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20
- 소진은 매일, 매 순간순간 후회한다. 빗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음식이 들어가기만 하면 토해서 수액과 영양제로 버티고 있다. 소진이 혹시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봐 엄마가 밤마다 소진의 침대 옆에 이불을 깔고 잔다. 소진은 변호사에게, 선배에게, 가족들에게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낫지 않겠냐고 묻곤 한다. 모두들 피해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며 너무 힘들다면 여기서 멈추어도 된다고 말하는데 정작 소진이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같은 과장에게 성희롱 당하다 퇴사했다는 직원은 소진을 보자마자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때 자신이 조용히 덮고 넘어가지 않았다면 소진도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자책했다. 물론 소진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덮고 넘어간 두 번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피해자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2. P22~23
-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하고, 피곤하지만 대학원에 다니며 계속 공부하고, 게으른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 지금 내 삶이 무척 만족스럽다. 하지만 나리가 말한 그 '평범한 삶'을 나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3. P26~27
- 처음 내가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막내작가들은 PD와 메인작가의 개인적인 심부름을 당연하게 했다. 점심 먹고 들어오는 길에 샌드위치를 사다주는 일, 이왕이면 조금 돌아서 좋아하는 샌드위치로 사오는 일, 그 길에 수선 맡긴 구두를 찾아다주는 일, 도서관에 들러 논문에 필요한 책을 빌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 분위기가 바뀌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는데 지금도 사실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깟 커피 한 잔, 정말 그깟 고민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4. P29
- 나도 그랬어, 우리 때는 더 했어, 라는 말을 하는 메인작가가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안 해야 하는 말을 안 하는 사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오늘 삼킨 말, 다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말들을 생각한다.
5. P43~44
- 엄마 말대로 사서 고생이지. 사서 고생이긴 한데 미안하지만 엄마랑 같이 살 때보다는 좋아. 엄마는 내가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에 집을 나왔다고 생각하지? 맞아. 그런 것도 있었어. 낮에는 바쁘게 일하고, 퇴근 후에는 전시 보고 공연 보고 영화관이나 서점에 가볍게 들르고 짬짬이 인문학 강좌도 들으면서 교양 있게 살고 싶었어. 우리 집 근처에는 그런 걸 할 수 있는 데가 없잖아. 흔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하나 없는데. 물론 지금도 내가 꿈꾸던 대로 살고 있지는 않아. 그럴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
처음 합격통보 받았을 때는 이 정도 월급이면 혼자 살기에 충분할 줄 알았어. 내가 씀씀이가 큰 것도 아니고 특별히 돈 나갈 데가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 서울 월세가 이렇게 비쌀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지 뭐야. 그렇다고 돈을 많이 받으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퇴근이 너무 늦거든. 서울 사람들은 참 이상해. 잠을 안 자나봐. 회사에서 자주 저녁을 시켜먹는 식당이 하나 있는데 여섯시 삼십분 넘어서 시키면 배달이 한 시간씩은 기다려야 해. 근처 빌딩에는 아홉시, 열시까지 환하고 불이 켜져 있는 창이 태반이야. 그 시간에 퇴근하면서도 그냥 가기 아쉽다며 다들 맥주를 한잔씩 하고 취하면 또 다른 종류의 술을 마시러 가고. 그렇다고 서울이 안전한 도시도 아닌데 말이야.
6. P48
- 예전집 구할 때 사실은 삼층이라서 좀 꺼려졌었어. 보증금 오백만원만 더 있으면 더 높은 층을 구할 수 있는데, 천만원만 더 있으면 공동현관에 CCTV와 비밀번호 잠금장치가 있는 집을 구할 수 있는데, 이천만원만 더 있으면 대로와 바로 맞닿은 경비실도 있는 집을 구할 수 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번 일을 겪고 보니까 돈이 없는 게 그저 조금 아쉬운 일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받는 일이더라.
7. P48~49
- 사실 좀 속상하더라. 네가 그 미친놈이냐고 남자의 멱살을 잡아줄 사람, 피해자한테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경찰서를 뒤집어놓을 사람, 당장 이사 나갈 거니까 보증금 내놓으라고 고함을 칠 사람이 필요했던 게 아니야. 괜찮냐고 놀랐겠다고 마음 편안해질 때까지 곁에 있어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힘들었어. 엄마한테 말해봐야 내 탓만 할 텐데 차라리 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부터 든다는 게 서러웠어. 늘 그랬잖아. 내가 아파도, 다쳐도, 힘들어도, 실패해도, 누군가에게 속거나 상처를 받아도 늘 내 잘못이랬잖아. 그런 일을 당하는 내가 못난 거랬잖아.
8. P54
- 발색이 좋은 고급 브랜드의 립스틱으로 입술을 채우며 은순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과 열정을 대신할 기술과 제품의 도움을 받는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9. P60
- 십삼 년 전 삼순은 말했다.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서른을 앞둔 은순에게는 여전히 두근거리는 일들이 많다. 매장에 나갈 때도 교육을 받을 때도 남자친구를 만날 때도 그렇다. 좋은 영화를 보고 예쁜 옷을 입고 상쾌한 향수를 뿌릴 때도 그렇다. 심장이 딱딱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촌스러운 이름, 버거운 일상, 불안한 미래, 하지만 계속 두근거릴 줄 아는 김은순으로 살고 싶다.
10. P73
- 연애 안 하니, 결혼 안 하니, 지금 낳아도 노산이다, 애부터 만들어 와라, 너만 아니면 우리 집에 걱정이 없다, 같은 말들을 지겹도록 들어왔다. 이제 와 내가 있어서,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고 불안정한 일자리나 전전하는 막냇동생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마음 놓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못된 마음이었고 나는 원래 못됐다.
11. P153
- 내 복직만 생각했다면 이렇게 긴 시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불안정한 고용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승객의 안전을 비용과 효율로 계산하지 않고, 여성의 일을 임시와 보조 업무로 제한하지 않으려는 싸움. 나는 여전히 젊고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12. P158
- 수빈은 비정규직, 최저임금, 근속수당 같은 단어들을 다시 검색했다. 낯선 단어들은 아니지만 정확한 사전적 의미와 관련 규정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른다. 수빈은 일주일에 두 시간씩 경제과목을 배우고 있다. 임금 결정 시 고려되는 원칙 - 동일노동 동일임금, 외부적 공정성, 내부적 공정성, 최저 생계비... 시험기간에 동글동글 연필을 굴리며 열심히 외웠던 내용들은 지금도 줄줄 읊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배우고 외웠던 내용들이 현실과 이어지지 않았다.
13. P190~191
-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다 큰 딸들은 더 이상 나에게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다. 달래달라고 위로해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정은이는 이혼하고 정아는 결혼했다. 내 일상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침에는 주민센터 요가교실에 다녀오고 낮에는 김밥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은 거의 매일 혼자 먹는다. 오늘도 남편은 약속이 있고 나는 길 건너 새로 생긴 초밥집에 가볼까 싶다. 살면서 한 번도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어본 적이 없는데 지금부터 하려고 한다. 내일은 혼자 영화를 보러 갈 것이고 주말에는 혼자 한강변을 산책할 것이다.
14. P195
- 요즘 사람들 사는 게 다 그런가봐. 자식들은 나이 많은 부모한테 제 새끼를 종일 맡겨놓기 죄송하고 불안하고, 노인네들은 내가 제대로 못 놀아주고 못 가르치나 싶고, 애들은 또 애들대로 학원 뺑뺑이 하면서 지쳐가고. 왜 돈은 돈대로 들고 몸은 몸대로 힘들고 서로 얼굴도 제대로 못 보면서 온 가족이 힘들기만 한지 모르겠네.
15. P196
- 요즘 그런 말이 있대. 전업주부 딸은 백점, 칼퇴근하는 공무원이나 교사 딸은 팔십점, 그래도 저녁 먹기 전에 집에 오는 직장인 딸은 오십점, 밤 열두시에나 퇴근하는 대기업 직원 딸은 빵점이라고. 딸이 일하는 시간이 길수록 손주를 오래 봐야하니까. 진명 아빠, 우리 딸, 우리 자랑스러운 딸이 빵점이래. 너무 서운하고 속상했는데 아니란 말이 선뜻 나오지를 않더라고. 사실 애들 보는 거 많이 힘들어.
16. P200~201
- 진명 아빠 그거 모르지? 내가 우리 딸 어려서부터 "엄마처럼 살지 마" 그 말 참 많이 했어. 배우고 싶은 만큼 배우고, 하고 싶은 일 찾아 열심히 하라고, 돈도 많이 벌어서 네 이름으로 집도 차도 가져보라고 했어. 우리 딸 좀 힘들어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데 딸이 계속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한참 더 손주들을 키워야 할 것 같네. 언젠가 딸이 회식했다고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서는 엄마 미안해, 하면서 펑펑 우는데 마음이 참 안 좋았어. 그게 왜 걔가 미안할 일이야. 걔는 내가 가르친 대로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근데 진명 아빠, 나 사실 좀 억울하고 답답하고 힘들고 그래. 울 아버지 딸, 당신 아내, 애들 엄마, 그리고 다시 수빈이 할머니가 됐어. 내 인생은 어디에 있을까. 아이고 벌써 시간이 일곱시 반이네. 난 이제 밥해야겠다.
17. P272~273
-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왠지 낭만적인 기분이 든다. 나와 우리 집은 가난했을지언정 세상은 가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유로웠고 자신감이 넘쳤고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웰빙'이 유행이었다. 국민의정부-참여정부 시절 대학에 다니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경직되거나 억압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가성비'와 '저렴이'가 트렌드가 되었다. 목소리들은 권력에 가로막혔고 혐오와 비하가 보편정서가 되었다. 잘살 수만 있다면, 하는 사이 도덕성의 기준은 끝도 없이 추락했다. 그리고 몇 년 사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마흔이 되었다. 마흔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단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 태도와 가치관에 따라 얼굴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이제는 내가 주변 상황에 영향을 받기만 하지 않는다. 내 삶과 태도와 가치관이 주변의 사람들을, 조직을, 더 넓게는 사회를 바꾸기도 한다. 책임지는 어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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