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아버지가 없는 딸도 있고, 유년기는 행복한 기억을 남겼지만 어떤 연유로 아버지가 갑자기 집을 떠나 그 후로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딸도 있고, 아버지와 쭉 같이 살았지만 정서적으로는 없는 것만 못한 아버지를 둔 딸도 있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아버지에게 정서적, 물질적 지지를 받지 못해 혼자 세상을 꿋꿋하게 혹은 투쟁하듯이 살아온 딸도 있다. 아버지와 무관하게 살아온 딸들은 의식적으로는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앞으로도 쭉 아버지와 상관없이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는 아버지의 자리, 특히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 줄 대상이나 사람을 끊임없이 찾기도 한다.
살아 있든 돌아가셨든 아버지가 자기 삶에 미친 영향을 인식하게 되면 세상을 향한 분노도, 자기 삶에 대한 연민도, 밖에서 아버지 대체물을 찾던 자신의 습관도 알아차리게 되고 비로소 아버지 자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 영향을 알게 모르게 많이 받았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던, 부인하고 싶었던 그 마음의 한 공간, 구멍을 메울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특별히 어떤 딸은 더욱 그렇다.
많은 아버지의 딸이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영향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유 없이 우울하고 처진 기분이 지속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처음에는 이런 감정을 털어내기 위해 일에 몰두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일도 만들어 분주하게 살아보지만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일이나 사람들로 채우려고 하다 보니 에너지가 소진되다 못해 완전히 방전된 것이다. 그러다가 그런 기분의 한가운데에 다름 아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도 한다.
- 아버지 효과 (Father effexts)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심리학자 로스 파크 (Ross Parke)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가치관, 태도, 습관 등이 아이에게 각인되어 아이의 삶과 장래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아버지 양육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자녀 양육이나 교육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온 가정일수록 아이의 학업성취도가 높고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 확률이 높다고 한다. 아버지의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아이들은 스트레스와 실패를 견디는 힘이 더 크고 자신과 상황을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문제해결력이 훨씬 우수하다고 한다.
-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심층심리학적으로 풀어내면서 탁월한 통찰을 주고 있는 머린 머독(Maureen Murdock)은 딸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아버지 유형을 몇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는 '충분히 좋은 아버지'이다. 충분히 좋은 아버지는 정신분석학자 위니 코트(D. Winnicott)가 말한 충분히 좋은 엄마와 마찬가지로 딸을 충분히 사랑하고 애정 어린 양육을 해서 딸이 남자들과 더불어 잘 살아가면서도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자립적인 여자가 되게끔 도와준다. 딸을 감정적으로 무시하거나 죽음, 이혼 등으로 딸을 내버려 두는 부재형 아버지(absent father)도 있고, 딸을 애지중지해서 버릇없이 키우는 아버지(pampering father)도 있다. 수동형 아버지(passive father)는 아버지 역할을 포기하고 딸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하도록 방치하는 아버지다. 유혹형 아버지(seductive father)는 딸과 정서적으로 너무 친밀해서 계속 자신 옆에 묶어두려는 아버지이고, 지배형 아버지(domineering father)는 딸에게 복종을 강요해서 언제나 딸을 두렵게 만들고 불안정한 상태로 만든다. 중독형 아버지(addictive father)는 알코올이나 마약 같은 약물에 빠져 딸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이상형 아버지(idealized father)는 딸을 아내나 다른 아이들보다 특별히 사랑해서 딸이 스스로 특별하고 재능을 부여받은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
이런 아버지 유형은 딸의 인격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머독에 따르면 부재형 아버지의 딸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오랫동안 자책하며 다른 사람의 사랑을 얻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된다고 한다. 애지중지형 아버지의 딸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게 되어 아버지 대체물을 끊임없이 찾게 된다. 유혹형 아버지의 딸들은 딸과 건강한 심리적 경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정도를 벗어난 아버지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관계에서도 정신적 고통을 받기도 한다. 수동형 아버지의 딸들은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다고 느끼고 일생 동안 아버지에게 부족했던 책임감과 권위를 지나치게 보상하려 애쓴다. 지배형 아버지의 딸들은 순종하거나 반항하느라 인생을 허비하고 중독형 아버지를 둔 딸들은 주변의 사람과 상황을 끊임없이 구조화하고 통제하려고 애를 쓴다.
- 감정이 실려있는 기억은 사실적인 사건과 다르기도 하다. 기억은 우리의 느낌, 이미지, 사건을 보는 시각 등 단편적인 조각들로 만들어진 콜라주 같다. 임상 장면에서 환자들이 아버지, 어머니와의 과거 기억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 보면 우리 기억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알게 된다. 환자뿐만 아니라 부부 문제로 상담을 하는 남편과 아내는 같은 사건에 대해 감정, 이미지가 판이하게 다르다. 이처럼 기억은 실제 사건에 각자의 감정과 이미지를 덧씌워 실제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기억하게 만든다.
- 심리학자 스티븐 헤이스(Steven Hayes)는 이를 '모래 구덩이'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모래 구덩이에 빠진 사람이 그 구덩이에서 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무게중심이 이동되면서 하향 압력이 심해져 더 빠져들게 된다. 모래 구덩이에서 나오려면 계속 팔을 어우적 거리고 다리를 버둥거릴 것이 아니라 팔다리를 대자로 쭉 뻗고 느긋한 자세로 체중을 가급적 균일하게 모래 표면에 배분해야 더는 빠져들지 않고 천천히 기어서 움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고통을 바라보면서 고통을 껴안아야 한다고 하였다. 마치 우는 아이를 껴안듯이 말이다.
- 책임감 있는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버지를 둔 딸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 안에 건강한 남성상이 뿌리내릴 수 없다. 이런 딸들은 내면의 약점을 숨기려고 애를 쓰면서 거짓 자기(False self)를 내세워 강한 여자인척하다가 어느 순간 무너지기도 한다.
- 대처 수상의 아버지가 평소에 했다는 말은 이 세상의 딸들이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하는 말이다.
생각을 조심해라. ->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 인격이 된다.
인격을 조심해라. -> 운명이 된다.
- <상처 입은 딸>의 저자인 심리학자 린다 레오나드(Linda Leonard)는 어려서 있으나 마나 한 무책임한 아버지를 경험했다면 딸들은 그런 아버지에 대항하는 패턴을 취하며 아마조나스 여전사 같은 여성이 된다고 하였다. 딸들이 자라면서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임을 경험한다면 의식적인 수준에서는 아버지를 비롯해서 세상의 모든 남자를 거부할 수 있다. 이런 심리 반응이 일어나면 남성 원리와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아마존 여인들은 남성적인 힘 혹은 강함과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아버지가 아버지다운 역할을 못하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남성적 정체감을 취한 여성은 '아마존 갑옷(Amazon armor)'을 입게 된다. 아마존 갑옷을 입은 여성은 진솔한 감정, 감수성, 여성적 본능의 힘을 잃고 겉으로는 웬만한 남성보다 더 터프한 남성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아마조나스 여성을 대표하는 것이 슈퍼우먼이다. 특히 아버지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경우 딸은 스스로 성취에 목을 매는 슈퍼우먼이 된다. 아버지로부터 돌봄 부족을 보상하려는 경향성이 일 중독, 과잉 성취에 몰두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여성들은 20대, 30대에 너무 일에 몰두해서 40대가 되면 정서적으로는 메마르고 감정이나 여성적 본능에서 점차 멀어진다. 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심신 에너지가 고갈되고 우울감과 의미 상실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딸들은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 아버지를 둔 탓에 일찍부터 아버지나 어머니 대신 일을 하거나 평생 일중독자로 살다 보니 여성의 타고난 본성인 모성과도 거리가 멀어진다. 딸들의 어머니 역시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남편을 대신하여 아마조나스 여전사처럼 강하게 살아온 여성이기도 하다. 여자다운 모든 감정을 부인하는 어머니를 통해 남성적인 경향성은 딸에게 전수된다. 이런 어머니는 심지어 딸이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막기도 한다. 한량 같은 아버지에게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고 대신 여성적인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으며 악착같이 공부해 일에서 성공한 아버지의 딸 중에는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처럼 여성적 본성을 억압하고 여전사처럼 무장하고 일만 하다가 어느 순간 소진되는 여성도 있다.
- 특히 이들 여성에게는 공통적으로 자기 욕구, 정확히는 자기 안의 여성성을 잘 돌보지 않아 일정 나이가 되면 감정 영역과 관계 영역에 동맥경화가 온다. 심리학적으로는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 인식의 미분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웬만한 불편한 감정도 감수하며 일에 몰두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이들을 슈퍼우먼이라고 부른다. 30대까지는 이렇게 슈퍼우먼으로 살아가는 것이 일생에서 배운 가장 유효한 적응 방식으로 성공적이지만 문제는 30대 후반에서 40대에 접어들면 자기 인생에 대해 회의감이나 서글픔, 한 같은 것이 올라온다는 것이다. 돌봄을 제대로 받고 자라지 못해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불쑥 불쑥 주변 사람이나 남자친구, 남편이나 아이에게 이유 없이 화가 나기도 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 전설 속에 나오는 아마조나스 여성은 남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남자를 거세시켜 여성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자급자족했지만 현대의 아마조나스 여성은 주변의 남자친구, 남편 혹은 남자 동료들과 상호의존하면서도 독립적인 관계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아마조나스 여성은 남자를 통해 자기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수도 있다. 그래야만 자기 안의 여성이라는 고유한 본성을 살릴 수 있고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 여전사처럼 전투적으로 살아온 딸은 자기 내면의 여성을 살리는 기회를 언젠가는 가져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특히 여성으로서 자기 몸을 조금 더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모든 것을 잘해야 한다는 슈퍼우먼 콤플렉스를 가진 아마조나스 여성들은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때로는 휴전을 통해 숨을 고르면서 특유의 열정을 담금질해야만 삶이 주는 무게에 지치지 않을 수 있다.
- 관계가 단절되어도 홀로 잘 견뎌내는 사람은 관계의 소중함도 알지만 끝을 받아들이는 용기와 힘을 갖춘 사람이다. 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맹목적인 의존성과 영원한 소녀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면의 자라지 않은 여성을 스스로 키워주어야 하는데, 혼자 할 수 없다면 먼저 외부에 도움을 구하고 지지를 구해야 한다. 사실 도움을 추구하는 행동은 정신건강 서비스 영역에서 매우 중요하다. 어려서 독립성에 대한 모델을 얻지 못한 딸이 내면 아이인 자신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적절한 도움추구 행동을 해야 한다.
- 아버지 하면 의외로 '무능력, 무책임' 같은 말을 떠올리는 딸들이 많다. 몸이 부서질세라 가정과 자식을 책임져온 아버지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아버지도 꽤 많은 것이다. 딸에게 무책임하고 무능력하게 느껴지는 아버지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 늘 숨어 있거나 또는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작은 거인, 혹은 이상주의 자일 수도 있다.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아버지와 다른 남자친구나 남편을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한편으로는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아버지의 자리가 마음속에 생겼다고 고객 하는 딸들이 있다. 아버지의 자리에 대신 채우려고 했던 것들이 실은 너무 힘에 부치는 일이었거나 아버지 결핍을 과잉 보상하려고 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전히 아버지의 자리가 많이 비어 있지만 조금씩 채워나가려고 노력하면서 딸들은 부모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게 된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부정하게 된다. 아버지를 긍정하는 것이 자기 삶을 수용하고 긍정하는 것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자기 삶을 짓누르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애증을 내려놓을 수 있다.
어떤 딸은 이 과정이 매우 오래 걸린다. 만일 아버지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한 상태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면 그 과정은 평생 거릴 수 있다. 아버지의 그림자는 딸들의 마음속에 삶 속에 오랫동안 드리운다. 아버지가 딸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인식할 때 딸들은 조금씩 자기 안에 있는 원망감, 억울함, 혼란감, 결핍감을 내려놓고 조금은 더 담담하게 세상을 살 수 있다.
- 우리의 뇌에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것이 있다. 신경과학자인 워싱턴 대학교의 마커스 라이클(Marcus Raichle) 교수가 발견한 '휴지기 네트워크(Resting State Network RSN)'라는 것인데, 이 네트워크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 활성화된다. 라이클 박사는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이 문제 풀이에 집중하면서 생각에 몰두하자 뇌의 특정 영역에서 활동량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어드는 것을 발견했다. 테스트가 끝나고 실험 참가자가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지기 상태가 되자 이 영역의 뇌 활동이 크게 늘어났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연상의 흐름, 즉 떠오르는 대로 생각의 물결을 따라갈 때 작동한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런 자극이 주어지지 않고 쉬고 있는데 돌연 좋은 생각이 번쩍하고 떠오르는 것은 두뇌가 저장해둔 '내면의 지식'이라는 엄청난 보물을 꺼내놓기 대문이라는 것이 신경과학자들의 설명이다.
- 착한 딸 콤플렉스를 가진 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틱낫한 스님의 <평화로움>에 나오는 내용이다. 서커스단에서 공중 그네 타기를 하며 사는 아버지와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딸에게 "우리가 잘 살아가려면 서로를 돌봐주어야 한다. 내 목숨이 네 손에 달렸잖니. 제발 나를 돌보아다오. 나도 최선을 다해 너를 돌볼게"라고 말했다. 그러자 딸이 말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해요. 아버지는 아버지 스스로를 돌보세요. 아버지가 안정된 마음으로 경각심을 늦추지 않으면 제게도 도움이 되어요. 저도 줄 위로 올라갈 때 각별히 주의해서 실수하지 않도록 애쓸게요. 아버지는 최선을 다해서 아버지를 돌보세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저를 돌볼게요. 그러면 아버지와 제가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어요."
언뜻 보면 굉장히 냉정한 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딸의 말은 내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담고 있다. 아버지를 너무 돌보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돌봐야 한다고. 아버지는 몸도 건강하고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 상태이니 아버지는 아버지 자신을 돌보면 된다. 아버지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딸에게 은근 떠넘기고, 딸은 그 강요에 못 이겨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그 아버지와 딸은 건강하게 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자식에 대한 돌봄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내 노후를 책임질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독립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길러주어야 하는 것이 부모의 과업일 것이다. 아버지는 딸을 세상으로 내보내야 하고 딸은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와야 한다.
이런 딸들은 대개 양가감정(Ambivalent feeling)을 갖는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자기마저 떠나버리면 아버지 혼자 남을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고 때론 그런 아버지에게 화가 나면서도 죄책감이 드는 그런 복합적인 감정이 동맥경화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갇혀버린다.
- 자라면서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는 다분히 권선징악적인 내용에서 우리가 몰랐던 오류가 담겨 있다. 너무 착해서 오히려 고달픈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착한 딸 콤플렉스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독일의 심리학자 하인즈 피터 로어(Heinz Peter Rohr)는 '착한 딸 콤플렉스'란 죄책감과 콤플렉스가 강한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며 문제의 원인은 고통의 뿌리에 있는 '그림자(Shadow)' 인격을 방치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림자 인격이란 분석심리학자 융에 따르면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달리 속에 있고 억압되고 감춰진 인격'을 말한다. 이런 마음은 무의식 저편에 있어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자 인격에는 많은 콤플렉스가 들어 있다. 대개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 열등감, 죄책감, 두려움 등이 숨어 있다. 착한 딸 콤플렉스에서 벗어나려면 자기가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인격의 또 다른 측면인 그림자를 통합해야만 한다.
이런 여성들은 스스로를 대접하고 존중하고 사랑해야 남들도 나를 제대로 대접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남을 의식하고 강요된 희생을 감수하며 고통스럽게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되찾는 것이 자신을 소중히 다루는 방식이다.
- 모호한 아버지의 부재에는 두 유형이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실제로 옆에 없지만 다른 가족의 마음속에 심리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다.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상실 경험이 이런 유형이다. 남겨진 아이들은 아버지가 가족을 어떻게 떠났는지, 확실하게 떠난 것은 맞는지 확신할 수 없고 늘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 거지?'라고 의아하게 생각한다. 자녀도 아버지 소식을 듣지 못하고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두 번째 유형은 실제로는 옆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유형이다. 외도나 중독, 정신질환 또는 일중독으로 자녀에게 무관심하고 정서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아버지다. 이런 아버지들은 같이 살아도 정서적으로는 연대감이나 연결감이 전혀 없고 아버지는 돈이나 벌어오는 사람에 불과하다. 아버지는 몸은 옆에 있지만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옆에 있으니 몸으로는 찾을 필요가 없지만 마음과 생각으로 찾아 나선다.
-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에는 직면하지 않고 피하려고 한다. 애도 전문가인 데이비드 하트(David Hart)는 이를 돕기 위해 다음의 두 단계를 제안한다. 첫 번째 단계는 삶에서 상실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을 파악하는 단계다. 상처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잘 살펴보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이 언제였는지 그때 내 반응은 어땠는지 생각해 보면 과거 그 시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과거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나타나는 고통을 직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자기가 만나고 있는 자기 주변에 있는 남자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아버지 모델이 되어주는 남자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다 보면 유년 시절 아버지 상실과 부재로 인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어령 교수의 딸 민아 씨는 아버지 상실과 부재로 인해 나중에 남편이 된 남자에게 너무 의존하고 또 실망했다고 회고한다.
두 번째 단계는 아버지에 대해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의 차이를 알아내는 것이다. 사실은 무엇이고 아버지에 대해 재해석하고 달리 생각하게 된 것이 무엇인지, 아버지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이 있었는지 살펴본다. 어떤 과거의 일은 사실이 아닌데도 사실로 믿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믿는 것이 곧 사실이 되어버린다. 인간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기도 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 사건에 공상과 생각이 덧붙여지면서 다르게 각색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급적 그때 그 사건에서 사실이 무엇이었는지, 사실이 아닌 것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기억의 왜곡이 덧씌워졌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현재 아버지나 가족에게 그 일을 물어볼 수도 있지만 가족 역시 그 사건과 상황을 지각하고 해석하는 것이 모두 다를 수 있다.
심리학자 다우니(G. Downey)에 따르면 과거에 버림을 받은 사람은 유난히 거절에 민감해진다고 한다. 거절 민감성은 거절이나 거부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예기 불안을 느끼며 분노하고 우울하게 반응하는 등 실제 상황에서 보통 사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향성을 나타낸다. 어린 시절 옆에 없었던 아버지로 인해 버림받은 느낌을 받았던 딸은 특히 남자친구나 배우자의 거절에 매우 민감하다.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상대에게 거절을 당하거나 버림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결혼을 해서도 늘 남편이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 유독 고부갈등에 시달리는 여성 중에서도 의무감과 헌신에 가득 찬 아버지의 딸이 많다. 자기주장이 센 며느리들은 그 선을 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착하디착한 며느리들은 얼토당토하지 않은 시어머니의 요구까지 계속 들어주고 그런 성향을 강화시킨다. 그들은 이렇게 의무감과 헌신 속에 살다가 중년 이후에 화병을 호소하기도 한다.
- 필자가 마음챙김 분노 다스리기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지금 화가 나 있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분명 화가 나게 하는 상황과 조건이 있었을 것이다. 현재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분노 감정을 대면하고 마음속 분노 찌꺼기가 남지 않게 소화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놓고 제대로 알아주지 않았던 화난 마음은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이 알아주어야 한다. 나도 알아주지 못하고 팽개친 감정을 알아줄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 마음을 알아채고 이름을 붙여주면 더 이상 마음은 억울함을 느끼지 않고 소멸될 수 있다. 마음속에 돌봐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화난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다음 아닌 자신이며, 이제는 피하지 않고 그 마음을 알아주고 끌어안아야 한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 안의 분노의 형태와 깊이를 알아챈다. 그리고 자신을 화나게 한 그 대상을 향한 분노의 불길을 거두어들인다. 감정의 주인은 자신이다. 지금 화가 나 있다면, 가슴 저 안쪽에 분노의 불씨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면, 그 분노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분노의 씨앗을 알아채고 그 분노의 씨앗에 더 이상 물을 주지 않고 그냥 지나가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분노를 알아차린 다음에 할 일은 분노 에너지를 보다 창의적인 에너지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작업을 하면 그동안 분노를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부적응적인 행동양식, 예컨대 술이나 음식 혹은 물건에 대한 강박적이고 중독적인 집착에서 벗어나서 내면의 창의적인 에너지와 여성적인 지혜를 가진 강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분노를 수용하고 변형시키면 상대에 대한 연민이 우러나오고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는 내적인 여유가 생긴다.
- 아버지 탓으로 돌리고 원망만 하면 분노의 씨앗을 더 키울 뿐이다. 아버지 역시 어쩌면 자신의 부모로부터 대물림한 상처를 딸에게 똑같이 대물림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 역시 잘못된 양육과 환경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아버지를 더 이상 가해자가 아닌 상처 입은 한 인간으로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분노가 있던 자리에 연민과 이해의 싹이 자라기도 한다.
- 현실치료를 창시한 윌리엄 글래서(William Glasser)는 "우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으며 과거를 이해하려는 것은 우리의 관심을 현실로 돌리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과거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과거에 경험한 어떤 안 좋은 일을 무력하고 무책임한 자신의 현재 행동을 변명하는 구실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수동성과 무력감이 과거에서 비롯된 것을 인식하면 그 과거의 고리와 끊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기 의지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학습하였을지라도 지금부터라도 자기결정력을 회복하려면 자기 안에 숨겨져 있는 힘을 되찾아야 한다. 그 힘을 끌어내기 어렵다면 스스로 물어보라. "지금 이 시점에서 나 자신을 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올 것이다.
- 융은 여성 안에 들어 있는 내적 인격인 남성을 '아니무스(Animus)', 남성 안에 들어 있는 내적 인격인 여성을 '아니마(Anima)'라고 지칭하고 있다. 여성 안에 들어 있는 아니무스는 흔히 말하는 남성적인 주도성, 힘을 의미하고 남성 안에 들어 있는 아니마는 흔히 이야기하는 여성적인 부드러움, 연약함 등을 상징한다.
자기 안의 남성인 아니무스를 건강하게 가꾸는 여성은 바깥의 남성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성취하고 주도성을 갖고 공부든 일이든 몰두하는 여성을 말한다. 굉장히 진취적이고 왕성히 활동하는 여성은 아니무스의 힘을 내적으로 가꾼 여성이다. 아니무스가 강한 여성은 어떤 힘든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고 내적인 강인함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담금질하며 앞으로 달려간다.
물론 바깥에 있는 남자 혹은 남편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면의 아니무스, 즉 키다리 아저씨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상호의존하면서도 주체적으로 삶을 살고 자율성과 독립성을 갖고 있다.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 일의 영역을 따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같이 공유하는 활동을 통해 만족감과 행복을 얻는 것이다. 혼자서도 건강하고 독립적인 여자가 남자친구나 남편과의 관계에서 더 건강해질 수 있는 법이다.
- 남자든 여자든 관계가 끝났을 때에는 끝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관계가 끝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성숙한 사람은 사랑이 끝났을 때 자신과 상대방이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충분한 존중과 예의를 보여준다. 건강한 관계에서는 서로 상대의 성장을 도와주고 진정한 친밀감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바꾸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고 동등하게 주고받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많은 여성이 남자에게 희생하고 헌신하지만 자신의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거나 행사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 많은 여성이 외부 대상에게 투사한 속성을 자기 안의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에게 기대와 바람을 투영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상대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자기도 수난에 빠진다. 만일 연인이 혹은 남편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 때문에 괴롭다면 본인이 갖고 있는 속성 중의 어느 부분이 그 대상에게로 향한 것인지 본질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 상대방에게 던진 지나친 요구를 거두어들이고 상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보려고 하면 사라의 마법도 풀리면서 현실적인 해결방안이 나타날 수 있다.
- 대부분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첫 시간부터 우는 여성들과는 달리 지적이고 강해 보이는 여성들은 상담을 받으면서 좀처럼 울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의 문제를 머리로는 잘 알고 이해하고 있지만 마음은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소영 씨도 그랬다. 그녀의 지성과 감성은 따로 놀고 있었다. 마치 지적인 뇌와 정서적인 뇌가 분리되어 전혀 교류를 하지 않는 것처럼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는 자신의 경험이 소화가 되지 않았다. 상담을 하면서 점차 소영 씨는 자기 마음속에 자라지 않은 내면 아이, 어린 소녀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 우리나라 여성의 상당수는 가부장적 아니무스를 가지고 있어서 사랑하는 남자가 독립심과 책임감이 강하고 능동적인 남성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비싼 집과 비싼 차를 몰고 다니는 남자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다니는 남자보다 멋있게 보일 수밖에 없다.
- 남성이 아니마를 만나거나 여성이 아니무스를 만날 때는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을 먼저 만난다. 융은 이를 아니마 기분(Anima mood)과 아니무스 의견(Animus opinion)이라고 표현하였다. 융에 따르면 부정적인 아니마는 남성을 우울하고 변덕스럽고 짜증과 원망이 많은 상태로 만들고, 부정적인 아니무스는 여성을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고 완강하게 만든다. 그래서 감정 표현이 서툰 남편과 직설적이고 비판적인 말로 남편과 아이들을 휘두르는 아내가 나오는 것이다. 여성이 아니무스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자녀들은 엄마에게 따뜻한 모성애를 느끼기 어렵다. 비판적이고 단정적인 태도가 아이 또는 남편과의 사랑을 가로막는다.
파트너 선택에는 개인의 병리를 치료하려는 노력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남자도 성장 과정에서 애착 대상인 어머니에게서 독립해야 성인 남성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숙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로부터 과잉보호나 강압적인 양육을 받은 일부 남자들은 여자와 감정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애쓰는 부정적인 마더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자가 화를 내면 그 옛날 어머니에게 야단맞던 어린 소년처럼 작아지는 남자는 어머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조건 복종하거나 아니면 자존심을 지키려고 반항하려는 거친 10대 청소년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어린 소년처럼 문제가 생기면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자기 입장을 포기하는 남자나 자존심을 내세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남자는 어느 쪽도 건강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남자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여자가 화를 내거나 거부하는 것에 대해 불안감과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아니면 계속 미성숙한 소년으로 살 수밖에 없다.
- 정서 중심 부부치료를 만든 캐나다의 심리학자 수잔 존슨(Susan Johnson)은 부부 갈등을 겪는 남성, 여성들을 분석해보면 회피형 남성과 공격형 여성 조합이 많다고 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관계에서 갈등이 생기면 남성은 회피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취하고 여성은 쫓아가면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다. 융 분석가들은 남성의 수동성과 회피성이 여성 내면의 아니무스를 밖으로 끌어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여성의 아니무스가 힘의 논리로 남성을 제압하려고 하고 다그치면 엄마의 다그침을 듣고 말문을 닫아버리거나 문을 박차고 나가는 아들처럼 남성은 입을 다물고 피하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반격을 하기도 한다. 남성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계속 밀어붙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여성은 잠시 멈추어 설 필요가 있다. 남자의 자존심을 존중하고 상대를 지배하려는 태도를 내려놓지 않으면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남성 역시 여성의 터무니없는 공격에 화만 내거나 회피할 것이 아니라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내면의 아니마 기분에 사로잡힌 남성은 변덕스럽고 까탈스러운 여성 못지않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렇게 되면 여성의 공격과 비난은 더욱 거세진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유명한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인간 내면에는 부성 양심과 모성 양심이 있다고 했다. 부성 양심을 통해서는 복종, 성실, 절제, 인내, 책임을 배우고, 모성 양심을 통해서는 자비, 연민 등을 배운다. 부성 양심만을 갖고 있으면 냉정하고 난폭하고, 모성 양심만 갖고 있다면 우유부단하고 의존적이며 현실 대처 능력이 떨어지고 히스테리나 알코올중독 같은 병에 걸릴 수 있다. 모성 양심과 부성 양심을 통합하여 이성과 감성이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 어머니는 진화심리학적으로 아들이든 딸이든 자녀와 관계를 형성하기가 더 쉽다. 애착과 관련된 호르몬인 옥시토신과 프로게스테론, 에스트로겐 같은 여성 호르몬이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타고나기를 여자보다 더 감성적인 남자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보다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엄마들처럼 천연 옥시토신 호르몬이 생리적으로 부족한 아버지들은 그렇기 때문에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을 연습하고 공부해야 한다.
- <똑똑한 마벨라>는 사람들 입을 통해 구전되면서 다듬어졌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림바족에게서 나온 이야기라고 한다. 림바족은 수백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전통적인 지혜와 교훈을 전해왔다. 여기서 마벨라의 아버지가 마벨라가 똑똑해지도록 가르친 것은 심리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첫째,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청각을 동원해서 주변의 소리에 매우 예민해지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자기 소리에만 파묻힌 사람은 주변의 소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변에 귀를 기울이면 문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잘 파악할 수 있다.
둘째,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보는 것은 시각을 사용해서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잘 관찰하라는 의미다. 셋째, 말을 할 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라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흔히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보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이야기에 도취되어 장광설에 빠지는 사람들 중에는 애초에 남의 이야기에는 눈곱만큼 관심도 없고 자화자찬이나 자기 지식을 뽐내려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말을 하기도 한다.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한다면 듣는 사람 역시 그 사람의 의도나 생각을 알기 어렵다. 말은 곧 사고를 반영한다. 현란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을 보면 자기 말이 주는 파장이나 효과에 별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내가 하는 말을 내가 잘 들어보고 그것이 무슨 말인지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 자기 말이 주변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 수 있다.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의 역동을 살펴보면 이 듣기와 보기, 생각하기가 잘되지 않는다. 멈추고 잘 들어보고 잘 관찰해보고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순간 어떤 말과 생각을 해야 할지가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마벨라의 아버지가 가르쳐준 마지막 지혜, 움직여야 할 때 재빨리 움직이는 것! 이것은 전통적인 행동주의심리학이나 인지심리학에서 강조하는 부분과 일맥상통한다. 행동주의심리학에서는 자극에 대한 반응, 즉 행동을 강조한다면 인지심리학에서는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과 핵심 신념이 행동을 결정한다고 한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라는 말처럼 생각을 하면 자기가 그 순간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 아버지가 일부러 딸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줄 필요는 없지만 정신분석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적절한 좌절(Optimal frustration)은 필요하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만들어준 안락한 집을 떠나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해야 하는 딸에게는 아버지의 눈먼 사랑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될 수도 있다. 좌절을 주되 적절하여야 한다는 것이 이 말의 핵심이다.
- 일어난 경험에 대해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통합되려면 아버지와 딸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야 한다. 만약에 그 사이에 아버지가 죽었거나 정서적으로 옆에 없다면 딸은 분노와 상실을 표현하기 위해 지지가 필요하다. 상처의 고통이 표현되어야만 실망, 분노, 후회 속에 아버지와 연결될 것이다. 친구나 지지집단, 상담 등도 필요할 수 있다. 그림이나 글쓰기로 표현하는 것도 치유의 한 방법이다. 그래야 앞으로 나갈 기회를 갖는다.
- 우리나라 어머니, 아버지들은 유난히 자식에 헌신하고 그 헌신에 대해 보상을 바라는 경향성이 짙다. 자식이 부모에게 좋은 대접과 양육을 받았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자식의 복이고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많은 부모가 해준 것에 대해 자식들이 감사해하고 보답할 것을 원한다. 이는 효나 예를 강조하는 우리의 전통문화 영향도 있겠지만 자식이 보험이라고 생각하는 부모의 부상 심리가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 <상처 입은 치유자>를 쓴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헨리나우엔(Henri Nouwen)은 고통을 삶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라고 한다. 고통을 없애거나 피하고, 속이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다. 고통을 제거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고통과 함께하면서 고통을 직시하다 보면 고통의 핵심을 관통하는 혜안이 생긴다. 이 혜안으로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고 도와주는 치유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아버지의 특별한 딸 중에는 이런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 있다. 이들은 상처 입은 피해자로 자기를 규정하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피해자-가해자 구도로 설정하고 자신을 상처 입은 피해자로 보는 시각에 머물러 있다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지만 상처를 극복할 힘을 스스로 발견한 딸은 그 상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 역시 과거 잘못된 양육을 받았고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면 아버지의 상처를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고 아버지와의 관계의 틀이 바뀐다. 이렇게 되면 상처 입은 치유자인 딸은 마치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수련처럼 자기 상처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위한 꽃으로 다시 피어나기도 한다.
- 요즘 들어 웃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해서 억지로 웃게 만드는 '웃음치료'가 각광받고 있지만 울어야 할 때 잘 우는 것도 잘 웃는 것만큼 정신건강에 좋다. 웃음이 생체 면역력을 높여준다고 알려진 것처럼 울음 역시 오랫동안 쌓여있던 감정의 찌꺼기를 해소하고 슬픔을 머금고 있는 영혼을 정화시켜준다. 그래서 흘리지 못해 고여 잇는 오랜 눈물(old tear)은 '신이 인간에게 준 치유의 물'이기도 하다.
- 과거의 상처는 어떤 식으로든 치유되어야 한다. 바꿀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상처를 치유하는 손쉬우면서도 어려운, 유일한 길은 용서다. 용서를 연구한 루이스스미디스(Lewis B. Smedes) 박사에 따르면 용서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감사의 기억으로, 비겁한 기억을 용감한 기억으로, 노예로 만들었던 기억을 자유로운 기억'으로 바꾸어준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용서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환영이 부서져버린 후 미래를 향한 소망을 탄생시킨다.
- "살아오면서 아버지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느꼈던 분노와 원망을 내려놓는다"는 확언을 스스로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단 몇 줄 혹은 몇 장에 걸쳐 글을 쓸 수도 있다. "ㅇㅇㅇ에 대해 이젠 아버지를 용서하고 내려놓습니다"는 글을 쓰고 난 뒤 빈 의자 위에 아버지를 상상의 눈으로 앉게 한 다음 글을 읽어보는 것이다.
- 용서 연구자인 스미디스는 용서와 화해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용서하려면 한 사람이 필요하고 화해를 하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다.
용서는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지만 화해는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잘못을 했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 사람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했었다고 진심으로 말하지 않는 사람과는 진정한 화해를 할 수는 없다.
용서는 조건이 필요 없지만 화해는 몇 가지 조건을 단다.
먼저 자기 용서가 기본이다.
- 아버지가 과거에 자신에게 해주지 못한 것, 잘못한 일로 인해 여전히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과거의 고통이 현재의 삶과 행복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버지 때문에 고통받는 내가 왜 나를 용서해야 하는걸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충분히 좋은 양육을 받지 못한 사람을 몇 가지 이유로 자신을 비난하고 자책하기도 한다. 그 이유에는 우선 아버지가 자신을 대하던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이 포함된다. 학대를 받거나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 딸은 스스로에게도 좋은 대접을 해주지 못하고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긴다. 아버지를 싫어하고 심지어 경멸하였던 성향이 자기에게도 나타나는 것이다. 예컨대, 아버지에게서 폭력을 경험한 딸은 아이를 양육하면서 아이들을 학대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기학대를 일삼으면서 자신을 함부로 대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버지 용서와 자기 용서가 같이 일어나야 진정으로 치유의 길이 열린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자기를 용서하고 더 나아가 아버지 그리고 자신과 화해하면 세상을 향한 삐딱한 시선도 바뀌고 자유로워진다. 그 열쇠는 딸에게 있다. 세상에 대해, 주변 사람에 대해, 자신에 대해 이유 없이 화가 나고 만사가 불만족스럽다면,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드는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면 아버지를 용서하고 자신을 용서하고 아버지와 진정한 화해를 하기 위한 발을 내딛어야 한다. 스스로 하는 것이 어렵다면 상담과 같은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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