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ook

3n의 세계 (박문영 저 / 출판사 한겨레출판사)

by hyeranKIM 2020. 11. 21.
728x90

 

 

3n의 세계

30대 한국 여성의 몸에 대해 가감없이 다룬 웃픈 에세이툰이다. 구체적으로는 20대에서 30대로, 미혼에서 기혼으로,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겪은 일들을 아주 세밀하고 재미있게 풀어냈

www.aladin.co.kr

 

- 매해 더 묽고 넓은 존재가 되어, 내 바깥과 경로를 잘 응시하고 싶어진다. 고기보다는 탄수화물을 훨씬 좋아하지만 언젠가는 고기를 완전히 안 먹는 사람이 되고도 싶다. 의자를 빼면서, "가져가도 돼요?"라고 묻는 사람이 되기 싫다. 지하철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그대로 밀며 승차하는 사람이 되기 싫다. 혼자 있고 싶은 사람 곁에 붙고, 함께 있고 싶은 사람 곁을 떠나는 사람이 되기 싫다. 하찮은 일에도 수단과 방법을 숙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고마움과 부당함을 분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체구보다 작은 아이들과 동물들이 영원히 만만해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시선 손끝, 무릎 뜨지 않게, 배에 힘 단단히 주시고. 요가 수업 때 거울에 내 모습이 비치면 화들짝 놀란다. 얼굴이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과 나는 왜 저 강사에게 순순히 기합을 받고 있는가. 왜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형벌에도 궐기하지 않고 참고 있는가. 정강이와 이마를 만나게 하라니, 이것은 해도 해도 너무한 폭정 아닌가. 대동단결하여 독재를 척결하자는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지만 연대원은 한 명도 없다. 이 자발적 굴종의 메커니즘은 무엇인지. 가학성과 피학성은 과연 인간 조건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란 말인가.

 

- 돌이켜보면 털, 각질, 체취, 피부의 질감, 근력 상태를 무시하며 데면데면 지냈다. 요가 시간이 아니면 상체와 하체를 만나게 할 일도, 전신을 수건 짜듯 비틀 일도, 신체의 구석구석을 확인할 계기도 드물었다. 몸이라는 오래된 친구를, 어쩌면 내게서 가장 소외되었던 형식을 이렇게 하나씩 찾아간다.

 

- 밤샘, 커피 복용, 예민한 신경, 불규칙한 생활, 익숙한 불안, 가난, 뉴스, 미세먼지. 모든 것이 얼굴을 상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민얼굴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외관은 어제까지의 내가 쌓인 형태이자 부피다. 밀물과 설물 아래 놓인 모래사장, 매일 뜨는 달처럼 편안한 꼴. 느리더라도 또 변모할 테니,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꾸리고 이끌어가는 모습이니 너무 한심해할 것도 너무 처연해할 것도 없다.

 

- 당신만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는 말을,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다시 거부할 힘이 생겨났다. 여성 외관의 자연스러운 가변성을 불허하는 광고들이 점차 옹색하게 느껴졌다. 좀 놓쳐도 돼. 붙잡고 늘어지지 마. 민낯이 무례하다고 겁주면 너나 잘하라고 대꾸하자.

 

- 20대를 넘김 후로 새털 같은 날이 흘렀다. 이제 몸에 병이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느끼는 건 내 뇌가 고통에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리 걱정하고 겁을 먹어봤자 통증은 새롭고 강하다. 그러니 처방을 받고 심호흡을 한 뒤 오래 누워 있는 수밖에. 어제까지 쌓인 힘을 믿고 쉬어. 세상에 안 껴도 돼. 잠결 우주에서 나의 유한함을 조용히 격려하는 방법밖에.

 

- 아무래도 상관없어. 정보를 적당히 무시하면 걱정도 적당히 덜어지겠지. 아침을 굶어라, 먹어라, 단식을 관둬라, 해라, 잠을 그만 자라, 더 자라. 연구와 통계는 쏟아지고 오늘의 말은 어제의 말을 정면 반박하기 일쑤다, 날아오는 공을 다 받지 않는 고도의 마인드컨트롤은 늦게야 발휘된다.

 

- IT 기술, 케이팝 시장, 미용 산업이 극도로 발달한 다이내믹 코리아는 선진적인 외피와 후진적인 내용을 쌍으로 갖추고 있을 대가 잦다. 키치, 울화, 불통, 여혐, 배금주의, 바닥난 인권 감수성이 범벅된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K-정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정서가 은연중에 만연한 한국은 타인을 몹시 의식하는 동시에 타인에게 깊게 상처를 내는 사회이며 그 속도로 5G를 능가한다. 언제 어디서든 결과를 쉽게 평가한다. 특히 남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여성에게, 여성이 스스로에게 세우는 잣대는 살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편의점 인간>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 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나한테는 그게 민폐였고 그 오만한 태도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너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초등학교 때처럼 상대를 삽으로 때려서 그러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각자 속으로 쥐어본 삽이 그간 몇 개나 될까. 홀로 이런 독백을 해야 버틸 수 있는 곳이 살 만한 장소일까. 폭언만큼 적을 쉽게 만드는 짓도 없을 텐데 어리석은 간섭이다. 이들은 미래를 위한 각종 보장 보험에 가입하면서 왜 말로 자신의 신용자산을 파괴하나. 하지만 입으로 배설물을 내뱉은 사람은 창피해하지 않는다. 문제는 언제나 그걸 듣는 사람이 창피하다는 것이다.

 

- 저항과 마찰 없이 완성된 것은 없다. 지금 구간에 붙들린 하나의 장면 뒤로는 만 개의 배경이 있을 것이다.

 

- 상냥한 사람들이 매사에 미안해하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사람들이 입을 닫는 여기서 나는 또 어떤 호신술을 익혀야 할까.

 

- 아이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늘 여기서 멈추게 된다. 세상에 태어날 아이도 중요하지만, 태어나 더도는 아이들이 무수하다는 사실 말이다. 마음을 다잡고 B에게 입양 이야기를 꺼냈을 때, 양가 어른들이 납득하지 않으리란 의견이 나왔다. 우리의 허약한 경제력도 함께 거론되었다.

" 그러니까 아이를 직접 낳아 기르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너무 많은데."

답변은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다. B가 말한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아이와 지내는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구석구석 다 겪는 것 같아. 혹독하고 고통스럽고, 말도 안 되게 괴로울 때가 있지만 그만큼 변화가 엄청나지. 근데 아이 없이 지내는 사람들은 가을만 보내는 느낌이랄까. 포근하고 쾌적한데 어딘가 일정하게 한산한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다.

"가을만 있는 거 엄청 좋지 않아? 부조리 체험, 다이내믹, 격변 그런 거 진력나. 게다가 우리나라 여름과 겨울이 거의 6개 월식인데 무슨 사계야. 평화롭고 싶어. 지리산 무박 등정 싫어. 둘레길이 좋아."

선선한 미풍이 도는 계절이 얼마나 짧고 귀한지 그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B가 뒷말을 보탠다.

"가을 날씨 좋지. 근데 가을 뒤는 겨울뿐이잖아. 경로가 너무 짧잖아."

어느 시월 저녁, 언덕길에서 네 살배기 여자아이가 아빠를 부르며 뛰어 올라가던 모습을 기억한다. 아이는 전력 질주해 B 앞에 있던 남자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남자가 아이를 들어 올리며 활짝 웃었다. 방황이 체질인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B도 저런 아이의 충만한 포옹을 받았을지 모른다. 누구를 만났어도 사랑을 잘 주고 잘 받으며 아빠로 살았을 가능성이 큰 인간이었다.

 

- 며칠 전에 코를 심하게 고는 B에게 수술을 받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오래된 고민이니 그도 고려해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싫어. 왜. 무서워. 안 할래. 모든 수술은 부작용이 있잖아."

이 단호함은 뭐지. 그의 투명한 반응이 질문을 불러들인다. 무수한 참견에 나도 이렇게 대답할 수 없었나. 신체는 본인 자신의 것이며 그 운용에 관해서는 당사자의 결정이 제일이란 걸 왜 다들 잊고 있는 건지. 어째서 기괴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이 영역에 관여하는지. 고통에 대한 상상을 타인에게 왜 적용하지 않는지. 여성 스스로가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은 곳에서, 선택이 끝났는데도 결혼과 출산을 종용하는 사람들 속에서 저출생은 강화할 것이다. 어머니 연습을 하고 있는 사람과 성장 중인 아이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회에서 누가 섣불리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세상에 나온 아이들에게 닿아야 할 보호와 존중, 애정과 책임도 아직 턱없이 모자란데.

 

- 사랑하는 사람들이 연습할 것은 하나뿐, 서로를 놓아주는 것이다. 서로를 붙잡는 것은 쉽게 되는 일이니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진혼곡> 중

결혼 초반에는 눈물 뺄 일이 많았다. B와 나의 관계가 아닌, 둘을 둘러싼 관계망이 짐작보다 훨씬 촘촘하고 따끔했기 때문이다.

'대체 이런 걸 왜 아무도 안 알려준 거지. 어떻게 죄다 축하를 한 거야? 여긴 무간도잖아.;

나는 비합리적인 시공간에 놓일 때마다, 한국의 결혼문화를 취재하는 인턴기자로 이곳에 방문한 거라 여겼다. 다큐 피디, 독립영화감독이 될 때도 있었다. 만화와 소설의 소재가 나올 거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큰 갈등 앞에서는 모노드라마도 소용없었다. 연애 6년, 동거 2년으로 다져진 B와의 결속력도 허술하게 느껴졌다. 에셔나 마그리트의 그림은 결혼의 이미지로도 보였다. 둘의 외부에서 발생한 문제는 내부를 파고든다. 내부로 들어온 문제는 다시금 외부로 확장한다. B와 다툴 때면 그 너머로 남성들의 긴 행렬이 보였다.

'아, 이렇게 지난한 역사라니. 이렇게도 뻔한 구도라니.'

싸우는 동안 우리가 디뎠던 하나의 빙하는 서서히 갈라진다. 따져 붇는 나를 두고, 그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운동장으로 간다. 기혼자들은 발아래 크레바스를 피해 움직인다.

"같이 있어도 외로울 때가 진짜 외롭지!"

누군가 빙하 틈에서 소리친다. 사랑하는 것과의 이별은 매회 고통스럽다. B가 멀어지면서 약간의 가시거리가 생기면 결혼이란 구조가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가 애초부터 결혼을 원한 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건 헤어지지 않고 대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가까웠지, 양가의 부름에 우왕좌왕하고 가계도에 편입되고 새 세대를 증식시키는 인류 양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신 차려. 결혼의 본질은 증여와 보상이야. 그건 양가 간의 계약이지 너희의 그따위 소꿉장난이 아니란다."

여럿의 핀잔에도 나는 결혼이란 기성품을 수선해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양식이란 약식이며 생활은 재구성해나갈 수 있다고, 둘의 여정을 대안적으로 기획하는 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특이점, 인공지능,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얘기하면서 결혼은 왜 개편 수정할 수 없어? 이 임시적 발명품은 애당초 노동 분배와 범위부터 재가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제도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의 결혼은 진짜 장난일지도. 둘의 합리가 누군가에겐 연민으로 비칠지도. 동창들을 만나고 돌아온 B가 입을 내밀고 이런 망언을 전한 밤도 있었다.

"그 자식이 취해서 펑펑 우는 거야. 내가 돈도 없고 애도 없고 시골에 산다고 불쌍하대."

호감과 신뢰를 결혼의 최소 구성요소로 구축했다면 안전에 대한 욕구를 결혼 동기로 삼는 일은 온당할까. 지극히 명석한 이들에게 이 이유는 위험하다. 본인의 환경, 원 가족과의 갈등, 완전히 자립하지 않은 상태. 이런 엄청난 문제를 전격 개선하지 않고 결혼하는 건 도피라는 의견이다. 부정하지 않는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도피는 필수불가결할 수 있다. 어쩌면 새 시작이 될지도 모른다. 혼자 있게 해주는 사람, 혼자서도 잘 있는 사람을 배우자 최우선의 미덕이라 판단하는 이들에게는. 당황스럽겠지만 세상에는 유부녀라는 호칭이 늘 당황스러운 기혼 여성도 있다. 결혼이란 경험을 정체성의 대부분으로 확정 짓는 시선, 문제 풀이를 끝낸 학생으로 취급하는 세상이 여전히 낯선 것이다.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식으로 말하자면 나는 결혼이란 제도에 회의적인 기혼자다. B는 내 옆이 아닌 곳에서도 잘 살아갈 사람이다. 나는 우리 각자의 자유에 제한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B가 언제까지고 내 남편일지, 내가 언제까지고 B의 아내일지 알 수 없다. 태어나버린 존재는 어떤 조건에서도 기본적으로 고독하고 불안정하다. 정신연령이 연애 시절에 머물러 있는 걸까. 한 치도 성장하지 않았나. 단조로운 구획 탓은 없나. 기혼자는 질문을 받지 않거나 (아 결혼하셨군요. 다음 분-) 동일한 질문만을 받는다 (아이는? 벌이는? 양가와의 관계는?)

"사실 누가 진짜로 싫어서 헤어진 적은 없지 않아?"

"그렇지. 상황이 그렇게 된 것뿐이지."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하고 영원하길 바라지만 모든 관계는 변화한다. 계속 설렐 수 없다. 감각은 점차 단순해지고 이별은 미래를 떠나 이쪽으로 이동 중이다. 이 유한성을 상기할수록 상대는 귀중해진다. 서로에게 다정해질 수 있는 이유는 이 한계 때문이다. B가 이어 말한다.

"좋아해서 같이 이따 보니 같이 사는데, 결혼은 페미니즘 붐이 일어나기 전일 때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여성주의 운동에 일찍 진지하게 투신했다면, 그의 말대로 연애만 했을지 모른다. 주거 형태로 여성 공동체를 상상했을 것이다.

저기, 아줌마. 변명하지 마세요. 무슨 말도 붙이지 마세요. 이미 때는 늦었거든요. 결혼을 했으니 혹은 임신과 출산을 겪었으니 여성 운동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배제와 소거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싸움의 목적이 또 다른 여성들의 입을 닫게 하는 것일까. 상태란 확정일까. 비혼 여성들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네가 가부장제의 복무자라는 걸 인정하라는 말에, 정상가족만이 누리는 유무형의 혜택이 있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비판을 무시하고 나의 노선만이 옳다고 생각할 때 찾아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영웅 심리다. 페미니스트라는 선언보다 선언 이후의 날이 중요하다는 걸 깨우치면서 겪는 일상은 실제로 고통의 연속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얼마나 안이한지, 얼마나 모순적인지 알아가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그래도 돌아갈 수 없다. 나를 포함한 여성들의 명확한 처지를 몰랐던 때로, 모른 척하던 때로 발을 돌릴 수 없다.

 

- 그때 내가 깨달은 건 좋은 작업을 하는 사람은 자기 작품을 은밀히 사랑하고 신뢰하되 확신하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이들의 시가 좋은 건 자신의 통찰, 직관, 감각을 회의하고 애정 하는 인간이 시안팎으로 온전히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 모든 여자가 엄마가 되는 건 아니라고. 엄마가 된 사람도, 할머니도 얼마든지 담배를 태울 수 있다고. 이모, 고모, 사촌 언니, 선생님, 엄마 친구 중에 흡연 후 손을 씻고 이를 닦고 탈취제를 뿌리고 동네를 몇 바퀴 돌고 들어와 너를 안아 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고.

 

- 지뢰밭을 기어 30대로 들어선 여성들은 말을 끊고 보는 존재에, 그들이 내뿜는 공기에 몹시 민감하다. 쎄함에 대한 몸의 감각이 초능력 수준으로 진화한 것이다. 암묵적 갑을 관계를 십분 활용하는 인간, 구하지도 않은 조언을 늘어놓는 작자, 내용 없는 말을 장황하고 뜨겁게 이어갈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눈치 없는 이들을 너무 많이 접한 덕택이다.

 

-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유머 감각이란 방어 기제와 다를 바 없다. 둘은 함께 성장한다. 강력한 현실 조건에 대항하려면 나름의 완충 지대를 확보해 자극을 튕겨내야 하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들 개그의 뿌리는 다름 아닌 시니컬, 세상만사에 대한 냉소와 환멸, 악조건 속에서 다져진 코미디언 기질은, 본의 아닌 해학과 풍자와 골계미는 그래서 너무 웃기고 너무 슬프다.

 

- 예를 들면 소나기를 맞은 거예요. 갑자기 내리는 비를 맞은 게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 일은 선생님 탓이 아니라 그 개새끼들 잘못이에요. 깊은 위로는 낯선 사람에게 받기 쉬운 걸까. 친분 없는 관계가 이런 안식을 주나. 무료 상담전화를 통해 들은 이 짧은 말은 두고두고 따스했다. 트랙을 함께 돌던 사람들보다 더욱.

 

- 누군가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때 뭉클했고 그때의 내 마음은 집이 아닌 창고에 살았다. 내가 겪은 게 흔한 불행이면 안 되듯, 아이들이 이 범죄를 피한 게 행운이면 안 된다. 성장 중인 어린이가 보호를 받는 동시에 개별 주체로서 존엄을 지켜가는 일은 사회의 의무여야 한다. 그러니 아이가 친척 집, 문방구, 교회에 가기 싫어한다면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아이에게 안정과 안전 모두를 충분히 제공한 상태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접한다면 그와 아이를 철저히 격리시키고, 빠르고 엄정한 후속 조치에 들어가야 한다. 신호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예방에 최선을 기해야 한다. 지나친 인권, 과도한 윤리, 유난한 정의는 없다. 성인 여성이 아동을 따라 하고, 아동이 성인 여성 시늉을 내는 이곳에서 민감해지기를 단념하면 비참한 사고가 발생한다. 나이가 한자리인 아이에게 상대와 합의가 된 게 아니냐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 비판하고 싶은 건 개개인이 아니며 더더군다나 악마화한 개개인도 아니다. 문제는 그때도 지금도 그들이 그런 짓을 할 수 있게끔 방조하는 사회 토대이고 오랫동안 환기를 못 해 탁해진 여기 공기다. 그러니 죄 없는 아이가 몹쓸 짓을 당했다는 말은 틀렸다. 효녀, 모범생, 무고한 시민이 안타깝게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소리도 마찬가지다. 못된 딸도, 죄가 있는 아이도, 되먹지 못한 민간인도 그따위 범죄에 노출되면 안 된다. 도처에 비를 막을 넓고 튼튼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

 

- 30대의 특혜란 게 있다면 뭔가를 진지하게 아낄 줄 알고, 거기에 성의와 정성을 놓지 않는 사람이 예전보다 더 빛나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발견은 실제 시력과 관계없다. 미래와 야망이 흐릿하고 어디서나 색깔 없이 섞이기 일쑤여도 괜찮다. 심신을 정직하게 꾸리는 사람이라면, 가슴팍에 원석이 박힌 사람이라면 빛은 어떻게든 새 나오고 그건 해가 갈수록 잘 감지되기 때문이다.

 

- 왕따를 겪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는데 주동자는 당시의 절친이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그를 간지럽히기에 나도 껴서 손을 뻗었는데 종이 울릴 무렵 절친의 표정이 시멘트 반죽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아무도 쟤랑 말하지 마."

마지막까지 그 애 앞에서 웃고 있었다는 이유로 시작된 배제는 1년 가까이 진행되었다. 멕시코 드라마 <천사들의 합창>에서 마리아가 받았던 침묵의 벌이 내게도 내려진 것이다. 옆자리 친구에게 말을 걸면 내 뒤편 허공을 보고 미소 짓는다. 프린트물을 뒤로 건넬 때 나를 건너뛰고 전달한다. 짝이 필요한 수업에서는 1인 2역을 맡아야 한다. 어제까지 고무줄놀이를 같이 한 친구들의 모습은 변함이 없다. 그들의 일과에서 내 이미지가 블러 처리되고 목소리가 뮤트 된 것뿐이었다. 지금처럼 표독스러운 위협을 가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게 아닌데도 투명 인간 취급이란 낯설었다. 성인들에게 빨리 구조 요청을 하지 뭐하고 있었냐는 질문이 허망한 건 그 상황이 암막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행인이지, 이 단일하고 강렬한 공간에 함께 머무는 자들은 아니었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는 친구들과 동일한 곳이므로 사건 이후 내 영역이 닫히고 만 것이다. 그때 내 신체는 두리번거리는 하나의 한구 기관이었던 것처럼 여겨진다. 커다란 풍선 같은 눈이 친구들 사이를 부단히, 조급히 헤맨다. 소리 없이 터질 듯한 시신경이 어느새 졸아들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 운동화를 신으며 이렇게 되뇐다. 햇빛 속에서 허리와 등을 곧게 세우자고, 주름진 목을 돌리며 지금 풍경을 눈에 담자고, 그 힘으로 소중한 것을 더 소중히 대하고, 아끼는 것을 더 아끼자고.

 

- 쉽게 죽지 않는다고, 목숨이란 여간 끈질긴 게 아니라고들 한다. 그러나 본래 또 여전히, 인간의 의지와 육체는 믿기 어려울 만큼 약하디 약하다.

 

- 오래 울고 나서 진이 빠지면 맑고 심심한 된장국이 좋아. 염분도 채워지고.

 

- 스스로를 언제 맘껏 좋아할 수 있을까. 지금이다. 합리화하고 자빠졌네, 이런 자책 없이 언제 나를 힘껏 다독여줄 수 있을까. 지금이라고.

 

- 멀티태스킹이란 단어는 사실 끝없는 산만과 피로를 일컫는다. 신체의 모든 기관이 보호막 없는 촉수로 변하는 것이다.

 

- 여력이 없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 인간은 쉽게 찌그러진다. 인색과 냉기는 고즈넉한 고독, 충만한 개인성과 완연히 다르다. 이 시기의 처지 비관은 90퍼센트 과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도 내일이 오늘 같을 거란 예단의 힘은 강력했다. 스스로에게 관심도 성의도 없을 때 쓰는 눈가림용 푸념, 아무 전환 없는 일상, 고요한 참패. 나는 이 관성에 죽을 때까지 반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중계방송에서 본 마라토너 이봉주 선수를 떠올린다. TV를 켰을 때 그는 마침 케냐 선수를 제치기 시작했다. 이 선수 뒤로 점점의 사람들이 보인다. 스타디움이 얼마 안 남은 지점에서 모두 일종의 마비 상태로 뛰고 있다. 너덜너덜 풀린 다리, 간신히 달라붙어 있는 의식으로 아스팔트를 내딛고 내딛는다. 한국의 도로 한복판을 달리는 중국 선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타국에서 맨몸으로 낯선 땅을 박차는 지금을 그는 어떻게 기억할까. 누가 1위건 각자 외로워 보였다. 겨울 새벽 4시, 혼자 한강 오리 배에 앉아 있는 게 덜 으스스할 것 같았다. 인간은 대체 왜 달리까. 어쩌자고 저렇게 뛸까. 턱관절이 아렸다.

 

- 어릴 때는 엄마가 샤워를 왜 그렇게 오래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수구 물때와 체모를 치우던 어느 날, 엄마의 긴 목욕엔 욕실 청소 시간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중 화장실에서 중노년 여성들이 왜 문을 열고 일을 보는지, 그 짐작도 나중에 할 수 있었다.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연 채 용변을 본다는 건 습관에서만 가능할 텐데 그 습관이란 집안의 모든 상황을 눈여겨봐야 했던 조건에서, 기동력을 높일 상황에서 쌓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나를 놀래킨, 열린 문안의 여성은 대부분 어머니 아니었을까. 아이가 본인을 찾을까 봐, 이상한 걸 삼킬까 봐, 어디에 걸려 넘어질까 봐 늘 자신 밖을 봐야 하니까. 모든 곳에 관여하고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믿으니까. 쓸모가 부끄러움을 매번 밀쳐냈으니까.

"아유, 귀찮으니까 그렇지. 전기세 아깝게 불은 왜 켜. 다 보여. 환해."

컴컴한 화장실에서 문을 연 채 우두커니 앉아 있는 여자들은, 아이가 자라 곁을 떠나도 오래도록 그렇게 지낼 것이다.

 

- 나와는 노동강도를 비교할 수 없는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보험설계사, 교회 권사, 엄마, 아내, 며느리로 감수 분열하는 엄마는 흡사 기계장치의 신처럼 보인다. 일체의 여유와 잉여를 지우고 매일의 곤란 속에서 강철처럼 단단해진 엄마는 어떤 의미로 방황과 의심을 멈춘 채 일상에 휩싸여있다. 맡은 역할에 부단히 속고 있다. 누구도 아닌 나 때문에. 내가 태어난 이후로 퉁퉁 불어난 관계, 의무, 습관 때문에.

 

- 집에 놀러 간 날, 퇴근한 엄마의 짐을 받아든다. 마트에서 장을 한가득 봐왔다. 너무 허기졌는지 봉투 속 영수증 말단에 양갱이란 글자가 찍혀 있다. 길가에서 포장지를 깐 뒤, 뭉개진 단팥을 씹는 엄마의 그 표정은 내가 놓친 그의 무수히 쓸쓸한 순간 중 하나뿐일 것이다.

 

- 가난은 억만 개의 층으로 이뤄진 계단 같아서 먼 저편을 보면 까마득하지만 바로 위 칸과 아래 칸은 그저 촘촘해 보인다. 비교와 자족은 둔중하고 정교하게 이뤄진다. 그리고 이 계단은 오래전에 늘어나버린 아코디언이라 더 이상 아래가 위로, 위가 아래로 요동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물절없는 가난은 고장 나 딱딱해진 악기. 아무 음도 새 나오지 못한다.

 

- 어떤 불편은 감내하면서, 어떤 변수는 해결해가면서 매일을 디뎌갈 뿐 묘수나 요행은 없다. 가난에 관한 무리한 합리화도 불운 배틀도 암담하지만 가장 캄캄한 건 초연한 낯으로 모든 권리를 반납하는 것이다. 아무 요구도 없이, 착취를 착취라 부르지 않고, 공존은 입에도 안 올리는 지경에 다다르는 것이다.

 

- 형편에 맞춰 지내다 보면 제하고 제하고 또 제할 것만 남는다. 새로운 것, 안 해본 것, 궁금한 것들이 뒤로 쌓이면 어느 날 폭주 상태가 된다. 보리밥을 먹은 뒤 갑자기 마카롱을 사고, 노브랜드에서 나와 원목 캣타워를 결제해버린다. 암묵적으로 세워뒀던 가성비 제방이 무너지면 희열은 짧고 자책은 길었다.

 

- 요즘은 무조건 싼 걸 택했던 습관에 제동을 걸고 있다. 특히 얼굴이나 성기 같은 약한 피부에 직접 닿는 물품을 고를 때 무턱대고 최저가를 집지 않는다. 평소보다 약간 더 비싼 휴지를 구입해보니(물론 특가 세일 때였으나), 거기서는 흰 가루 먼지가 날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싼 휴지는 말려 있는 상태가 헐거운 데 비해 지금의 휴지는 틈 없이 잘 말려 있다(어쩐지 빨리 줄더라니). 긴축 재정에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골라왔으니 아낀 건 딱히 없는 셈이다. 업체의 염가품 제작 방식과 소비자 개인의 정신승리는 이렇게 꼭 맞는 짝패 관계였던 것이다.

 

- 종종 급식카드를 손에 쥐고 편의점에 들어간 어린이를 생각한다. 항상 사던 김밥 대신 젤리가 눈에 밟힐 때 아이는 고심할 것이다. 끼니를 해결하라고 지급되는 돈인데, 저걸 골라도 될까. 배가 고파도 젤리 맛이 궁금한데. 한참을 서성이다 늘 먹던 김밥으로 손을 뻗는 아이는 젤리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호기심, 성공일지 실패일지 걸어보는 작은 내기, 또래 문화, 알아갈 수 있던 자신의 취향과 기호, 안전이란 귀중하지만 작은 유희와 상실까지 지우는 안전의 기반은 부실한 것 아닐까. 김밥을 택한 아이 앞으로 너무 늦지 않게 쓸데없이 아름다운 것들이 찾아들면 좋겠다. 양배추가 말하는 동화, 고양이가 하늘을 나는 소설, 뭉게구름 같은 피아노 곡. 생활과 유리된, 다만 빛나고 덧없는 것들이 그에게 우연하게, 필연하게 가닿는 날이 있길 바란다.

 

- 종이 속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 내가 외로운 날에도 완전히 혼자는 아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대신 책을 친구 삼으면 이상한 사람이 되어 괴괴한 학창 시절을 보낼 확률이 높아지긴 하지만, 고독이 어쩌면 충만과 비슷한 뜻이란 걸 체감하게 되는 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다. 새로운 슬픔과 새로운 기쁨을 마주하는 순간은 사실 멋지기도 하다.

 

- 며칠 전 만난 고양이도 그랬다. 나는 그 앞에 앉아 있다가 별생각 없이 눈가에 눌어붙은 검은 눈곱을 떼어냈다. 갈고리 모양의 눈곱이 사라진 자리에는 순식간에 얕은 핏물이 고였다. 입을 벌린 채 고양이에게서 손을 뗐다. 햇살이 쏟아지는 길 한복판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같잖은 개입, 도중에 걷어버릴 관심, 답 없는 질문은 무심보다 질이 나쁜 것 아닐까. 지속성 없는 온정은 시혜 아닐까. 고민과 염려를 거친 어떤 종류의 무관심은 윤리의 최종 지점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정적인 편애란 각자도생과 얼마나 다른가. 책임이란 정확히 무엇이며 그 범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 왜 생명체의 양식엔 죽거나 죽어가는 단 두 가지 형식만 있을까. 왜 인간은 긴 동면에 들 수 없지? 냉동인간은 우주밖에 못 가나. 죽는 게 아니라 오래 쉬고 싶을 때 그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꺼지고 싶을 때, 보류하고 싶을 때, 부재하고 싶을 때 잠 외에 도피처란 없나. 충분히 쉬고 재부팅할 수 있다면 현재를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 등이 굽고 아가미가 벌어진 기형 숭어에 대한 뉴스를 보다 그날 한강을 생각한다. 버짐이 퍼진 붉고 검은 피부를, 튀어나온 한쪽 눈을 정면으로 보기 힘겹다. 생활하수 그리고 화장품과 향수를 만드는 머스크 케톤이라는 합성 화학품이 원인이라고 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한 집단의 포식으로 한 집단이 폐사하는 것이다. 이기, 해이, 독을 먹은 생물들의 모습이 사람의 거울 같기만 하다. 속도, 불안, 죄는 결코 존재의 먹이로 쓸 수 없다. 처음부터 먹이가 될 수도 없다.

 

- 전화위복이란 말, 달리 생각해보란 말, 견디면 괜찮아질 거란 말은 고맙고 든든하다. 그 다독임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호의와 선량에서 나온다. 하지만 어떤 시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언어도 매몰차고 부정확한 부산물로 느껴질지 모른다. 의식과 무의식을 온전히 번역하는 언어는 없으며 있어도 실패에 가까울 테니까. 그러니 우리에겐 넘치는 말 대신, 우두커니 입을 다무는 시간이 더 필요할 수 있다. 

 

- 우리는 인터넷과 SNS로 과도하게 연결된 것 같지만, 엄밀히는 고립된 상태예요. 각자의 실존 조건에서 각자의 문제를 홀로 떠안고 있는 형편이죠. 저는 그럼에도 여러 비상구를 통해 우리가 희미하게 그리고 또렷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 SF는 아니지만 제가 좋아하는 그림책 몇 권을 소개하고 싶은데요. 초신타의 <끼리꾸루>는 크고 외로운 공룡이 작고 자유로운 새와 친구가 되는 내용입니다. 존 버닝햄의 <우리 할아버지>는 병약하고 무력한 할아버지와 힘차게 자라나는 손녀의 연대감을 보여주죠. 리지아 보증가누니스의 <노랑가방>에는 이야기를 쓰려는 욕망이 강한 여자아이가 주인공으로 나와요. 제게는 이런 구도가 멋진 전복으로 느껴져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