간을 허비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스스로가 자신의 여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자신이 결코 팔을 갖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새의 몸에서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 단순한 생활과 음식이 나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단순함이 나를 나 자신에게 가까워지게 했다. 그 삶은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순전히 내 영혼에 관한 일이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과 만남이 줄어들면서 기쁨은 늘어났다. 사치가 문화를 창조하기도 하지만, 소박함은 정신을 창조한다. 그곳에서 나는 사원들을 들여다봤고, 신상들을 보았고, 그런 다음 나 자신 안에서 송소를 발견했다. <기억, 꿈, 회상>에서 융은 말한다.

"사람들은 점점 커져 가는 부족감, 불만족, 불안 심리에 떠밀려 새로운 것을 향해 충동적으로 돌진하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가 약속해 주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모든 좋은 것이 더 나쁜 대가를 치르고 얻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눈부신 과학의 발견이 우리에게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인간의 기쁨, 만족, 또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해 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게 만든다. 볼링겐에 있는 나의 탑에서는 사람이 마치 수백 년을 사는 것처럼 산다. 만약 16세기 사람이 그 집으로 이사 온다면 그에게 새로운 것은 단지 석유 등잔과 성냥일 것이다."

 

-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나의 감각과 느낌, 혹은 삶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나 두려움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는 나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자발적인 열림이 폭풍에 길 잃은 새 같던 우리를 연결시켜 주며, 그때 세상과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삶이라는 여행의 한 구간을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행운이다.

 

- 미국 시인 마야 안젤루는 썼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과 당신이 한 행동을 잊지만, 당신이 그들에게 어떻게 느끼게 했는가는 잊지 않는다."

나 자신이 실제로 누구인가는 감추거나 꾸미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드러내며, 내가 주장하는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이 나에 대해 가장 잘 말해 준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인가? 그것이 가장 진실된 나의 모습에 가깝다.

 

- 심리 치료 전문가 존 브래드쇼는 우리 안에 있는 '내면 아이 inner child'에 대해 말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우리 안에는 성장하지 못한 내면 아이가 있어서 현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불안한 심리를 초래한다는 이론이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어른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인격의 한 측면이 과거의 어느 시절에 고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 명상 센터에서 만난 프랑스 여성 마르타는 일곱 살에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녀야 했고 외할머니가 와서 마르타를 돌봤다. 누구도, 단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것은 철저한 금기 사항이었으며, 어린 마르타는 아버지가 왜 사라졌는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불행한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버지가 다른 여성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마르타는 결혼을 해 두 아이를 낳았다. 아시아 문학을 전공해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부족함 없이 살아갔다. 어느 날, 혼자서 일주일 동안 아일랜드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온 마르타는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누구도 그녀의 돌연한 결정을 되돌릴 수 없었다.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었으며, 그것으로 끝이었다. 남편은 떠나야 했고, 자신의 외할머니가 그랬듯이 마르타의 어머니가 와서 아이들을 돌봤으며, 두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대물림되었다.

그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남편이 돌연 자신을 떠남으로써 자기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강박감 때문에 그녀 내면의 놀란 아이가 먼저 결별을 선언했다는 사실을, 과거에 일어난 두려움과 앞으로 또 그러하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내면 아이가 치유되지 못한 상실과 무력감 속에 자기방어를 한 것이다.

누구나 내면에 상처 입은 아이가 있다. 아무도 안아 주지 않고 외롭게 내버려 둔 아이가. 그 아이로 인해 인간관계가 힘들어지고, 감정이 폭발하고, 삶이 헝클어진다. 브래드쇼는 이 내면 아이가 사람들이 겪는 불행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말한다.

 

- 틱낫한은 <화해>에서 내면 아이 치유를 이야기한다.

"우리 내면에는 여리고 아픈 아이가 한 명씩 있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에 힘든 시간을 보냈으며, 아픈 경험이 만져질 때마다 그 감정과 기억들을 무의식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수십 년 동안 이 아이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모른 척한다고 내면 아이가 그곳에 없는 것은 아니다. 어제나 그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아이는 속삭인다. '나 여기 있어. 나를 피하지 말아 줘.' 우리는 그 아이를 내면 깊숙이 밀어 넣고 최대한 멀리 떨어짐으로써 고통을 끝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시간을 길어지게 할 뿐이다. 아이를 찾으러 먼 과거로 갈 필요가 없다. 우리 안을 깊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아이를 만날 수 있다. 상처받은 아이의 고통이 지금 이 순간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 사소한 일상의 문제들을 영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습관을 멈춰야 한다. 영혼이 순수한 기쁨과 웃음을 잃기 때문이다. 영혼을 일구고 가꾸는 일은 자신 안에 깃든 영원성에 다가가는 일이다. 우리 영혼의 일부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지만 또 다른 일부는 영원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한 언어는 세상의 다른 언어들과 거대한 그물망 안에서 출렁이며 만들어진다. 다른 나라의 언어들을 하나씩 배워 가면서 나는 '순우리말'에 대한 주장이 허구에 가깝고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아가 이 관찰은 '나의 고유의 것'에 대한 의구심으로 확대되었다. 나는 '내 생각', '내 마음', '내 자아'라는 말을 당연하게 쓰는데, 과연 그것이 정말로 '내 고유의 생각'이고 '내 고유의 마음'이며 '나만의 고유한 자아'일까?

생각은 언어만큼이나 쉽게 전염된다.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담겨 있는 나의 고유의 생각들은 수많은 '타인의 생각'들과 혼합되어 있다. 따라서 내가 어떤 생각들과 나를 동일시하면서 '이것은 나야'라거나 '이것은 내가 아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 참일까? 혹시 외부와 상호작용하면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나'인데도 내가 마음이라는 공간 안에 가상의 고정된 나를 만들어 놓고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이 자기 착각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

 

- 마음 챙김 명상에서는 이 감정들에게 이름을 불러 주라고 권한다. 슬픈 감정이 오면 "슬픔, 너구나. 어서 와." 하고 이름을 불러 주는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에게도 "안녕, 불안. 안녕, 두려움." 하고.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분노가 일어나면 얼른 이름을 불러 준다. "안녕, 기억. 안녕, 분노. 어서 와. 또 왔네." 하고 인사를 나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손님들에게 자신의 집을 영원히 내줄 필요까지는 없다.

이름 불러 주기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에게 "어서 와." 하고 환영하고 차를 권하는 일이다. 그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수 있다. 그것들과 나의 자각 사이에 여유 공간이 생겨난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나는 내가 화가 나있음을 자각한다.', '나는 내 왼쪽 발바닥이 가렵다는 것을 자각한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더 분명하게 알아차리게 된다.

마음속에 찾아오는 생각과 감정들을 적으로 여기지 말고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명상의 기술이다. 마음을 관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명상의 기술이다. 마음을 관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협력자로.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나는 잠시 화가 났을 뿐이지 화가 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잠시 두려울 뿐이지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며, 잠시 슬플 뿐이지 슬픈 사람이 아니다. 본래의 나는 맑고 고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어떤 감정보다 더 큰 존재이기 때문이다. 새가 날개의 크기에 상관없이 멀리 창공을 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맞이하지 않으면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은 어둠 속에 갇혀 괴물이 된다. 여인숙의 깨비와 망자와 토리가 불을 끄면 공포의 괴물로 변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 인간관계에도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훌륭한 정원사는 어느 가지가 나무에 유익하고, 어느 가지가 단지 자양분을 빼앗을 뿐인지 구분할 줄 안다. 가지치기 안 된 나무가 과수원을 망가뜨리듯 정리되지 않은 관계는 인생을 고갈시키고 불만족과 고통의 원인이 된다. 고통은 우리를 떠나는 것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 '관계가 순수한 기쁨을 주는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자리하고 있는가? 자기희생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결과와 성장을 가져다주는가?'

 

- 어느 명상 센터에서는 이렇게 기도한다.

'내가 가능한 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갖기를. 만약 내가 이 순간에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면 친절하기를. 만약 내가 친절할 수 없다면 판단하지 않기를. 만약 내가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해를 끼치지 않기를. 그리고 만약 내가 해를 끼치지 않을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최소한의 해를 끼치기를.'

 

- 스승은 말했다.

"나무에 대해서든 사람에 대해서든 한 계절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나무와 사람은 모든 계절을 겪은 후에야 결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계절만으로 인생을 판단해선 안 된다. 한 계절의 고통으로 나머지 계절들이 가져다줄 기쁨을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겨울만 겪어보고 포기하면 봄의 약속도, 여름의 아름다움도, 가을의 결실도 놓칠 것이다."

 

- 그 편집자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심과 함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일이다. 상대방의 불행에 공감하되,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는 일이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평정심이다. 영혼의 소진 없이 타인을 지혜롭게 돌보려면 연민과 평정심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돌봄은 단순히 타인에 대한 돌봄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돌봄까지 포함한다. 나도 나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살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얼마만큼 아는 것을 의미할까? '안다'처럼 정반대의 말과 같은 의미인 단어가 또 있을까? 가까운 관계라 해도 어떤 사람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 섣부른 판단으로 우리는 누군가를 잃어 간다. 관계가 공허해지는 것은 서로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이 향하는 방향만 볼 뿐, 그가 어떤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 진실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자신의 편견을 개고 그와 함께 계단 끝까지 내려가는 숙제를 안는 일이다.

 

- 내가 믿는 종교, 내가 깨달은 진리, 내가 지지하는 이념, 혹은 내가 따르는 명상법이나 방식이야말로 진짜이며 다른 것들은 전부 가짜이고 위조품이라고.

내가 진짜라고 주장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혹시 그것은 '진짜 케사르'를 수단으로 '나'를 내세우기 위함이 아닐까?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나의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은 아닐까? 많은 경우에 가짜와 진짜는 본래의 상태가 아닐지도 모른다. 개인의 관점 안에만 있는 주관적인 판단인데 우리가 그것을 절대적인 가치 기준으로 고수하는 것인지도.

만약 그 개인적인 관점과 주장을 내려놓으면 어떻게 될까? 혹시 더 자유로워지지는 않을까?

 

- 시인 루미는 말한다.

"그대가 사랑하는 것이 그대를 끌어당길 것이다. 그것을 말없이 따라가라. 그대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신이 배치해 둔 표식들에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길을 발견할 것이다. 나무에 새겨진 표시를 따라 방향을 정하듯, 불분명하게 뒤엉킨 삶의 미로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일상 속 어디에나, 타인과의 대화나 꿈속에도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작은 표지판들이 있다. 모두가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찾는 것이 사실은 우리를 찾고 있다.

표식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길들을 지나쳐 왔다면 잠시 한적한 숲의 어느 나무 아래서 눈을 감고 뒤돌아보라. 당신이 여행한 어느 골목, 어느 지점에선가 당신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기다리던 어떤 표식이 더 오를지도 모른다. 당신의 삶을 변화시켰을지도 모를 무심코 나눈 대화 속 한 단어, 우연히 넘긴 책의 한 구절이. 삶이 당신에게 말을 걸어왔을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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