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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저 / 출판사 문학동네)

by hyeranKIM 2020.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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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소설집.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문장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은 소설을 쓰는 작가(소설가 김연수), 재능 있는 작가의 탄생을 알리는 소설집(소설가 김영하)이라는 평을 받은 강렬한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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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1. P13

손가락 하나 잡지 않고도, 조금도 스치지 않고도 수이 옆에 다가서면 몸이 반응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수이의 손을 잡았을 때,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창고 구석에서 수이를 처음 안으면서 이경은 자신이 뼈와 살과 피부를 가진 존재라는 것에 감사했고 언젠가 죽을 때가 되면 기억에 남는 건 이런 일들밖에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2. P18

여자 축구부가 있는 학교가 얼마 없었기에 수이는 남자 중학교 선수들과 연습 시합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수이는 어느 때보다도 침울해졌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경도 차차 그 사정을 알게 됐다. 남자 선수들이 경기 중에 여자 선수들의 몸을 만진다는 것이었다. 다른 선수들도 그런 일들을 겪지만 그저 욕을 하고 털어버리는 분위기라고 했다.

수이가 문제 제기를 하자 코치는 오히려 불쾌해했다. 운동선수가 운동이나 하면 되지 다른 일에 신경을 쓴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소리 할 시간에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남자애들은 원래 다 그런 거고, 짓궂은 장난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건 유치한 일이라고 했다. '짓궂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줄곧 생각해왔다고 수이는 이경에게 말했다.

"비열한 말이라고 생각해. 용인해주는 거야. 그런 말로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힐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거야.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다니."

 

3. P24

그런 수이를 보며 이경은 대학에서 알게 된 아이들을 생각했다. 주량에도 안 맞는 술을 잔뜩 마시고 울기도 하면서 주정하는 아이들을,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일대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아이들을. 자신의 약점을 부끄러움 없이 노출하는, 억눌리지 않은 아이들의 자아가 이경은 신기했다. 십자인대가 나가도, 평생의 꿈이 시들어버려도 그 슬픔을 한 번도 토로하지 않았던 수이가 그제야 이경은 낯설게 느껴졌다.

 

4. P26

수이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수이는 어느 순간 자신에 대해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부상을 당했을 때도, 의사에게서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도 수이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자동차 정비 일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 일을 택했느냐는 말에 수이는 어때를 한 번 으쓱했을 뿐이었다.

둔치의 계단에 앉아서 이경은 서울에 올라온 뒤로 계속해서 부정하던 사실을 인정했다. 나는 수이와 만나면서도 이렇게 외로웠구나. 벽을 보고 말하는 것처럼 막막했었구나.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었는데, 더 묻고 싶었는데, 너의 생각과 감정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었는데 그게 잘되지 않았어.

 

5. P42

은지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긴 딸만 넷인 집의 셋째라는 것, 부모로부터 진심 어린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다는 것, 그래서 자기도 자신을 어떻게 좋아해야 하는지 몰라 아직도 힘들다는 말을 은지는 점심으로 무얼 먹었는지 말하듯 대수롭지 않게 했다.

"이런 얘기 아무한테나 막 하고 다녀요?"

이경이 묻자 은지는 눈을 내리깔고 웃었다.

"나도 사람 봐가면서 말해요. 그리고 이경 씨는 아무나가 아니니까."

은지는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동생에게 아웃팅을 당해 아빠와 삼촌들에게 몰매 맞은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뽑히고 이마가 찢어져 꿰매야 했다는 이야기였다.

"단 한 명이 필요했어요. 단 한 명. 내 편을 들어줄 단 한 사람. 때리지 말라고 말해줄 사람. 그런데 모두 다 구경만 하는 거죠. 남자 어른들의 일이니까 끼어들 수 없단 듯이."

 

6. P52

이경은 수이가 최소한으로 상처받기를 바랐다. 그래서 수이에게 은지에 대해 말하지 않기로 했고, 그것이 수이를 위한 일이라고 철저히 믿었다. 수이를 속이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경은 자기 자신조차 오나벽하게 속일 수 있었다. 이경은 자신의 기만이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그 거짓말이 비겁함이 아니라 세심하고 사려 깊은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려라니. 지금의 이경은 생각한다. 배려라니. 그 거짓말은 수이를 위한 것도,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심이고 위선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이경은 몰랐다. 수이는 그런 식의 싸구려 거짓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사실도.

 

601, 602

1. P68

나의 아빠는 맏아들이었고 결혼한 지 십 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한 엄마는 친인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늘 은근한 지탄의 대상이 되고 했다. 그 잘난 맏며느리, 밖에서 일한다고 살림도 소홀히 하고 아들도 낳지 못하는. 그것이 엄마 이름 김미자 앞에 붙은 버겁고도 끈적이는 수식이었다. 엄마의 일부는 그 수식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엄마의 일부는 그 수식을 수의처럼 입고 있었다. 아들을 낳지 않는 한 벗어버릴 수 없는 무거운 옷. 딸 아들 운운하며 효진이를 깎아내리던 아줌마의 말은 사실상 아들 없는 엄마의 처지를, 아무리 잘 키워봤자 그저 '가스나'일 뿐인 나를 향한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2. P76

나는 방으로 온 엄마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 기준이 어떻게 효진이를 때리고 욕하고 괴롭혀왔는지, 효진이의 부모가 그 모든 것들을 얼마나 태연하게 방관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엄마는 무표정하게 내 이야기를 듣더니 말했다.

"남의 집 일에 나서는 거 아니야."

"엄마."

"네가 나선다고 뭐가 달라져?"

"그래도 엄마...."

"오늘 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 말을 하는 엄마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넌 여자애야."

엄마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를 바라보다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거짓말을 했어. 엄마는 늘 친구를 도와야 한다고 했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나는 슬픔 속에서도 엄마의 반응에 분노를 느꼈다. 외로움이 서린 분노였다. 나는 나중에 아줌마에게서 엄마가 로봇을 부순 것에 대한 보상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보상금은 어린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액수였고, 나는 깊은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오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것이 임신을 위한 퇴사였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 친척들에게 들어 알았다. 어미가 되어서 돈 번다고 애를 방치한다는 말을 듣던 엄마는 막상 직장을 관두고서는 남편 잘 만나 집에서 속 편하게 노는 여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지나가는 밤

1. P93

세상에는 그런 자매들이 있었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핸드폰으로 영상통화를 하고, 같이 여행을 가기도 하고, 같이 살기도 하고, 싸웠다가도 금세 화해하는 자매들이. 그렇게 평생을 친구처럼, 부부처럼,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로 연결되어 있는 자매들이. 서슴없이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매들이.

 

2. P93~94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했어. 사귀던 사람이랑 헤어지면 미칠 것 같았지. 다시 만나자고 연락하고, 그러다 잘 안되면 다른 사람 만나는 식으로 지냈어. 나한테 나쁘게 해도 혼자인 것보다는 나으니까 좋은 부분만 보려고 노력하면서. 그런 식으로 자꾸 나를 속였지."

주희가 맥주를 한 모금식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윤희는 마음이 아렸다. 나도 알아, 그 마음. 윤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찾게 될 때가 있잖아. 그게 잘못은 아니지. 외롭다는 게 죄는 아니지. 알면서도 왜 네가 그러고 지내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을까. 너에게서 내 모습이 보여서였나 봐. 그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그랬나 봐.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그저 그 마음을 억눌렀던 것뿐이었으니까.

 

3. P97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얼니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무료하고 긴 하루하루로 이어진 시간, 아무리 노래를 부르고 그네를 타도, 공상에 빠져 이야기를 지어내도, 자신들이 작가이고 감독이고 배우이고 관객인 연극을 해도,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거리까지 달려간다고 해도 메워지지 않았던 커다랗고 텅 빈, 그 무용한 시절을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4. P100

"기도가 통하는 세상이면 그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겠지. 정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그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간절히 살기를 바란 게 아니란 말이야?"

거기까지 말하고 주희는 가만히 숨을 쉬었다. 윤희의 대답을 바라는 것처럼, 윤희는 팔에 얼굴을 받치고 누워 있는 주희를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그런데도, 가끔은 사람들이 우리 엄마 죽지 말라고 빌어준 거, 그 기도들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 기도들은 기도 나름대로 계속 자기 길을 가는 거지, 세상을 벗어나서. 그게 어디든 그냥 자기들끼리 가는 거지. 그것도 아니라면...."

 

모래로 지은 집

1. P112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에게 연연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상하고 망가지고 비뚤어진다고 생각했으니까. 구질구질하고 비뚤어진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초연하고 외로운 인간이 되는 편을 선택하고 싶었다.

 

2. P118

모래는 자신의 환경을 조금도 과시하지 않았다. 지하상가에서 산 삼천 원짜리 티셔츠를 입고 다녔고 편의점에서 파는 로션을 발랐다. 그런데도 그 애는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태가 났다. 그 애의 넉넉함은 물질이 아니라 표정과 태도에서 드러났다. 모래는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하거나 나쁘게 보려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전전긍긍하지 않고 애쓰지 않았다. 관대했다.

그 관대함은 더 가진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태도라고 그때의 나는 생각했다. 비싼 자동차나 좋은 집보다도 더 사치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3. P120~121

술에 취해 들어온 아빠는 왜 자는 나를 깨워 내가 태어나서는 안 되는 애였다고 말했을까. 내가 미숙아로 태어난 까닭으로 처음부터 돈이 많이 깨졌다면서 나를 새는 바가지라고 불렀지. 화를 냈지만 슬퍼 보였어. 사는 게 고되어서 그랬겠지. 돈도 없는데, 아이를 원하지도 않았는데 가지게 되었으니 힘들었겠지.

어린 나는 부모를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더 착한 아이가 되면, 훌륭한 아이가 되어 민폐 그 자체인 내 존재에 대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모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는 부모가 나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나를 그저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다고 인정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이라도 알아낼 수 있다면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가짜 이유라도 만들어서 믿고 싶었다.

공무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나를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기를 강요받고 있었다고.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4. P136

"사람은 변할 수 있어. 그걸 믿지 못했다면 심리학을 공부할 생각은 못 했을 거야.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남을 변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은."

1학년 말, 전공 선택을 하면서 공무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이 궁금하고,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다면서. 타고난 부분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같은 일을 경험하더라도 해석하고 반응하고 회복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나는 공무가 인간에게 품는 낙관이 신기했고, 때로는 그런 말들이 진심이 아닐 거라고 의심했다. 네가 어떻게 커왔는지 뻔히 아는데, 그런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이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가해자들도 변할 수 있어? 달라질 수 있어? 그 인간들이 변하고 달라진다고 해서 그들이 학대한 사람들의 상처가 없어져?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무의 말에 순간이나마 마음을 걸치고 싶었다. 타고난 것은 변하지 않지만 같은 일을 겪어도 극복할 힘이 길러질 수 있다는 믿은 같은 것에.

 

5. P149

내가 쓴 편지들은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웠다. 점심으로는 무얼 먹었고, 저녁에는 무얼 먹었고,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을 봤고, 어떤 공부를 했고, 학원에서는 시험지를 몇 장 채점했고 하는 아무 쓸모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도 나는 쓰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공무가 웃을만한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더라도 메모해놓았다가 편지에 썼다. 너 그거 정말이야? 웃겼어,라는 답장이 오면 그보다 큰 보람이 없을 정도였다.

 

6. P161

나를 제외한 강사들은 삼십 대 초중반이었고 처음부터 학원 강사가 꿈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강사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대학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어떤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는지, 왜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지, 어째서 개인주의 문화가 판을 치게 되었는지,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대표라도 된 기분으로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러는 선생님들은 왜 입시 지향적인 사교육 현장에서 일하고 있느냐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피치 못할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자신들 삶의 모순을 또박또박 말하는 건 잔인한 짓이 될 테니. 그 시간들을 거치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런 비판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테니까.

 

7. P163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겠죠. 어쩌다 저런 인생 살게 됐나 싶을 거예요. 근데 있잖아요. 최선을 다했던 거예요. 우리 모두. 순간순간. 그게 최선이었던 거예요. 포기하지도 않은 거예요."

 

8. P179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9. P180

셋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마른 몸으로 울던 모래를 떠올렸다. 그날 모래의 말과 눈물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닫게 됐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그 고통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는 것도.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줬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보다 고통스러운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망을 준 나 자신이었다.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된 사람조차 등을 돌리게 한 나의 메마름이었다. 사랑해. 나는 속삭였다. 사랑해, 모래야.

 

10. P181~182

당시는 몰랐지만 오랜 시간 내 마음속에서 자라나던 공포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커졌던 것 같다. 절대로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두려움. 그것이 나의 독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나를 조심스러운 사람이 되게 했다. 어느 시점부터는 도무지 사람에게 다가갈 수가 없어 멀리서 맴돌기만 했다. 나의 인력으로 행여 누군가를 끌어들이게 될까 봐 두려워 뒤로 걸었다.

알고 있는데도. 서로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랑할 수 있다는 것도,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불완전함 때문에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몸은 그렇게 반응했다.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적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사랑만큼 불공평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비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그래서.

 

고백

1. P202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많은 경우 옳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상을 알아갈수록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진희에 대해서, 진희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 미주는 대학에 와서야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다. 겉으론 의연한 척하면서도 여렸던 그 애가 받았을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미주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그 애가 얼마나 용기를 내어 커밍아웃을 했을지, 그때 자신과 주나가 했던 행동이 얼마나 끔찍한 짓거리였는지도, 미주는 그 사건으로부터 일 년 반이 지나서야 솔직히 인정할 수 있었다. 진희가 자길 버린 게 아니라 자기가 진희를 버렸다는 사실을 미주는 그제야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었다. 후회로 울어 자기 마음을 위로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쏟아지는 자신의 눈물이 미주는 역겨웠다.

 

2. P209

피조물에게서 위안을 찾지 마십시오. 수사가 되었을 때 나의 담당 수사는 그렇게 말했다. 감실 앞으로 나아가세요. 하느님께 이야기하세요. 그의 말에 나는 일정 부분 동의했으며 신에게 나의 존재를 의탁하고자 했다. 신의 현존에는 분명 그가 말한 위안이 존재했다. 그런데도.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손길

1. P219

그때의 엄마는 언제나 혜인에게 미안해하는 사람이었고, 그런 엄마 앞에서 혜인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어떤 나이까지 자식은 부모를 무조건 용서하니까. 용서해야 한다는 마음도 없이 자연스럽게. 어떤 이유도 없이 무조건 부모를 좋아하는 마음처럼,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의 굳은 마음과 달라 자신의 부모를 판단하지도 비난하지도 못한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2. P231

어쩌면 여자도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인에게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혜인과 자신 사이를 망쳐버릴까 봐, 혜인을 떠나게 할까 봐 자제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랑한 사람이고, 나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가벼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웃음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혜인은 생각했다.

 

아디치에서

1. P274~275

왜 모든 일을 다 자기 힘으로 하려는 것이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살아와서 그렇다고 말했다.

넌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야. 어른들은 아이였던 그녀를 그런 식으로 칭찬했다고 했다. 부지런한 아이, 오빠 동생에게 잘 양보하는 아이,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아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그녀는 자라왔다. 그리고 그녀는 어른들의 그런 말들을 증명이라도 하듯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 칭찬에 부합하는 아이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수록 박수 소리가 커진다는 것을 알아서, 무리를 해서, 열심히 해서, 착하게 굴어서, 그렇게 조그마한 칭찬이라도 받아서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었다고, 타인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줄 거라는 기대는 하나씩 버렸다고. 다른 사람에게는 기대지 말자,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다짐하며 살아왔다고. 그녀에게 삶이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2. P282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은에게서 문자가 왔다.

-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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