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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책의 말들 (김겨울 저 / 출판사 유유)

by hyeranKIM 2021.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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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1년에 출간된 <아침놀>의 서문에서 이미 모든 노동을 빠르게 해치워 버리려는 '속전속결의 시대'를 비판하고 천천히 읽기를 주장한 것을 보면 놀랍다. 두 가지에서 놀라운데, 19세기 후반에 이미 현대인의 사고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정립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140여 년이 흐르도록 이러한 사태가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약화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책 읽기는 느린 행위다. 책 읽기는 우리에게 멈춰 서도록 요구한다. 눈과 귀로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허겁지겁 처리하는 대신 천천히 생각하도록 요청한다. 어떤 책에는 저자가 과속방지턱을 많이 설치해 두는데, 그러한 과속방지턱은 몇 날 며칠에 걸친 고민으로 완성된다. 어떤 책에서는 저자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서서히 미끄러지도록 도로를 설계하는데 이러한 도로 역시 몇 날 며칠에 걸친 고민으로 닦아진다. 성실한 독자는 그 과속방지턱을 갈라 보고 잘 닦아진 도로를 문질러 본다. 독서란 곧 경청이며, 경청이란 곧 집중하고 반응하고 되묻는 일이다.

그러므로 책 읽기란 얼마나 비효율적인 행위인가. 어떤 이들은 문학을 읽지 않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허구의 세계가 쓸모없다 믿고, 당장 써먹을 만한 지식을 알려 주는 책만이 가치 있다 여긴다. 그러나 비효율이 곧 우리가 삶을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더 나아가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힘임을 경청하는 이들은 안다. 이 힘이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한탄할 것은 없지만. 슬프지만 어쨌든 우리 모두 바쁘지 않은가.

 

- 읽을 책을 고르는 일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고르는 일과 비슷하다. 나는 <음악 혐오>를 읽을 때는 혼란에 빠진 예술가가 되었다가, <사람, 장소, 환대>를 읽을 때는 책임 있는 시민이 되었다가,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을 읽을 때는 성실한 작가 지망생이 되었다가, <유령해마>를 읽을 때는 인공지능이, <감옥의 몽상>을 읽을 때는 수감자가, <웃는 경관>을 읽을 때는 경찰이 된다. 나는 그 모두가 되었다가 그중 아무도 아닌 사람으로 돌아온다.

책에서 책으로, 또 책에서 책으로 통과하는 날에는 내가 책이 되어 사는 것만 같다. 전원이 들어오면 정신이 켜지고 전원이 꺼지면 정신도 꺼져서 띄엄띄엄 존재하지만 그걸 자각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처럼 나는 사는 것만 같다. 책을 건너 다음 책으로, 그 책에서 또 다음 책으로 건너가면서. 나를 지키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책에 의존하면서. 그래서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책을 읽어야만 했던 시기나 영화를 봐야만 했던 시기는 슬픔과 절망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 했던 시기와 같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정신을 입고 벗는다. 그나마 입을 정신이 있는 게 어디냐고 자위하기도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정신을 갈아입는 일이 내 맨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 소셜미디어(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와 콘텐츠 서비스(유튜브,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티빙)와 온라인 커머스(쿠팡, 네이버 쇼핑) 사이를 종횡무진하다가 핸드폰의 검은 화면에서 문득 발견하는 것은 피로한 인간의 얼굴이다. 온갖 말들, 이걸 사야 한다는 종용과, 이것이 삶을 윤택하게 해 주리라는 보장, 누군가의 기행, 말다툼, 자랑, 무수한 음해, 따라갈 만하면 생겨나는 유행이 거침없이 눈을 스치고 지나간다. 화면을 끄면 반짝이는 검은 화면은 얼굴을 조각내어 이리저리 비춘다. 나는 시끄러운 도떼기시장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이 된다.

소란스러운 소식도 핸드폰을 던지면 그만이다. 침대에 엎어 놓는다. 베개 밑에 넣어 둔다. 그렇게 시끄러운 세상이 단숨에 고요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집은 조용하고, 아무도 소리치고 있지 않다. 거대 기업들은 사람들의 시간만을 놓고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소화 가능한 수준의 소음을 놓고도 땅따먹기를 하고 있다. 어떤 말들은 귀하고, 어떤 말들은 시끄러운데, 검은 화면 속에서 그 말들은 모두 섞여있다.

 

- 책이 뭐든 다 해 줄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안다. 숨도 못 쉬고 책만 읽던 때에도 책을 읽다 말고 집어던진 날들이 있었다. 자다 말고 땀을 흘리며 깨어나고 조용한 새벽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별 달빛 같지도 않은 희끄무레한 빛을 바라보면서 절망의 형태는 참 다양도 하구나 생각하고 그렇게 뜬눈으로 해를 맞이하면 다시 세상이 쿵쾅쿵쾅 다가왔다. 도망가지도 못할 세상이 내 손목을 붙잡고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럴 땐 이게 다 뭐람, 책도 절도 없이 나는 헤매는구나, 엉엉 울었다. 세상은 지치지도 않고 다가왔다.

정말로 세상은 지치지도 않고 다가왔다. 제발 그만 오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소원이 실현된 적은 없다. 나는 손목을 붙잡힌 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무릎이 까지고 발목이 꺾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나의 증인이 되어 줄 사람들은 모두 자기 몫의 울음을 울러 갔다. 내 마음의 발은 아치가 모두 무너졌다. 책은 내가 간신히 얻은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안정, 삶, 집 같은 단어이다.

 

- 멍청한 짓을 저지른 후 그걸 수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쓰는 것이다. 글쓰기가 멍청한 짓을 무마해 주어서가 아니라 내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걸 받아들이게 해 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노트는 자신의 한심함과 부족함, 답답함, 슬픔, 종내는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한다는 체념으로 가득 찬다. 노트 속에서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둡다. 그러나 빽빽이 채워진 노트는 세상에 대한 그 빽빽한 미련으로 오히려 세상과 자신을 가장 사랑했다는 증거, 더 나아가 사랑하고 싶지 않았으나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열렬한 러브 스토리의 증거로 남는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을 미워하면서 사랑하고 세상을 미워하면서 사랑한다.

 

- 내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나를 위로했던 건 가만히 잡아 주는 손이나 함께 마셔 주는 술, 별일 없다는 듯 들려주는 자신의 이야기와 터놓고 나누는 속 깊은 대화였다. 온종일 들은 음악과 팟캐스트, 영화관에 가서 하루에 세 편씩 보던 영화도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위로했다. 그중엔 코미디도 드라마도 액션도 있었고 위로는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너를 위로하겠어'라고 말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다.

 

- 주인공은 신에게 기도한다. 자신은 늘 당신의 의도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어 왔다고, 하지만 만약 당신에게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면, 자신의 성취감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증명이라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곧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증명이 아니며, 신이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증명도 아니라는 걸 소설은 보여 준다. 그러니까 물리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먹어야 하고 자야 하고 언젠가는 죽기도 해야 한다. 내 고통에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신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길도 없다. 결국 내 삶은 내가 사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정말 지치는 일이네.

삶을 떠넘기고 싶은 충동, 좀 기대고 싶은 불안, 무거운 짐을 덜고 싶은 마음에 종종 휘둘린다. 이 봇짐 좀 대신 져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손톱을 깎아서 버리면 쥐가 먹고 내 분신이 된다는데 분신을 만들어서 좀 부탁하려고 해도 요새는 쥐를 통 만나보기도 쉽지 않고.... 그래도 이 짐 다 지고 가는 게 인간이니까, 바닥에 풀어 헤친 짐을 다시 꽁꽁 싸매고 걷는다.

 

- 드림렌즈로라도 시력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많이 읽을 것. 놀러 다닐 것. 좋고 슬픈 것을 볼 것. 사람의 눈물을 보고 뛰어다니는 개를 볼 것. 숨은 것과 숨으러 간 것을 볼 것.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것.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고들 하니까. 그렇게 인생의 긴 할 일 목록에 쓰고 한참 동안 잊어버릴 항목을 꼼꼼히 덧붙이고, 30년쯤 후에 중간 점검으로 당당히 체크 표시를 할 날을 기다린다.

 

- 이 광폭한 소비는 다 어디로 갈까? 이 광폭한 문명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나는 불안해한다. 많이 먹고, 많이 쓰고, 많이 버리고, 그걸 찍어서 올리고, 그걸 보고 따라 하고, 잔뜩 사고, 잔뜩 산 걸 버리고, 잔뜩 버린 것이 흘러들고, 잔뜩 먹어 치운 것이 다시 재배되고, 사라지고, 쓰레기 더미에 파묻히고, 이게 다 어디로 가고, 어디까지 갈까. 이 문명의 한계점은 언제일까. 10년 후, 50년 후에도 우리는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 햄버거를 20개씩 먹고 고기를 찬양하고 개구리알을 욕조에 푸는 동안 이 문명은 어디로 가고 있나. 그런 아득함 같은 것.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서는 소비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나는 가끔 눈을 감고 지금 이 순간에 소비되고 있을 커피나 휴지나 비닐의 양을 상상해 본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온당한 일인지 의심한다. 내가 살아 있는 것, 살아서 뭘 자꾸 먹고 쓰고 버리는 것 자체가 해악인 건 아닐까. 이미 늦었다는데. 돌이킬 수 있는 시점은 20년 전에 지나 버렸다는데. 모두가 연결된 세계에서 모든 것의 폭주는 멈추질 않고.

'광폭'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작금의 문명을 바라볼 때면 세상과 지켜 온 어떤 유대감이 깨지는 느낌이 든다. 왠지 그것은 정말로 신체의 고통처럼 느껴진다. 본질적인 유대감, 내가 자연의 일부라는 안정감과 공포, 우주의 질서에 속해 있다는 긴장감, 그런 것을 담요처럼 덮고 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혹은 현대에 태어난 주제에 그런 것을 느꼈다니, 모두 착각일까?

 

- 풍요란 무엇인가?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라는 말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것을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굶는 사람의 수가 줄고 교육받는 사람이 늘었으므로 세상이 나아졌다고 말하는 통계 앞에서, 그럼에도 나를 간질이고 찔러 대는 어떤 고통을 자주 생각한다. 수 초마다 '좋아요'로 분비되는 쾌감 물질과 고요를 두려워하는 정신과 쏟아지는 가십거리와 영상으로 극대화된 관음증을. 거울 같은 환경과 메아리 같은 대화와 천성이 된 질투와 세련된 착취를. 공장식 축산과 재배를 위해 파괴된 땅과 금고가 된 땅속을. 그리고 그 무엇도 저절로 해결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우리는 자연을 자원화해 왔고, 인간의 육체노동을 자원화해왔고, 정신노동을 자원화해 왔으며, 마침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자원화하기에 이르렀다. 취미와 취향과 신념과 원칙은 이제 상품이 된다. 내가 나라고 믿는 것은 알고리즘의 재료가 된다. 노동의 대가는 월급으로 받으나, 정체성을 넘겨주고 대가를 받았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다. 나의 정체성은 고갈될 일이 없는 황금알이므로 내가 살아 있고 플랫폼 비즈니스의 사용자인 한은 죽을 때까지 상품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상품으로 태어나 상품으로 죽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를 먹어 치우는 거대한 동물인 동시에 낱낱이 파헤쳐 지는 거대한 광산이다. 아니, 우리는 낱낱이 파헤쳐 지기에 더욱 먹어 치우는 동물이 되어 가고 있다. 더 사고 더 버리고 더 채워 봐, 좋아요 수를 봐, 사람들도 다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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