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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살고 싶다는 농담 (허지웅 저 /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by hyeranKIM 2020.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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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는 농담

작가 허지웅이 악성림프종이라는 큰 시련을 겪은 뒤, 인생에 대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시각을 가지고 쓴 에세이다. 저마다 자신만의 무거운 천장을 어깨에 이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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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 가장 어둡고 깊었던 그 밤을 버티고 몇 개월이 지났다. 놀랍게도 아프기 전보다 훨씬 건강하다. 얼마 전 그런 생각을 했다. 가장 힘들었던 그날 밤을 버티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왜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옆에 있어달라고 말하지 못했나. 말했다면 그 밤이 그렇게까지 깊고 위태로웠을까. 나는 언제나 뭐든 혼자 힘으로 고아처럼 살아남아 버텼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누구에게도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멍청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 인간은 도무지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면, 삶으로 증명해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증명해낼 수 없다. 나는 행복이 뭔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매대 위에 보기 좋게 진열해놓은 근사한 사진과 말잔치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아마 행복이라는 건 삶을 통해 스스로에게 증명해나가는 어떤 것일 테다. 망했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을 오늘 밤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말해주고 싶다. 망하려면 아직 멀었다.

 

- 저는 '함께 버티어나가자'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삶이란 버티어내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 하루하루 지날수록 야심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동기가 되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결론에 집착하는 건 가장 피폐하고 곤궁하고 끔찍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가장 훌륭한 안식처다. 나도 거기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죽음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른 사소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동안, 나는 죽음 이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너무 애를 쓰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즐기면서 해야지 오래 할 수 있어요."

 

- 앞서도 말했지만 성실하지 않다는 건 내게 가장 큰 불명예다. 아무리 덜떨어져도 인사 잘하고 성실하면 중간은 간다. 정작 어릴 때 들었을 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가 삶을 통해 신뢰하게 된 명제다. 대개 인사성과 성실함은 관료적이고 수직적인 사회에서나 빛을 발하는 덕목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건 가장 끔찍한 오해들 가운데 하나다. 가진 것이 없을 때 저 두 가지는 가장 믿을 만한 칼과 방패가 된다. 타인을 가늠하는 데도, 나를 무장하는 데도 좋은 요령이다.

 

- 이기는 경험을 쌓으면 패배해도 주저앉아 비관하지 않고 다시 한번,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나이 든다는 것은 과거의 나에게 패배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과 같다.

 

-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내가 보았던 천장과 바닥을 감당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 어둡고 축축한 구석을 오랫동안 응시하며 정확히 뭐라고 호소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피해의식과 절망과 비탄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애꿎은 주변을 파괴하며 오직 비관과 자조만을 동행 삼아 이 모든 건 결코 바뀌지 않을 거라 믿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할 거라고 말이다. 여러분이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 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살기로 결정한다면, 천장과 바닥 사이의 삶을 감당하고 살아내기로 결정한다면, 더 이상 천장에 맺힌 피해의식과 바닥에 깔린 현실이 전과 같은 무게로 당신을 짓누르거나 얼굴을 짓이기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적어도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다. 그 밤은 여태껏 많은 사람들을 삼켜왔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한 사람을 그 밤은 결코 집어삼킬 수 없다. 이건 나와 여러분 사이의 약속이다. 그러니까, 살아라.

 

- 청년들의 고민을 듣다 보면 스무 해 전에 내가 했던 고민과 똑같아 놀랄 때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이별 문제가 특히 그렇다. 이들은 대개 자신이 한 특정한 행동 때문에 상대가 결별을 결정했다고 생각한다. 그 특정한 행동을 바꿀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와 같은 생각에 몰두한다. 그래서 집 앞에 찾아가기도 하고 새벽 두 시에 전화를 걸기도 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문제는 특정한 행동은 말 그대로 특정한 행동일 뿐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이며, 이것만 수정되면 상대가 이별을 철회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명의 상대를 떠나보내고 내가 떠나오기를 반복하며 삶을 살아내다 어느 순간 마침내 깨닫게 된다. 그것 때문에 헤어진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시간을 돌려 특정한 행동을 고치거나 아예 벌어지지 않게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라는 걸 말이다. 관계가 이어졌다가 끊어지기까지의 과정에서 명확한 건 오직 시작과 끝뿐이다. 나머지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실타래다. 거기서 선명한 원인 한 가지를 찾아내겠다고 애쓰는 건 이미 먹고 있던 국수 그릇에서 처음 삼킨 면과 마지막에 삼킨 면의 시작과 끝을 찾아 이어보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해보겠다는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저 또 다른 고통에 불과하다. 아니 어쩌면 삶의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한 집착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인과관계를 창조한다. 끊임없이 과거를 소환하고 반추해서 기어이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낸다. 내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철저하게 제거한다. 나는 언제까지나 피해자여야만 한다는 생각은 기이하다. 개인사에서도 그렇고 국제정치에서도 그렇다. 스스로를 변치 않는 피해자로 설정하고 그러므로 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피해자 정치의 근성은 이 시대의 가장 비뚤어진 풍경 가운데 하나다. 당장 이기기 좋은 전략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국 사람을 망친다. 사람의 능력으로 특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인을 고치거나 없앤다고 해서 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피할 수 없다.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결과를 감당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있는 힘껏 노력할 뿐이다.

 

-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 돌리는 방법에 관해선 알더라도 돌리고 싶지 않다.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대로 잘 껴안고 살아갈 생각을 해야지 그것을 인력으로 애써 돌이킨다고 해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걸, 이제는 삶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맙소사 그걸 이 나이 먹고서야 안다.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 붙이기 어렵다. 먼지가 들어가고 지문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확 떼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망치게 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먼지를 빼고 지문을 지우려다 아예 구겨지고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 운이 좋은 아이들은 액정보호필름을 새 걸로 다시 사주는 부모가 있다. 그런 부모가 없다고 화를 내거나 아파하지 말아라. 시간 낭비다. 그냥 먼지와 지문을 참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빨리 배우면 된다. 부모가 사준 두 번째 기회를 누리는 아이들은 그런 방법을 배울 굴곡이 없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나와 내 주변의 결점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태도는 반드시 삶에서 빛을 발한다. 그걸 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 제게는 해답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얼마 전 생각해낸 걸 같이 해봅시다. 내 삶을 대표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장면을 꼽아보세요. 남에게 보여줄 건 아니고 혼자 하시는 겁니다. 유물론자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죽음 이후에 뭔가가 더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이제 막 죽은 당신에게 일곱 가지 장면으로 삶을 요약해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고 해보자. 일종의 포트폴리오다. 유튜브 섬네일 이미지라고 생각해도 좋다. 대표 이미지를 일곱 개 고르는 거다. 내 인생은 그저 하찮고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서 일곱 개씩이나 되는 장면을 고를 수가 없다며 낙담하는 사람도 있고, 내 인생은 너무 화려하고 중요해서 고작 일곱 개의 장면으로는 요약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담하는 자도 화를 내는 자도 결국에는 똑같이 겸허한 마음으로 과제를 마치리라 생각한다. 적막한 삶도 소란스러운 삶도 마지막 일곱 번째 장면은 똑같이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떠오른다. 가장 고마웠던 순간이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가장 억울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내가 들은 가장 기쁜 말들과 가장 아픈 말들이 뒤를 따른다. 마지막까지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 얼굴과 이름들이 있다. 미련이 남지 않게 잘 눌러서 마저 지우고 고개를 들면, 그렇게 일곱 가지 장면을 모두 정한다.

 

-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정심과 바꿔야 할 것들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되기를.

Give us grace to accept with serenity the things that cannot be changed,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that should be changed,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the one from the other. - Karl Paul Reinhold Niebuhr

 

- 나는 가족이 혈연 이전에 사연으로 유지되는 운명 공동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 재물을 쌓아 올려 자식에게 고스란히 전수해내는, 혹은 재물 그 자체를 위한 인프라로써 기능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지리멸렬한 평생의 과정이 가족의 본령이 아니다. 내부의 갈등을 가족이라는 허명으로 덮어 일방적으로 무마하려 하지 않고 해체되었더라도 위기가 닥쳤을 때는 아무런 조건 없이 언제든 다시 찾아와 옆을 지켜주는 게 가족이다. 그게 반평생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삶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 마땅한 의리다. 의리 말이다. 아, 한국 사회에서 의리라는 단어는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저평가되어 있는가.

 

-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정권을 잡고 있는 자들이 역사 교과서를 바꾸려 하는 건 과거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다시 반복하자면,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며,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조화하는 데 성공하는 정권은 영원히 권력을 누릴 수 있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적정한 거리감이라는 게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열 보가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반보가 필요하다. 그보다 더하거나 덜하면 둘 사이를 잇고 있는 다리가 붕괴된다. 인간관계란 그 거리감을 셈하는 일이다. 이 거리감에 대해 생각하면 나는 늘 전자기력을 떠올린다. 세상에는 인력과 강력, 약력 그리고 전자기력 이렇게 네 가지 힘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내 손이 키보드를 그냥 통과하지 않고 누를 수 있는 건 전자기력 때문이다. 전자기력은 '나'를 '나'라는 형태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이를테면 고슴도치의 가시 길이나 <에반게리온>의 'AT 필드'처럼 내가 나라는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리인 것이다. 너무 외롭다고 해서 아예 걷어버리면 나라는 형태가 허물어진다. 반대로 타인이 너무 두려워 보호막으로 두텁게 에워싸면 속절없이 너무 멀어져 버린다. 요컨대 타인과의 거리라는 것은 바로 나의 보호막과 너의 보호막의 두께를 어림잡아 더하는 일이다. 삶에 있어 큰 사고라고 할 만한 최근의 일을 통과하면서, 나는 나의 가시와 보호막이 터무니없이 길고 두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길이와 두께는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오랫동안 비대해져왔다. 그래서는 애초 타인과의 정확한 거리를 셈하는 게 무의미하다. 어떻게 해도 서로의 말이 닿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나의 셈을 틀렸다.

 

-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혼자서 살아남기 위한 몸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의 내 상황에선 맞는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버틴다는 것이 혼자서 영영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당신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조금도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동지가 필요하다. 영화 <애드 아스트라>에서 배우 브래트 피트는 태양계 경계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절대적인 고독 앞에 혼자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다는 걸 깨닫고 지구로 귀환한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간단한 걸 우주 끝까지 가서야 알 수 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머리가 아닌 몸으로 무언가를 깨닫는 데는 늘 큰 비용이 든다. 무려 암에 걸리고서야 그걸 알았냐고. 그러게 말이다.

 

- 살아 있는 자가 죽음을 평가하는 건 거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의 내막에 관해 알 수 있는 건 죽은 사람뿐이다.

 

- 우리 모두가 나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나약한 부분을 동반자처럼 짊어지고 그것과 친구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내 인정하지 않고 고양한 위약을 내뿜는 사람도 있다.

 

- 우리는 본래의 타고난 부분에 순응해 살아가고, 가끔씩은 그것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놀라운 성취를 거두기도 한다. 한편 정말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본성이나 실수 앞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현실을 뒤틀어 재구성해버리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왜곡과 거짓, 고통과 외면의 기억 또한 잘 정돈된 예술의 토대 위에 쌓아 올리는 데 성공한다.

 

- 오늘도 나는 나와 다투고, 또다시 친구가 되기를 반복한다. 지치는 노릇이지만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될 일이다.

 

- 종교는 인간의 선의를 끌어냄으로써 공동체가 선순환하는 데 기여한다.

 

-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뜨겁게 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오래되었고, 실제 그렇게 살게 된 것은 1년 정도 되었다. 병상에서 여러 번 생각했다. 뜨거움은 삶은 소란스럽게 만들 뿐 정작 단 한 번도 채워주지 못했다. 그렇게 한 번 살아봤으니,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전혀 다르게 살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

 

- 나는 남을 평가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평가받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영혼을 파괴하느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공동의 선이나 대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판단했을 때 우리는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나아가 심지어 거짓말이 아니라고 인식한다.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거짓만이 오직 거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으로부터 악한 행동이 나올 수 있는가. 그렇다. '공동의 선이나 대의'라는 것은 어느 언덕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역사 속 각기 다른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가장 나쁜 일들과 애국 애족의 이름으로 촉발되었던 크고 작은 전쟁은 대개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네 이웃과 공동체를 해롭게 하라 가르치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의를 이해하되, 우리는 그 선의가 이끌 수도 있는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도 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말씀을 따르는 삶이란 그렇게 어렵다.

 

- 고린도전서 13장 1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 특히 12절의 이야기는 매번 가슴을 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뿌옇게 서리가 낀 것처럼 투명하지 않고 확고한 단 하나의 진실을 기대할 수 없는 삶이지만 언젠가는 모든 게 명확하게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내게는 천금과도 같은 약속이었다. 가장 힘들 때마다 저 말은 나를 구했다.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겪고 있는 크고 작은 다툼과 반복, 편 가르기가 애초 어떤 원리를 통해 작동하고 있었는지 상기하게 만든다. 도와야 할 사람들끼리 부지런히 편을 만들고 벽을 쌓아 올리며 서로를 고발하고 조롱하는 가운데 공동의 목적을 두고 형성되었던 공동체는 위기를 맞는다. 비관과 자조, 불신으로 인한 무관심이 역치에 이르게 될 즈음이면 관공서의 벽에 "세입자가 구청에 찾아와 떼를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와 같은 현수막이 붙어도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마침내 공동체가 붕괴된다. 해선 안 될 것들이, 해도 무방한 것이 되는 시대는 그렇게 도래한다. (용산사태)

 

- 국가 폭력은 서로 돕는 자들을 불신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공동체를 무너뜨린다.

 

- 지나간 시간 때문에, 육신의 아픔 때문에, 누구도 해소해 주지 않는 억울함 때문에, 피해의식에 짓눌려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축소되거나 과장되거나 아예 지워진 기억들. 그 기억들을 교차해서 공유하면서 이들은 객관적인 시점으로 사안을 재구성하는 기회를 갖는다. 나아가 서로를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말은 쉽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살아내가면서 경험했듯이, 서로 마주하고 아픈 걸 들추어 공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나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으로 객관화하여 이해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기억해내는 것. 그것이 공동체를 회복하는 시작이다. 용산 참사의 진실과 시비를 가리지 위한 첫 단추다.

 

- 자기 삶이 애틋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누구나 자신이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누군가에 관한 평가는 정확한 기준과 기록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평가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결정된다. 맞다. 정말 불공평하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두고 누군가는 자신을 향한 평가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킨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그걸 해낸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한다. 반면 누군가는 끝내 평가로부터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과 주변을 파괴한다.

 

-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가장 멋지고 빼어난 것들 덕분이 아니라 언제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된 선행들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다.

 

-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고 나와 어울리려 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방도가 없다. 내가 나를 구해야 한다.

 

- 진짜 문제는 그렇게 삶이 알려준 값비싼 교훈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바닥을 찍고 고비를 지나 안정을 되찾게 되면 우리는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머리로 알더라도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 입으로는 말할 수 있어도 정작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바닥에서 깨달았던 것들은 삶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그럼에도 그게 언제 그랬냐는 듯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거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들을 까먹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실수를 반복한다.

 

-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해왔다. 지금이 밑바닥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나는 대답했다. 더 이상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때가 밑바닥인 것 같습니다. 거기 이르고 나면 여기서 더 망해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으니 생존을 위해 어떤 노력이라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됩니다. 배고픈 건 주워 먹으면 되고, 기분 나쁜 건 내가 못났으니까 하고 넘기면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할 수 있고 또 뭐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영원회귀는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이다. 우리가 죽으면 똑같은 인생이 다시 반복된다는 이야기다. 시간 여행이 아니다. 평행 우주도 아니다. 완전히 토시 하나 바뀌지 않은 그대로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여러 번 읽고 이해한 뒤 토할 뻔했다. 우리가 과거의 인생을 반복하고 있고 그것을 다시 영원히 반복한다는 아이디어는 끔찍한 생각이다. 니체는 정확히 바로 그 공포에 맞서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운명론적 공포를 극복하고, 반복되더라도 좋을 만큼 모든 순간에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관없다고, 이토록 끔찍한 삶을 사랑하라 주문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바로 그 순간 네 삶의 고통과 즐거움 모두를 주인의 자세로 껴안고 긍정하라는 아모르파티와 결합한다.

 

- 천장과 싸워 이긴 자들, 그리고 바닥과 싸워 이겨본 자들만이 오직 천장과 바닥 사이에 펼쳐진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겸허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타인을 돕고 스스로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 정말 바꿀 수 없는 건 이미 벌어진 일들이다. 내가 한 말과 행동, 선택으로 인해 이미 벌어진 일들 말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마음이 묶여 신음하는 소리를 들어보라. 얼마나 참담한가. 벌어진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이라면 그토록 많은 시간 여행 이야기들은 결코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너무 늦게 인정하면 삶이 파국으로 빠지는 걸 막을 수 없다.

 

- 오스카 와일드는 3년 후 죽었다. 죽기 전 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삶이 뭔지 모를 때 글을 썼습니다. 이제는 그 의미를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쓸 게 없습니다. 삶은 글로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살아내는 것입니다. 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 고통마저 긍정하고 사랑하며 운명을 바꾸어나가는 삶이란 단 한 번의 각성이 아닌 끊임없는 다짐과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회복한 이후에 쓴 모든 글이 그랬다. 나와 같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기를 바라고 불행하거나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안 그래도 상처받을 일 투성이인 세상에 적어도 자초하는 부분은 없기를 바란다.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어른들의 사사로운 이익에 헐값으로 팔려 다니지 않기를 바란다. 확실히 말한다. 너 혼자서는 세상 못 바꾼다. 청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근사한 수사에 현혹되지 말아라. 마케팅이다. 하나의 의견이 공론화의 과정을 밟고 생각이 전혀 다른 집단 사이에 합의를 거치는 데에는 많은 노력이 따른다. 그마저도 합의안이라는 것이 누더기일 가능성이 크고, 누더기에 다른 누더기를 보태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기까지는 굉장한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까 그 가면을 버려서는 안 된다. 때와 장소에 알맞은 가면을 가려 쓸 줄 안다는 건 돈을 주고도 배우기 어려운 능력이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본연의 있는 그대로를 강박적으로 드러내서 오해와 구설수를 살 필요가 없다. 별난 사람 취급을 받을 이유도 없다.

가면을 쓰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가면 쓰고 살아가는 다른 이들이 부조리하고 부패해서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더 오래 버티기 위해 그러는 거다. 한국은 청년이 청년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공간이다. 지금만 그런 게 아니다. 원래 그랬다. 어제까지 청년이었던 사람들이 지킬 것이 생기면 돌변한다.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할 것들과 알아야 할 것들, 거쳐야 할 것들을 알려주는 대신 자신이 겪었던 가장 무의미한 형태의 부조리를 요즘 청년들은 피하고 싶어 한다고 타박한다.

한국만큼 청년의 치기 어림이 쉽게 공격당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만큼 청년의 시행착오가 용서받지 못하는 나라는 없다. 한국만큼 청년이라는 말이 염가로 거래되는 나라는 없다. 밥벌이를 하며 살아남아 세상을 바꿀 주체가 되려면 끝까지 버텨야 한다. 그러니까 가면을 써라.

다만 가면을 쓴 채로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다가는 미칠지도 모른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아도 좋은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런 친구는 많을 필요가 없다. 사실 많을 수도 없다. 간혹 인맥을 주식 투자하듯 관리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럴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반드시 후회한다. 내게는 가면을 벗고 있어도 좋은 친구들이 세 그룹 정도 있다. 서로 성격도 생각도 하는 일도 다른 사람들이다. 거기서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버티면서 언젠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 친구들과 모색하면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가면 안의 내가 탄탄하지 못하다면 가면을 쓰든 안 쓰든 아무 차이가 없다. 비빌 구석이 필요하다. 생각의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등대 노릇을 해줄 어른을 만나 지혜를 빼먹어라. 물론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어른을 갈망했다. 하지만 그런 어른을 식별할 밝은 눈이 없었는지 아니면 단지 운이 없었는지 평생에 인연이 없었다. 그럴 때는 이미 죽은 어른의 글에 기대도 좋다. 나는 그렇게 했다. 여의치 않으면 결코 닮고 싶지 않은 최악의 어른을 찾아내 그의 인생과 나의 선택들을 비교하며 늘 경계하는 것도 훌륭한 선택지다. 부디 청년들이 버거운 원칙이나 위악으로 스스로를 궁지에 몰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 도처에 불행이 있다. 불행은 발견되는 것이고 행복은 주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시달려보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극복해보려 발버둥 쳐보지 않은 사람도 없다. 그것을 극복하는 사람과 끝내 주저앉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무엇인지 규명해보고 싶지만 쉽지 않다. 불행의 양과 질을 계산할 수 없으며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능력 또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불행에 대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검증 가능한 공식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다. 상처를 과시할 필요도, 자기변명을 위한 핑곗거리로 삼을 이유도 없다. 다만 짊어질 뿐이다. 짊어지고 껴안고 공생하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할 뿐이다. 살아가는 내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자기혐오로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 물론 사랑으로도 살 수 있겠지만 그건 여건이 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세요, 사랑하세요, 같은 말을 떠벌이며 거만할 수 있는 건 대개 그런 이유에서다. 나는 별일 없이 잘 산다." - <버티는 삶에 관하여> 중에서

 

- 불행이란 설국열차 머리칸의 악당들이 아니라 열차 밖에 늘 내리고 있는 눈과 같은 것이다. 치명적이지만 언제나 함께할 수밖에 없다. 불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태도는 낙심이나 자조, 수동적인 비관과 다르다. 오히려 삶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주도하겠다는 의지다. 이는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 준다. 당장의 감정에 파묻혀 스스로를 영원한 피해자로 낙인찍는 대신 최소한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내가 가장 행복하다는 말보다 더 큰 오만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제일 불행하고 제일 아프다는 생각에 둘러싸여 웅크리고 있는 게 쉽고 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대개의 경우 주관적인 인상에 불과하다. 실제 벌어진 일과 다르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를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없다. 둘 다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당했는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생각하려면 객관화가 필요하다.

 

- 자기 객관화가 가능하도록 마음의 여유를 가능한 한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게는 그것이 상처는 상처고 인생은 인생이라는 선언이었다. 당신에게 그건 다른 종류의 선언일 수 있고 어떤 표정일 수 있으며 특정한 여가 활동일 수도 있다. 아니면 말 그대로 달아오른 마음이 식을 때까지 시간을 보내며 버티는 방식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만 통하는 객관화의 방법이, 사건과 나를 분리시켜주는 방아쇠가 반드시 있다. 여러분은 그걸 찾아야 한다.

 

- 과거는 변수일 뿐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저주 같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삶을 결정짓는 것도 아니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불행을 다스린다면, 그리고 그걸 가능한 오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얼마든지 불행을 동기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보다 단단하고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희망이 없다, 운이 없다,는 식의 말로 희망과 운을 하루하루 점치지 말라. 희망은 불행에 대한 반사작용과 같은 것이다. 불행이 있다면, 거기 반드시 희망도 함께 있다.

 

- 평가에 잠식되어서는 안 된다. 평가와 스스로를 분리시켜야 한다. 마음에 평정심을 회복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자.

 

- 피해의식과 결별하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결심하라는 것. 무엇보다 등 떠밀려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는 게 아닌 자기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고 당장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우리 삶에 균형과 평온을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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