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1인 가구 비율이 27%를 넘는다고 한다. 1인 가구는 원자와 같다. 물론 혼자 충분히 즐겁게 살 수 있다. 그러다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다른 원자와 결합해 분자가 될 수도 있다. 원자가 둘 결합한 분자도 있을 테고 셋, 넷 또는 열둘이 결합한 분자도 생길 수 있다. 단단한 결합도 느슨한 결합도 있을 것이다. 여자와 남자라는 원자 둘의 단단한 결합만이 가족의 기본이던 시대는 가고 있다. 앞으로 무수히 다양한 형태의 '분자 가족'이 태어날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가족의 분자식은 W2C4쯤 되려나. 여자 둘 고양이 넷. 지금의 분자 구조는 매우 안정적이다.
-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20년쯤 혼자 살다 보면 같이할 누군가가 있거나 없거나 스스로 잘 챙겨 먹는 방향으로 개체 안에서 진화가 일어난다. 징징거리며 어리광을 부려봤자 아무도 받아주는 이가 없다면 어른이 될밖에. 몸을 움직여 음식을 직접 만드는 쪽이든 밖에서 거리낌 없이 혼자 사 먹게 되는 쪽이든. 허기와 식욕을 추진력으로 도약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뛰어넘는 순간을 한번 경험해보면 혼밥은 어렵지 않고 즐길 만한 것이 된다.
- 나에게 그런 강렬한 혼밥의 첫 기억은 대학 4학년 가을이었다. 대기업 최종 면접을 보고 다시 학교 앞으로 돌아왔는데 그냥 배가 고프다기보다는 더 총체적으로 기운이 달리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다르게 대답하면 좋았을 것 같은 답변이며 긴장해 있었을 표정의 석연치 않음이, 한고비를 넘겨 스르륵 긴장이 풀리는 기분과 함께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면접 본 곳에 합격하지 못할 것 같다고 나는 이미 예감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뿐이 아닐, 앞으로도 지난하게 이런 문턱들을 지나야 하리라는 막연함 앞에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온몸과 마음의 기력을 끌어내서 버텨야 할 사회생활과 미리 압축해서 맞부딪친 경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예감대로 나는 그 대기업 면접에서 불합격했으나 대신 몇 가지를 얻었다. 몸과 마음에 기운이 필요할 때는 스스로를 잘 먹여야 한다는 깨달음, 혼자 당당하게 고깃집에 들어가 2인분을 구워 먹을 수 있는 경험치, 작은 실패를 삼키고 내려보내는 소화력 같은 것 말이다.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라는 교훈을 스스로 터득한 셈이다.
- 영화 <파리로 가는 길>에서 다이안 레인의 여행은 우연히 동행하게 된 프랑스 남자 때문에 계속 시간이 지체되고, 예정에 없던 딴짓이 끼어든다. 그는 풍경이 멋진 곳에서는 자리를 펼쳐 피크닉을 해야 하고, 운전을 더 못 하게 되더라도 맛있는 식사에 와인을 곁들이지 않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그런 프랑스 남자다. 느리고 비효율적인 경로는 속이 터지지만, 동행이 없었다면 결코 빠지지 않았을 샛길들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파리로 가는 길'이 가장 빠른 직선도로 최단 거리로 목표 지점에 도착하는 질주였다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돌아 돌아 에두르고 머무르며 쉬었다 가는 완행의 여정 사이로 자신의 의도와 계획에서 벗어난 사건들을 끌고 들어오는 누군가가 있기에 비로소 이야기가 되었다.
- 혼자 하는 모든 일은 기억이지만 같이 할 때는 추억이 된다는 이야기를. 감탄도 투덜거림도, 내적 독백으로 삼킬 만큼 삼켜본 뒤에는 입 밖에 내서 확인하고 싶어진다.
-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온도와 습도의 기후대와 문화를 품은 다른 나라 같아서,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외국을 여행하는 것처럼 흥미로운 경험을 준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행어에도 진실이 아주 없지 않지만, 내 생각에 타인만 한 토털 엔터테인먼트도 없다. 자기만의 세계관, 음악 취향, 관심사와 말솜씨, 표정과 몸짓, 신념과 상상력, 농담의 방식... 이런 요소들은 그 사람 고유의 분위기와 매력을 형성한다. 물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여행자의 예의를 품을 때, 내가 갖지 못한 아름다움을 목격할 수 있을 거다.
- 한 사람이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집 평수나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얼마나 잘나가는지, 얼마나 힘이 있는지가 아니라 친구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 누구는 또 얼마나 잘 얻어먹는지 얼마나 잠을 잘 자고 얼마나 노래를 잘하며 얼마나 약지 못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추억을 가졌는지 인생에서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 어떤 차이는 이해의 영역 밖에 존재한다. 나는 김하나를 통해 세상에 딸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대체로 잊어버리고 살다가 같이 장을 볼 때마다 새롭게 놀란다. 그리고 한 알 한 알 먹어 치우는 동안 의아하다가 조금 슬퍼진다. 어떻게 이런 게 맛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데 있어 꼭 같은 걸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고 해서 꼭 가까워지지 않듯,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곁에 두며 같이 살아갈 수 있다. 자신과 다르다 해서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평가 내리지 않는 건 공존의 첫 단계다.
- 서로 굳건하게 다르다고 생각했던 차이의 테두리는 함께 살면서 부딪쳐 깎여나가기도 하고 서로를 침범하여 약간은 형질 변화가 일어난다.
- 다른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같이 생활하는 일은 여러모로 가르침을 준다. 세상에는 나와 아주 다른 성향과 선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의식하지 못한 채 지내던 나의 성격과 특질의 도드라진 부분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가장 큰 배움은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도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 비슷한 점이 사람을 서로 끌어당긴다면, 다른 점은 둘 사이의 빈 곳을 채워준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한다면 과연 함께 살기 좋은 대상이었을까? 아마 가슴속 깊이 이해하면서 진절머리를 내고 도망쳤을 것 같다.
- 이렇게나 다른 나와 같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순간이, 내게 그렇듯이 김하나에게도 때때로 찾아오면 기쁘겠다. 과육이 단단하고 탱글 한 육보라든가 달콤하고 새콤한 향이 조화로운 죽향 같은 딸기 종류를 새로 알게 된다거나, 치킨을 같이 먹을 때 내가 좋아하는 다리, 김하나가 좋아하는 날개와 목을 서로 양보라는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나눠 먹는다거나, 그런 작은 여백이 채워지는 것처럼.
- 20대 때의 나, 그러니까 때가 되면 밥을 먹듯, 졸업하면 취직하듯 결혼도 그렇게 하는 거라 믿었던 예전의 나 같은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의 성격이 결혼 생활에 잘 맞는지 혹은 자신이 살고 싶은 방식이 정말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생활이 맞는지 고민해보지 않는다는 거다. 특히 주말마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갑갑해하며 자기가 원한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다고 울적해하는 남자들을 나는 여럿 보았다. 결혼과 가사 노동, 육아로 인해 개인 생활을 더 희생하고 있는 쪽은 당신보다는 당신 아내 쪽으로 보인다는 말은 차마 건네지 못했지만 말이다.
- 아버지는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하셨고, 가족들도 대개 교사나 회사원들인 우리 집안에서는 많지 않은 월급을 덜 쓰고 아끼며 절약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소심한 안정 지향형 인간들에게서 다행인 점은 발밑만 보며 잔걸음을 옮기는 식으로 살기에 누가 크게 돈을 벌어주겠다고 유혹해도 구덩이에 발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단계에 투신한다든가 어디 좋은 땅이 싸게 나왔다는 말에 솔깃해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황 씨 집안에서 들을 일은 로또 당첨 확률보다 낮다. 대신 잠재력만큼 리스크가 큰 베팅을 하는 과감한 재테크도 할 줄 모른다. 누구네가 망하는 일은 못 봤지만 크게 돈을 번 사람도 없는 집안에서 자라며 나에게 빚은 어딘가 떳떳하지 못한 것, 어서 벗어나야 할 불편한 상태를 의미했다. 그렇다. 나는 쫄보였다. 대학에 들어가 사업하는 집안의 친구를 만나보면서 이런 가풍의 차이는 더 확실해졌다. 친구는 부모님과도 영리하게 딜을 해서 방학 동안 사업을 돕는 대신 차를 받아쓰기도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더치페이 대신 크게 쏘고 잘 얻어먹기도 했다. 단순히 돈이 많다거나 씀씀이가 큰 것과는 다르게, 큰 거래를 성사시킬 줄 알고 자금의 유동성을 확보하는 배포가 있다고 할까.
- 뱀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뱀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물리지 않으려고 기를 쓰다가 길들이는 법을 터득하게 될지 모른다. 요약하면, 딱 1년 동안 대출의 절반을 상환했다. 빚이 싫고 빚진 상태가 싫어서 다른 데 돈을 쓰지 않고 열심히 모아 갚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인생 최대 쇼핑인 집을 사고 나니 딱히 갖고 싶은 게 없기도 했다. 가장 좋은 술친구가 집에 있고,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주방이 있으니 밖으로 술을 마시러 다닐 이유도 없어 집에서 놀면 되었다. 일에서 얻는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풀거나 여행 가서 자잘하게 예쁘고 쓸모없는 물건을 사들이거나 하는 즐거움보다, 몇백만 원씩 모아서 대출금을 줄여나가는 재미와 정신적 보상이 훨씬 컸다.
- 자신이 두려워하는 뭔가를 영원히 피해 다닐 수 없다면 제대로 부딪쳐볼 필요도 있다는 거다. 늘 머물던 안전지대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디뎌보면 세상에 생각해온 것만큼 큰 위험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어쩌면 겁쟁이일수록, 위험한 상황을 좀처럼 만들지 않는 자신의 본능적 감각을 믿어봐도 좋을지 모른다. 조금 대담해진 쫄보는 오늘도 라니스터에게서 배운다. 빚은, 지지 않는 게 아니라 잘 갚는 게 중요하다.
-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을 안 하고 있어서 좋은 점은, 세상이 말해주지 않는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다는 거다. 그게 뭐냐면, 결혼을 안 해도 별일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결혼 안 해봐서 아는데, 정말 큰일 나지 않는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생길 수 있을 별일 큰일을 곰곰 생각해봐도, 앞으로 점점 더 결혼할 확률이 낮아질 것 같다는 정도 외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나도 앞날에 대한 고민은 매일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걱정들이다. 100세 시대라는데 언제까지 회사 생활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을까? 앞으로 내 커리어의 어떤 점들을 더 계발하거나 보완해야 할까?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하며 꼬박꼬박 부어온 국민연금은 65세부터나 받을 수 있는데 그전에 은퇴하면 뭘 먹고 사나? 아니 국민연금 잔고 자체가 바닥나서 내가 납부한 돈을 떼어먹히는 건 아닐까? 큰 병이 들어서 너무 빨리 죽으면 어떻게 하지? 잔병치레를 하며 너무 오래 살면 또 어떻게 하지? 보험을 좀 더 들어놔야 하나? 하나씩 써놓고 보니 점점 더 걱정이 커진다. 하지만 내가 결혼한 상태라고 가정해봐도 이런 고민들이 사라지거나 딱히 줄어들 것 같진 않다. 결혼한 친구들과 대화해봐도 고민의 성격이 크게 다르기보다 육아나 자녀 교육, 부모님 부양에 대한 몇 가지가 더 보태지는 정도인 데다 때로는 이 고민들을 나누고 서로 덜어줘야 할 배우자와의 관계 자체가 더 큰 고민이기도 한 경우까지 본다.
- 지금은 홀가분해진 편이지만, 결혼하지 않은 채로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는 일에 대해 나도 언제나 편안했던 건 아니다. 30대 중후반에는 꽤 초조함도 느꼈던 것 같은데, 이런 불안은 내 상황이나 내면보다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비롯한 편이었다. 통상적인 '결혼 적령기'를 넘어가는 여자는 스스로가 평정심을 유지하며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어도, 잔잔한 물에다 괜히 돌 던지는 모양새로 주변에서들 툭툭 건드리지 못해 안달이다. 서른을 넘기면서 무슨 참견 면허증이라도 딴 것처럼 온갖 사람들이 깜빡이도 안 켜고 끼어 들어왔다. 처음 만난 취재원, 잘 모르는 동네 사람,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까지 결혼 여부나 계획에 대해 무슨 날씨나 남북 관계 문제라도 되는 양 아무렇지 않게 물어왔다. 아직이라고 답하면 여러 가지 반응이 돌아왔다.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이유를 묻는 탐정파, 무슨 내 결격 사유를 덮어주는 양 "앞으로는 좋은 일 있겠지..." 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덕담파, 혹은 멀쩡해 보이는데 너도 별 수 없다는 듯이 깎아내리는 공격파. 언뜻 걱정이나 관심 같아서 속아넘어가기 쉽지만 이런 말들은 공감도 배려도 없는 행동이다. 그 문제가 진짜 문제라면 당사자가 가장 고민하고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이 툭 건드리듯 지적한다고 당장 해결될 가능성도 없고, 무엇보다 남의 일인데 어째서 맡겨놓은 듯이 계획이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걸까?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은 어리고 만만하다는 이유로 종종 이런 주제넘은 참견의 대상이 된다.
-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내가 불안하고 초조했던 건 결혼을 못 해서라기보다 '결혼 못 한 너에게 문제가 있어' '이대로 결혼 안 하고 지내면 너에게 큰 문제가 생길 거야'라고 불안과 초조를 부추기고 겁을 줬던 사람들 때문이라는걸. 오지라퍼들이 아무리 깎아내린다 해도 나는 내가 하자가 있는 물건도, 까탈스럽고 분수를 모르는 사람도 아니라는 걸 안다. 다만 몇 번의 연애가 잘되지 않은 시간이 있었고, 일이 너무 바쁘거나 재미있어서 새로운 사람 만날 시간이 없던 시기가 있었고, 결혼을 하고 싶어서 열심히 소개팅을 나갔지만 번번이 상대와 가치관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맞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와 이제 결혼하지 않은 채로도 잘 살아가고 있음을. 나만이 아는 나의 길고 다채로운 역사 속에서 나는 남의 입으로 함부로 요약될 수 없는 사람이며, 미안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이상으로 행복하다. 그러니까 결혼 적령기를 넘긴 여성들이여, 혹시 '나에게 정말 문제가 있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문제인가?' 이런 의심이 들 때면 의심해보자. 고요한 가운데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지, 혹은 바람을 불어대는 존재가 지금 내 주변에 있지 않은지. 그 사람이 내 인생에 스쳐 지나는 존재라면 적절히 무시하면 되고, 혹시 가까운 이라면 불편함을 일방적으로 견디는 대신 진지하게 정색해서 상관하지 말아달라는 당부를 해보자. 원만한 사회생활보다 내 자존감이, 어떤 타인과의 인간관계보다 나 자신과의 관계가 중요하니까. 무엇보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딘가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증거는 세상에 많은 결혼한 (그리고 무례한) 사람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 잘 산다는 건 곧잘 싸우는 것이다. 타인과의 입장 차이와 갈등이 삶에서 빠질 수 없는 구성 요소인 이상 그렇다. 꽤 오랫동안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싸움에 대해서도 오해한 채 살아왔다. 스스로 누구와도 잘 안 싸우는 사람인 줄 알았고, 또 살면서 되도록 싸울 일이 없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큰 소리를 내며 다투는 사람들을 보면 뭐가 그렇게나 열을 올릴 일인가 싶기도 했다. 애인이나 친한 친구와 크게 다툴 만한 상황이 오면 언성을 높이는 대신 냉랭한 분위기 속에 좀 일찍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게 내 방식이었다. 혼자가 되었을 때 그 마음을 곱씹으며 삭이거나 다른 일로 주의를 돌리면 평정이 돌아오곤 했다. 잊어버리고 다시 잘 지내면 다행이지만,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어 선을 넘는다 싶으면 그 사람을 서서히 안 보는 쪽으로 정리했다. 서운함이나 불만을 드러내고 표현해서 상대와 부딪치는 대신 마음속에 기대와 실망, 평가의 대차대조표를 기록하고 있었던 셈이다.
- 우리는 여러 번 싸웠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느라 "우리 여태 뭐 때문에 싸웠더라?" 물어봤다가 한 번 더 싸울 뻔했다. 내 물건이 너무 많아서 싸우고, 많은데 버리지 않겠다고 해서 싸웠다. 내가 널어둔 빨래를 너무 오래 안 개켜서 싸웠으며, 다음 날같이 여행을 떠나기로 해놓고 전날 친구와 약속을 잡고 늦게 들어가서 싸웠다. 같이 살겠다고 해놓고 보니 우리는 모든 게 달랐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물건의 양과 너에게 적절한 물건의 양이, 집 안이 덜 정돈되었을 때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여행 가기 전날 집 정리에 투입하는 노력의 강도가 같이 않았다. 그 세세한 차이 하나하나가 다툼의 거리가 되지 시작하자 내가 서 있는 여기와 네가 서 있는 저기 사이에 굴러떨어져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게다가 우리는 싸우는 방식 때문에 더 싸웠다. 나는 모로 피해 얼음벽을 치는 사람이고, 김하나는 정면으로 불화살을 쏘아대는 사람이다. 태풍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 내 방으로 대피해 숨어 있으면 김하나는 문을 벌컥 열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도 잠이 와?" 사실 졸린 참이었다. 이럴 때 한숨 자고 일어나면 좀 나아지는데...
- 여전히 말과 행동으로 실수를 한다. 서로 습관과 규율이 다르게 때문에 부딪친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훅 넘어가서 침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툼의 빈도가 조금씩 뜸해지긴 한다. 싸우는 상황에서 나의 가장 큰 실수를 잘잘못을 따지는 일로 받아들이고, 내 행동에 대한 해명을 하기 바빴다는 거다. 내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는지 나의 논리를 이해시키려고 해보지만 상대방에게는 변명일 뿐이다. 화가 나고 서운한 마음을 살피고 위로해 주는 게 먼저 가 되었어야 한다. 싸울 때조차 나의 좀 심은 나에게만 있었던 거다. 내가 이제야 배운 싸움의 기술은 이런 것이다. 진심을 담아 빠르게 사과하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 입으로 확인해서 정확하게 말하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려 어떨지 언급하고 공감하기. 누군가와 같이 살아보는 경험을 거치고서야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부부 싸움뿐 아니라 같이 사는 친구끼리의 싸움도 꼭 칼로 물 베기 같다. 우리는 언제 싸웠나 싶게 다시 사이좋게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칼로 물을 베는 그 몸짓으로 해소되는 부분이 있다. 이 싸움의 목적이 뭔지 생각해본다. 나의 가장 잘 드는 무기를 찾아 쥐고 한 번에 숨통이 끊어지게 적의 급소에 꽂는 것인가?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흠씬 두들겨 패서 밟아버리는 것인가? 함께 사는 사람, 같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과의 싸움은 잊어버리기 위한 싸움이다. 삽을 들고 감정의 물길을 판 다음 잘 흘려보내기 위한 싸움이다. 제자리로 잘 돌아오기 위한 싸움이다. 사람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지만 자신의 세계에 누군가를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은, 서로의 감정과 안녕을 살피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계속해서 싸우고, 곧 화해하고 다시 싸운다. 반복해서 용서했다가 또 실망하지만 여전히 큰 기대를 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로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지는 교전 상태가, 전혀 싸우지 않을 때의 허약한 평화보다 훨씬 건강함을 나는 안다.
- 언젠가 부부 상담 TV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어떤 문제로 싸우느냐는 질문에 아내가 "정말 사소한 걸로 싸워요. 양말을 왜 동그랗게 말아서 벗어놨냐 같은 걸로도 싸운다니까요"라고 답하자 상담해 주는 분이 찰진 경상도 억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부부 사이에는요, 사소한 기 하~나도 읎슴니더. 쌓이고 쌓였든기 양말 하나로 터지는 거거든요. 컵에 물이 찰랑찰랑할 때 딱 한 방울 더해지면 늠치잖아요. 그거랑 똑같습니다." 가장 사적인 공간을 공유하는 동거인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사한 날로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내 컵에 물이 점점 차올랐고, 그게 넘칠락 말락 하는 와중에 테팔 전기주전자 실랑이가 마지막 한 방울을 더한 거였다. 갑자기 쌓여왔던 짜증이 폭발했다. 나 혼자 이 난장판에서 하루 종일 고군분투하는데, 고작 0.7리터 차이를 포기 못 해?! 그렇게 아무것도 못 버리니까 집이 지금 이 모양인 거잖아! 요 며칠이 아니라 예전에 내가 황선우의 상수동 집을 치우고 고치고 정리해 준 기억까지 다 소급되어 몰려왔다. 나는 그때는 그저 도울 수 있다는 기쁜 마음에 자발적으로 했던 거지만 마음이 지치자 그 모든 것이 짜증과 분노로 돌아왔다. 사람이 너무 애쓰면 안 되는 법이다.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지만 저 깊은 곳에선 상대와 나에게 제 손으로 짐을 지우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 "둘만 같이 살아도 단체 생활이다." 동거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서로 라이프 스타일이 맞느냐 안 맞느냐보다, 공동생활을 위해 노력할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을 것 같다. 그래야 갈등이 생겨도 봉합할 수 있다.
- 함께 산 지 2년쯤 지난 지금 우리는 거의 싸우지 않는다. 그동안 서로가 서서히 내려놓은 것은 상대를 컨트롤하려는 마음이다. 대신 둘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집의 모습과 상태, 또 각자가 확보하길 원하는 독립적인 시공간을 정확히 얘기하고 그것을 함께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상대를 바꾸려 드는 것은 싸움을 만들 뿐이고, 애초에 그러기란 가능하지도 않다. 둘이 함께 같은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게 바로 단체 생활에 필요한 팀 스피릿이다. 동거인과 함께 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정리에 대한 압박이 꽤나 줄었고, 집이 좀 단정치 못해도 마음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 집 안 곳곳에 군락지를 이루는 물건들의 생태계도 그저 흥미롭게 지켜보곤 한다. 반면 동거인은 물건을 들이는 습관에 대해 재고해보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 집은 어느 정도 조수 간만의 평형 상태를 찾았다고 하겠다.
- 잘 모르는, 멀리에 있는, 애정이 없는 대상일수록 일반화하기 쉽다. 뭉뚱그리고 퉁쳐도 상관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존재에 있어서는 아주 작은 차이가 특별함을 만든다. 그 개별성이 소중하고 의미 있다.
-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라는 옛말처럼 대가족이 되자 기쁜 일도 많아지고 슬픈 일도 많아진다. 한데 또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라는 말도 맞는 것 같다. 대가족이 되면서 일이란 생기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것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거기서 오는 안정감이야말로 가족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닐까.
- 혼자의 식탁은 효율성과 편의를 우선으로 꾸려진다. 삶은 달걀 한두 개에 사과나 고구마 같은 걸로 때우기도 하고 햇반을 데워 레토르트 카레와 해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비롭게도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더 부지런할 수 있는 존재다. 누군가와 함께 먹을 식사를 차린다면, 무슨 힘에선지 국이라도 하나 끓이고 더운 찬 이라도 한 가지 볶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이 살면서 집에서 식사를 준비해서 먹는 횟수는 엄청나게 늘었다. 동거인이 설거지와 뒷정리를 맡기 때문에 음식 먹고 치우는 일의 수고가 가뿐해지기도 했다.
- 엄마에게 음식이란 단지 가족을 위한 희생만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즐거움이고, 부엌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고도의 경영이자, 무뚝뚝한 자식과 대화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음식을 싸주고 먹이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엄마의 세계도 함께 넓어져왔다. 그리고 이제 그 세계에는 나의 동거인도 포함된다.
- '잘 얻어먹는 법'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알려드릴까 한다. 단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무조건 맛있게 먹는다.' 맛이 없어도 꾹꾹 참고 먹으란 말이 아니다. 누군가 음식을 해주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보면 맛있게 먹을 수밖에 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데 밥을 얻어먹는 사람은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감별하는 사람이 아니다. 비평할 자격이 주어지는 건 음식에 돈을 지불할 때밖에 없다. 그 경우에만 음식에 비해 가격이 적정한지 말할 자격이 생긴다. 음식을 만들어주는 것은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한 고귀한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시간과 수고를 들여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익히고 그릇에 담아서 내어준다. 그 음식은 내 몸속에 들어와 피와 살을 만들고 나를 살아 있게 한다. 세상에 이것보다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고마운 마음을 갖고 먹는 음식은 맛있다. 단순한 진리다. 또 하나의 단순한 진리가 있다. 얻어먹었으면 고맙다고 말하고 뒷정리와 설거지를 하라. 이 또한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하고 싶어질 일이다.
- 나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행복은 빠다야!'를 듣고 한순간에 기분이 좋아져 버렸고, 역시 동거인은 단순하고 튼튼하고 밝은 사람이 최고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동거인의 동거인은 나니까, 나부터 단순하고 튼튼하고 밝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빠다처럼 나를 확실히 행복하게 하는 게 뭔지를 평소에 알아두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 이처럼 여러분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대해 잘 생각해볼 일이다. 그런 것을 발견했다면 '행복은, ㅇㅇ야!
라고 한번 외쳐보길 바란다. 그걸 알아두면, 힘든 상황에서도 비교적 더 빨리 회복할 수 있을 테니까.
- 요즈음 잡지 업계 후배들은 어시스턴트나 아르바이트로 일하며 실무를 바로 접하고, 외국어나 SNS 능력도 요구받는다. 게다가 일단 회사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고 나서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천천히 배우고 실수하며 성장할 시간을 얻는 대신 우선 일에 던져져서 스스로를 증명하는 시간을 한참 견뎌야 견고한 벽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생활이 곧 시험이자 매 순간을 평가받는 이런 살벌한 환경 속에서도 내가 같은 분야에서 일할 기회를 얻고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영 자신이 없다. 해외 어학연수나 공모전, 무슨 자격증같이 이력서에 쓸 스펙도 별로 없고 자기소개서에 적을만큼 뚜렷한 경험도 없고 고지식하기만 하던 당시의 내가 요즘의 취업 준비생이라면 잡지 에디터라는 직업을 아예 시작조차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적성에 잘 맞는 일을 찾아 재미있게 20년 가까이 일할 수 있었던 건 세대로나 개인으로나 확실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 결혼한 친구가 시댁에 명절을 지내러 가서는 "어른이 되어 남의 집에 입양된 기분이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너무 오랜만에 회사를 옮겼더니 딱 그런 기분이 들었다. 고향을 떠나 외국어를 사용하며 낯선 사람들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려 애쓰는 이방인의 기분이 몇 달 이어졌다.
-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라는 말이 성립하는 건 당연하게도 그게 내 일이 아니라서다. 거리를 두어야 눈에 들어오는 형체가 있고, 너무 뜨거울 때는 삼키지 못하는 덩어리들이 있으니까. 남의 연애에는 서두르지 말라든다 미련을 버리라든가 잘도 충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막상 모두 사랑의 달인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컨설턴트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일이지만 그만두어야 할 시점을 고민할 때, 면접을 보고 와서 새로운 가능성을 그려볼 때, 울렁거리며 중요한 발표를 연습할 때, 우리 집에 같이 사는 내 컨설턴트는 같이 모색하고 명쾌하게 길을 알려준다. 흥분을 잘 하는 성격답게 가끔은 저 멀리 혼자 달려 나가기도 하지만 나도 고집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따르지 않을 때가 많다. 사실 가장 든든한 건 이 컨설턴트가 그 어떤 경우에도 보여주는 나에 대한 믿음이다. 내가 충분히 능력이 있고, 성실한 품성을 지녔고, 전력을 다해 스스로를 발전시키려 한다는 그런 믿음은 아주 가끔 내 자존감이 쪼그라들 때조차도 티 없이 단단해서, 계속해나갈 힘을 준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나 역시 동거인에 대해 그런 신뢰를 갖고 있다.
- 나: 이게 무슨 소리지?
동거인: 무슨 소리가 나?
나: 지직지직 하는 소리 말이야. 이 소리, 되게 크게 들리는데?
동거인: 그래? 난 전혀 안 들리는데.
소리의 진원지는 주파수가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채 켜져 있는 라디오였다. 라디오를 끄자 황선우가 말하길, 건강검진을 했을 때 나는 청력이 100이 나오고 자신은 80이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때 크게 깨달았다. 우리는 은연중에 모두가 세상을 객관적으로 지각한다고 가정한다. 거기서 느끼는 감정은 주관적이고 다르더라도 감각 자체는 같을 거라고. 그러나 아니다. 세상 자체가 저마다 다르다. 나는 시력이 아주 좋은 편이다. 황선우는 마이너스 5.5디옵터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1미터 떨어진 내 얼굴이 흐릿해 보인다. 렌즈를 껴도 시력이 나보다 낮다. 나는 항상 거울에 튄 물가죽이나 테이블 위의 얼룩 같은 걸 보며 '왜 이걸 보고도 닦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안 보이는 거였다. 내겐 그게 너무도 또렷하게 보이고 말이다.
- 누군가와 함께 살면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나와 상대의 다른 점이 더 또렷하게, 자주 콘트라스트를 이루므로. 그 다른 점을 흥미롭게 여기고 나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겠다. 나에 대해 깨닫고 나자 오히려 동거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 넓어졌다. 우리가 세상을 똑같이 지각하는 게 아님을, 애초에 당신과 나의 세상이 다름을 알게 되었으므로.
- 나는 간병인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동거인이 나의 주보호자로서 베풀어준 가장 큰 부분을 잊지 못할 것이다. 플라스틱 공 하나 띄우려 애쓰고 있는 내가 사실은 하프 마라톤을 몇 번이나 완주한 사람이라는걸, 진통제에 멍해져 있지 않을 때는 재미있는 농담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걸, 방귀 뀌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인 지금의 내가 전부는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그 사실은 겨우 3박 4일이지만 가장 무력하고 약해졌을 때 내가 사라지지 않게, 또 최선을 다해 나로 돌아갈 수 있게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 "사람은 멀리서 보면 멋있기 쉽고, 가까이에서 보면 우습기 쉽다." 충분한 거리를 둘 수 없기 때문에 서로 한심하고 웃기는 순간도 목격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동거인은 여전히 멋있는 사람이다. 눈속임이 불가능할 만큼 가까이에서 삶에 대한 근면함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내가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나 생활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낱낱이 동거인에게 목격될 거라는 자각은, 너무 방만하게만 살지 않도록 나를 다잡아준다. 그 증거로 오늘 글 한편은 쓸 거라고 큰소리를 치다가 미루고 미룬 밤에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편 건 동거인에게 너무 한심하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긴장의 발로였다.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테이블 건너편 자리에서는 동거인이 역시나 잠옷을 입은 채 연재하는 수필을 위한 삽화를 그리느라 애쓰고 있다. 비염이 심해져서 콧물을 막기 위해, 한쪽 콧구멍에 티슈를 길게 말아 꽂은 채로 말이다. 오늘도 내 동거인은 아주 우습고 또 존경스러운, 딱 그만큼의 거리에 있다.
- 살면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긴장, 걱정을 해소시켜주는 건 대단한 뭔가가 아니라 사소한 장난, 시시콜콜한 농담,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 누군가와 같이 살게 되면서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타인이 강력한 주의 환기 요인이라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골똘해지거나 불안에 잠식당할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든다. 과일 깎아 먹으며 나누는 몇 마디 얘기로도 어떤 울적함이나 불안은 나도 모르게 털어버릴 수 있고, 함께 살면 그 현상이 수시로 일어나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힐 겨를이 없어지기도 한다.
- "좋을 때는 아주 좋습니다." 결혼 생활에 대한 하루키의 말처럼, 우리도 좋을 때는 정말 좋다. 별것 아닌 농담에 웃고, 서로의 취향을 넓히는 음악을 번갈아 틀어놓은 채 바보 같은 춤도 같이 추고, 기운 빠지는 하루의 끝에 나를 다독여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확인해 주는 누군가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사람의 인생에 그런 행운이 여러 번 찾아오기도 할까? 아니 누구를 만나더라도 다시 이렇게 서로에게 맞추고 싸우고 짐을 합치고 버리고 못 버려서 싸우고... 조율하며 살아나갈 일을 생각해보면 역시 엄두가 안 난다.
- 우리 집 여섯 식구는 외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망원동에서 엮어가는 호의적이고 느슨한 연결망 속에 W2C4라는 하나의 모듈로서 있다. 핏줄이라는 이유로만으로 가끔 얼굴을 보는 친척들보다 더 친근하고 반갑다. 그리고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끌어주고 챙기는 것보다 더 담백하고 따뜻하다.
- 이처럼 서류에서 분류되지 않는 관계가 분명 현실에 존재한다. 만일 내가 지금 어딘가 갑자기 아프거나 수술을 받아야 한다면 부산에 사는 연로한 어머니를 불러오기보다는 바로 곁의 동거인에게 보호자 역할을 맡길 것이며 나 역시 간병인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 병원에서 서류를 작성할 때 그냥 '친구'보다 서로 더 책임과 의무를 지는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생겨난다면 우리와 친구의 경우를 다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생활 동반자' 같은 건 어떨까.
- 생활 동반자 법이 기존의 가족 관계를 부정하거나 흔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진선미 의원은 이렇게 답했다. "기존 가족 관계를 위협하는 건 특정한 제도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서로 돌보며 살 수 없도록 하는 팍팍한 현실입니다. 생활 동반자 법은 사람들이 서로 돌보고 가족을 이루어 살도록 장려하는 가족 장려 법안입니다."
- 1인 가구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앞으로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사는 모습은 법이나 제도, 관념보다 빠르게 변한다. 직장 한 군데를 정년까지 다니며 하나의 직업을 평생 고수하던 고용과 노동의 패러다임이 허물어진 것처럼, 아마 혼인이나 혈연으로 연결된 전통적인 가족의 형식에 들어맞지 않는 가구의 모습들도 늘어날 거다. 게다가 기대 수명은 100세를 내다볼 정도로 점점 길어진다. 결혼을 하지 않고 함께 사는 커플뿐 아니라 결혼했다가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된 중년, 노인의 경우도 많아질 테고 나와 동거인처럼 동성 친구끼리 의지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복지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좀 더 느슨한 형태로 모여 사는 파트너, 마음 맞는 누군가와 같이 생활하는 경우도 서로 보호자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포용하는 쪽이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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