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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오직 두 사람 (김영하 저 / 출판사 문학동네)

by hyeranKIM 2020.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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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이후 7년 만이다. 제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아이를 찾습니다, 제3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를 포함해 일곱 편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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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11

- 언니는 희귀 언어를 사용하는 중앙아시아 산악 지대의 소수민족 출신으로, 스탈린 치하를 피해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난 수십 명 중 하나예요. 뉴욕에서 이 언어를 쓰는 사람은 언니네가 전부예요. 고향에서는 러시아어가 표준어가 되었고, 언니네 언어는 이미 소멸되었다는 소식도 들려와요. 하지만 언니네가 정착한 뉴욕은 달라요. 수백 개의 화석 언어들이 아직도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어요. 고향에서조차 잊힌 말을 그대로 쓰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뉴욕을 언어의 박물관이라고도 한대요. 하지만 자식들은 영어로만 소통하고 처음에 같이 고향을 떠나왔던 사람들은 하나둘 세상을 등져요. 마침내 오직 언니하고 다른 한 명만 남아요. 둘은 어쩌면 전 세계에서 이 언어로 대 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들일지도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 이 둘, 최후의 두 사람이 사소한 말다툼 끝에 의절을 해요. 그러곤 수십 년 동안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결국 한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요.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그래,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다툼. 만약 제가 사용하는 언어의 사용자가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면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수십 년 동안 언어의 독방에 갇힐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치만 사소한 언쟁조차 할 수 없는 모국어라니, 그게 웬 사치품이에요?

 

2. P13

- 회사에서 잘리던 날, 회사 담벼락에 노조가 붙여놓은 플래카드를 봤대요. '해고는 죽음이다.' 그걸 보고 오빠가 뭐라고 했을지 저는 알아요. "아니지, 죽음이 해고지. 해고된다고 죽는 것은 아니지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니까." 명언이나 상투어를 뒤집어서 새로운 말을 만드는 것은 오빠의 오랜 버릇이거든요. "해봐. 이상하게 다 말이 된다니까." 오빠가 사람들에게 장담하면 그때마다 사람들이 이것도 해보라, 저것도 해보라며 문장을 던져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누군가 이렇게 말하면 오빠는 빙글빙글 웃으며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라고 답하고요.

 

3. P21

- 왜 그런 데 가면 레벨 테스트부터 하잖아요? 그거 하러 가서 앉아 있는데, 눈만 내놓고 몸 전체를 가린 무슬림 여성이 남편과 같이 들어왔어요. 복장으로 짐작하건대 굉장히 엄격한 이슬람 국가 출신인 것 같아 보였어요. 남편은 먼저 유학을 와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서 영어가 유창한 편이었지만 아내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것 같았어요. 레벨 테스트가 시작되자 문제가 생겼어요. 선생이 남자였거든요. 선생이 영어로 간단한 질문, 예를 들면 "어디에서 왔나요?" 같은 질문을 하면 남편이 대신 "제 아내는 파키스탄에서 왔다고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거예요. 아내의 레벨을 측정해야 되는데 남편이 대답을 하니 제대로 될 리가 있나요. 선생이 여러 차례 부인이 직접 대답하라고 했지만 남편은 완강했어요. "나의 아내는 율법에 따라 외간 남자와 대화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나에게 말을 하면 내가 전해주겠다." 남편도 미국 생활을 오래 해서 그게 얼마나 우스운 건지 잘 알고 있었을 거예요. 엄청 불편해 보였거든요. 하지만 그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거예요. 그 역시 그런 문화에서 자랐고, 아내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4. P37

- 일상은 더없이 평온했어요. 엄마는 보기 좋게 늙어가고 있었고 어려운 일은 현정이네가 알아서 처리해주었어요. 결혼 안 하고 산다고 열등한 인간 취급하는 눈길도 없었고, 나이 때문에 못할 일도 없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언니. 인간은 참 알 수가 없지요. 제가 원래 골초였다는 얘기 안 했죠? 한국에서 그랬어요. 하루에 한 갑 넘게 피웠는데 미국 가선 끊었어요. 거긴 담배 한 번 피우기가 정말 힘들거든요. 처음 석 달만 현정이네에 있고 그 후로는 작은 콘도 하나 빌려서 혼자 살았는데요. 그 콘도만 해도 입주자가 집안에서 담배 피우다 걸리면 벌금이 어마어마해요. 건강에도 나쁘고 담뱃값도 비싸니 이참에 끊자고 결심을 하고 성공도 했어요. 그런데 공허해요. 늘 적막한 시골길을 걸어가는 느낌이에요. 공기도 좋고, 경치도 아름답고 그런데 한량없이 권태롭기만 한 기분.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 나를 밀어낸다는 저항감. 그런 기분 언니는 모르시죠? 그런데 미국에 가면서 끊은 게 하나 더 있잖아요? 인생에 도움 하나도 안 되는 유독하고 중독적인 존재. 아빠요. 둘과 거의 동시에 결별했으니 그 공허감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알아채기가 어려웠어요. 아빠와 담배가 없는 삶. 둘 중 그 어떤 것도 다시 시작하기 싫었어요. 끊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지 때문이에요. 그런데 알고는 싶었어요. 이 공허와 권태는 둘 중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어느 쪽이 더 치명적인가.

 

5. P39

-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 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

 

6. P71

- 그는 미라를 한번 정신병원에 갖다 넣으면 다시는 데리고 나오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를 지탱해온 미신적인 신념들도 무너지고 말 것이었다. 미라가 정신병원에 가면 성민이는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비이성적인 믿음. 이 믿음은, 성민이만 돌아오면 미라의 병은 깨끗이 낫게 되기라는 또 다른 믿음과도 이어져 있었다. 그런 믿음을 차치하고라도 윤석은 미라를 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미친 아내를 떠맡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윤석이 정신 나간 아내에게 기대고 있었다.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매일 전단지를 돌린 것처럼, 남들이 보기엔 아무 희망도 없는 부부관계에서 그는 삶을 지탱할 최소한의 에너지를 쥐어짜내고 있었다. 그에게 미라는 카라반의 낙타와도 같은 존재였다. 목표와 희망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말을 못 해도 돼. 웃지 않아도 좋아. 그저 살아만 있어다오. 이 사막을 건널 때까지. 그래도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이 끔찍한 모래 지옥을 함께 지나가겠는가.

 

7. P87

-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힘든 순간을 겪을 때마다 서진은 돌아가고 싶었다. 인생의 원점, 자신이 떠나온 곳, 사람들이 흔히 고향이라 말하는 어떤 장소로. 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곳으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떠돌이의 인생을 살았다.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고, 커서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사람에게도 비슷해 묵은 관계라고는 없었다. 오래전에 본 어떤 영화에서 인생이 망가진 주인공이 "나 돌아갈래!"라고 외칠 때, 서진은 그에게 동정심이 생기기는커녕 가벼운 질투가 일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그가 영원히 갖지 못할 값진 성취처럼 보였다. 그런 성취가 누군가에겐 기본으로 주어지고, 자신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니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은가.

 

8. P88

- "나 만난 거 후회하니?"

인아는 검지로 술잔의 테두리를 만지며 말했다.

"후회해. 너를 안 만났다면 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도 몰랐을 거고, 다들 살듯이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정답이라고 생각했을 거고, 다 참았을 거고, 참다가 그냥 죽었을 거고, 그럼 별로 억울할 것도 없었을 거고...."

서진은 인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난 후회 안 해. 너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의 삶은 잘 생각이 안 나는 간밤의 꿈같아. 한밤중에 무슨 꿈을 꾸었든 아침에는 전날 밤에 잠든 곳에서 눈을 뜨잖아."

 

9. P92

-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말이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

 

10. P199

-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느끼는 게 뭔지 알아?"

"무슨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것 같은 개소리할 거면 집어치워. 죽을 때 죽더라도 약은 팔지 말자."

"살아오는 동안 내 영혼을 노렸던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는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이 갑자기 주먹을 뻗었다. 병자답지 않은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피했다.

"그렇지, 주먹이 날아오면 이렇게 잘도 피하면서 왜 영혼을 노리는 인간들에게는 멍하니 당했냐는 거야."

 

11. P202

- 그는 공식적으로 세 명의 여자와, 비공식적으로 다섯 명의 여자와 살았지만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다. 마치 '죽을 때는 누구나 혼자 죽는다'라는 말을 몸소 입증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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