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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당신과 나 사이 (김혜남 저 / 출판사 메이븐)

by hyeranKIM 2021.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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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 사이

무례한 사람들의 부당한 비난으로부터 우아하게 나를 지키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해 주는 인간관계의 기술.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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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일 중 하나는 사람들이 가까운 이보다 오히려 낯선 이에게 더 친절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와는 대화를 나눈 지 너무나 오래된 딸이 길을 헤매는 여행객을 보면 먼저 다가가 길을 알려 준다. 친한 친구와 연락한 지 오래되었다고 한탄하는 박 대리는 같은 회사 팀원들과 일주일에도 두세 번씩 술자리를 한다. 서글서글하고 친절해 회사에서 '스마일맨'으로 통하는 최 과장은 집에만 들어가면 입을 봉한 듯 말이 없어진다.

낯선 이를 만나면 호의를 보이며 그의 말에 귀 기울이던 사람들이 가까운 이에게는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이 가만히 있는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힘들지?"라고 위로해 주기를 바란다.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해 주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마치 각자의 섬에 고립된 듯이 살아간다. 그러고는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한다. 길거리에서 만난 친절한 이가 알고 보면 남편을 원망하는 아내고, 아버지를 본체만체하는 아들이며, 사랑하는 이와 크게 싸워 마음을 다친 사람이고, 친구들과 연락한지 반 년이 넘은 무심한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 30여 년 동안 정신분석 전문의로 활동하며 만난 수천 명의 환자들. 그들은 모두 마음이 아파 나를 찾아왔는데, 놀랍게도 그들을 가장 아프게 만든 사람들은 바로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받고 싶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은 그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것이다. 혹시라도 상대방이 자신의 못나고 열등한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을 싫어하게 되거나 떠나 버릴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상처가 너무 아팠던 그들은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적당히 자신을 감춘 채 살아가기를 택한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지만 막상 상대방이 다가오면 두려워하면서 도망가기를 반복한다. 아니면 뭔가를 아주 특별하게 잘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완벽해지려고 애쓰다가 어느 순간 지쳐 버린다. 더 이상 노력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깊은 우울뿐이다. 하루하루 사는 게 의미 없고, 그저 힘들다고 느끼는 그들은 끝내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는 한, 그들은 상처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남들에겐 꽁꽁 감춰 왔던 못나고 약한 모습을 그에게 보여도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즉 상처 입기를 각오해야만 그토록 원하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달라이 라마는 <행복론>에서 친밀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서양에서 매우 가치 있게 여기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친밀감이 존재하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느낌과 두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특별한 한 사람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면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친밀한 관계는 단지 다른 사람들을 알고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나의 깊은 문제와 고통을 함께 나누는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는 이유는 결국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혼자가 더 편하다고 말하는 그녀도 실은 사랑받고 싶었다. 그녀가 지금껏 그토록 열심히 살아온 것도 어쩌면 엄마에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비난 대신 태어나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고, 남자 친구에게 "너도 힘들 텐데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맙고 사랑한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보잘것없고 하잖은 존재가 아니라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말을 들을 수가 없었던 그녀는 너무 지쳐서 관계를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별로 필요 없다는 이유로 자발적으로 관계 맺기를 거부한 것으로 포장하고는, 그 안에 머물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다. 하지만 상처 입지 않기 위해 가시를 세우다 보면 그나마 가깝던 사람들마저 그녀 곁을 떠나갈 뿐이다.

 

- 생각해 보라. 당사자가 아닌 이상 누가 20분 넘게 한 발자국도 못 떼는 고통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누가 한숨도 못 자고 끙끙 앓으며 새벽이 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가족들이 대신 아파해 주고 싶어도 그것은 마음뿐, 고통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는 나밖에 모르는 것이고, 내가 살고 싶다고 소리치지 않으면 아무도 그 아픔을 알아주지 못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외로운지를 깨달았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앞에서 나는 말 그대로 혼자였다.

 

- 돌이켜 보면 나는 2014년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 문을 닫기 전까지 밀려드는 환자 진료와 학회 활동, 인터뷰, 강의 요청 등으로 눈코 쓸 새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때 나는 남편을 미워했다. 남편이나 나나 똑같이 밖에 나가 일하는데 집안 일과 육아를 당연히 여자 몫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참 많이도 싸웠다. 처음에는 남편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다툼이 잦아질수록 사이는 나빠져만 갔다. 내 편이 되어 주기는커녕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를 비난하는 남편을 견딜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내가 더 힘든 상황인데 왜 자기가 더 힘들다고 여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함께 있어 봐야 사이가 더 나빠질 것만 같아 이혼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파킨슨병에 걸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으며 인간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자 신기하게도 남편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저 사람도 참 외로웠겠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와 떨어져 살며 기필코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어려서부터 했던 남편,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버지로서 자식에게 어떤 사랑을 주어야 하는지 잘 몰랐던 남편, 그럼에도 내 병을 고쳐 보겠다고 동분서주했던 남편이 그제야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도 나랑 사는 게 힘들었을 텐데 왜 나는 그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던 걸까? 남편도 분명 애쓰고 있었는데 왜 나는 내가 힘든 것만 크게 보았을까? 나는 남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자신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 주기를, 나를 더 사랑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다 보니 그가 조금만 섭섭하게 행동해도 크게 실망했다. 나와 다른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기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는 남편에게 내 짐을 대신 들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냈다. 애초에 내가 과도한 사랑을 요구한 게 문제였는데도,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않는다고 모든 책임을 그에게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그도 외롭고 서툰 한 인간일 뿐임을 미쳐 보지 못했던 거였다.

그런데 고통이 오로지 내 몫임을 깨닫고, 인생은 결국 혼자 걸어가는 길임을 깨닫자 그제야 비로소 나와 다른 독립체로서의 남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병원을 운영하느라 힘들 텐데 그 와중에 하루에 두세 번씩 전화를 걸어 안부를 걸어 안부를 묻는 남편이 참으로 고맙게 느껴졌다. 가끔씩 나에게 짜증을 낼 때는 서운하지만 그럼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든든하게 지켜 주는 남편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남편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병을 지금껏 견뎌 냈을까 싶다.

 

-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외로움을 달래는 것은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함께한다고 해서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상대방과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며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면 할수록 발견하게 되는 건 상대방과의 차이이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중에 상대가 나와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와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즉 하나로 합쳐지고자 하는 사람이 결국에는 나와 다른 존재임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모두 서로 분리된 외로운 존재일 뿐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만 한다. 결혼을 해도 외롭고, 결혼을 안 해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란 얘기다. 그리고 아무리 사랑해도 그와 내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에 따라서는 내가 서운하고, 때에 따라서는 네가 서운할 수밖에 없다. 다만 사랑을 하게 되면,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게 되면 사람은 다시 한번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나와 다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사랑해 주는 상대에게 깊은 감사를 느끼면서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톨스토이의 "행복한 결혼 생활은 상대와 얼마나 잘 지낼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불일치를 감당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라는 말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 우리는 보통 가족이나 연인을 위해 하는 일들에 대해 '사랑하니까'라는 이유를 붙인다. 다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런 행동이 사랑일 수 있을까?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을 휘두르려고 한다. 그를 사랑한다면서 정작 그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화를 내고 싫어하는 걸 하려고 들면 못 하게 막기도 한다.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아이가 이뤄 주기를 바라는 엄마도 아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런 엄마는 아이가 필요로 하는 사랑을 주기보다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필요한 사랑만 아이에게 준다. 심지어 아이가 다른 길을 가겠다고 하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아이의 뜻을 꺾으려고 든다. 아이에게 엄마는 생명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아이는 엄마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해 엄마가 원하는 것만 하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엄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가득하고 나중에는 그것을 어쩌지 못해 스스로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욕심과 사랑은 구분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냥 상대방을 마음대로 휘두르려는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다. 그리고 자기 취향에 맞게 타인을 길들이고 싶어도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와 똑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부모도, 연인도, 사랑하는 아이도 나와 같을 수는 없다. 아마도 타인을 길들이려고 애쓸수록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상대방이 나와 너무나 다르다는 절망적인 사실만 깨닫게 될 것이다.

 

-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내 마음을 다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나와 가장 가까운 만큼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일을 척척 다 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표현하지 않는데 누가 그걸 알겠는가. 그러니 상대에게 허망한 기대를 품고 실망하고 상대를 미워하기를 반복하는 대신,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흔한 연인의 대화를 예로 들어보자. 여자 친구는 남자에게 "내일도 야근이야?"라고 묻는다. 속으로는 '내일은 만난 지 1주년 되는 날인데, 저녁에 만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남자 친구를 시험하는 것에 불과하다. 차라리 "내일 우리 1주년인데 저녁에 만나서 조촐하게 기념할까?"라고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게 좋다. 그러면 서로 오해할 일도 줄어들어 덜 다투고, 싸우느라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되고 상처 입을 일도 줄게 될 테니까 말이다.

 

-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그 어떤 힘도 행사하지 않고 상대를 그저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 주는 것. 그의 생각과 행동들이 그가 살아온 세월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과거 전부를 끌어안는 것. 그러므로 그의 못나고 초라한 모습도 껴안는 것. 그렇게 아무 조건 없이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야말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 하나는 뭔가 더 노력하지 않아도, 뭔가를 숨기지 않아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일이야말로 그 행복에 다가가는 지름길이다.

 

- 관계가 틀어져 마음이 상하면 우리는 으레 상대방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 최선을 다한 나에 비해 상대방은 별로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다. 결국 쌓여 있던 불만이 폭발하며 상대방에게 "너 때문이야"라는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나 남 탓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끝도 없는 싸움을 부를 뿐이다.

스탠퍼드 의과대학의 데이비드 번즈 명예 교수는 '어떤 태도가 결혼 생활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가'를 밝히기 위해 여러 연구를 진행한 끝에 놀라운 결과를 발견했다. 연령과 빈부의 차이, 학력과 자녀의 유무, 결혼 생활 기간, 섹스의 비도수, 취미 활동, 가사 분담 정도 등의 여러 변수를 놓고 실험했지만 그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부 사이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가장 주요한 요인은 바로 '남 탓' 이었다. 서로 상대방 탓만 하는 부부는 관계 만족도 측정표를 작성하고 3개월 뒤 다시 작성했을 때 관계가 더 나빠졌다. 반대로 상대방을 탓하거나 그를 바꾸려고 하는 대신 스스로 변화하는 데 집중한 사람들은 부부 관계 역시 괜찮았다.

그렇다고 '자기 탓'을 하란 말은 결코 아니다. 자기 탓은 죄의식과 불안, 우울 증세와 자포자기를 불러온다. 게다가 아무리 애써도 더 악화되기만 하는 상황을 보며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그 또한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와의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꼴 저 꼴 보기 싫다"라며 관계를 끊어 버린다. 불편한 사람을 자기 인생에서 치워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홧김에 관계를 끊으면 더 이상 그를 안 볼 수는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남는다. 그와 만나며 기분 나빴던 순간들이 불쑥불쑥 떠오르고, 그때 입었던 상처들은 마음 한편에 소그란히 남아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힌다. 나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사람은 몇 년이 지나도 그 회사 근처만 가면 불편한 기분을 어쩌지 못하고, 남자와 헤어진 여자는 그와 다녔던 공간에 다시 가기를 꺼리게 되고, 홧김에 보지 말자고 한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되면 잠잠했던 마음이 자꾸만 소란스러워진다. 그 사람과 관계하며 쌓인 기억들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내 마음을 찌르는 것이다.

 

- 남 탓, 내 탓을 하며 싸우지 않을 방법은 없는 걸까? 결국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는 한 고통스러운 관계는 견디는 것밖에 답이 없는 걸까? 아니다. 방법은 있다. 마음의 상처를 더 입기 전에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두면 된다. 그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한테 묻는다. 심리적 거리를 둔다고 해도 얼굴을 계속 봐야 하는데, 그래 봐야 어색해지기만 할 뿐 그게 무슨 해결책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불편한 상황에서 즉각적인 반응을 하지 않고 일단 거리를 두면 서로 감정이 폭발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한발 물러나서 조금은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여유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화가 가라앉으면서 불필요한 싸움을 일단 막을 수 있게 된다.

거리를 두는 것은 아예 상대방에 대한 마음을 닫아 버리고 그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는 것이 아니다. 거리를 둔다는 것은 슬프지만 그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존중하는 것이다. 즉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거나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상대방을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절하게 거리를 둘 수 있으면 관계를 단절할 필요도 없고, 상대를 향한 복수심을 키울 필요도 없어진다. 오히려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에서 빠져나와 홀가분해짐으로써 비로소 편안함을 되찾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일정한 거리를 둔다는 것은 불필요한 적대적 상황을 피하고, 상대방에게 휘둘리지 않음으로써 감정적인 소모를 줄이는 현명한 선택이다.

예전에 나는 한동안 시어머니가 미워서 잠을 못 이룬 적이 있었다. 그 감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한 달 정도 불면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시어머니를 떠올리면 이내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치밀었다. 이러다 어떤 식으로든 사고를 치게 될 것 같아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시어머니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치고 있는 거지?' 나는 내가 더 노력하면 시어머니가 나를 예뻐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였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나를 인정해 주기는커녕 늘 못마땅한 표정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런 시어머니를 이해하려고도 해 봤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그 사이에 미움은 커져만 갔다. 나는 그날 이후로 시어머니를 이해하기를 포기하고 시어머니가 절대 바뀌지 않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저녁밥을 먹고 나면 과일을 깎아 드리곤 했는데 예전에는 나도 그 옆에 앉아서 과일을 먹었다. 그런데 그 뒤로는 "어머니, 과일 드세요. 저는 지금 속이 안 좋아서요"라고 말하곤 방으로 들어가 내 할 일을 했다. 시어머니와 부딪힐 일을 자연스럽게 조금씩 줄여 나간 것이다. 남들에게는 그게 별일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늘 욕을 먹으면서도 시어머니 곁을 지켰던 나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일들이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니 싫든 좋든 매일 얼굴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어머니와의 거리 두기를 늘려 갈수록 더 이상 시어머니에게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며느리로서 할 도리만 하자 마음먹고 최대한 나만의 시간을 늘리는 데 집중하자 예전에는 시어머니가 조금만 뭐라고 해도 울컥했는데 "네, 네" 하며 한 귀로 흘려 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게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잠도 편안히 잘 수 있게 되었다.

 

-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과 그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으며 그 공간 사이에 반응을 선택할 힘과 자유가 있다. 그 선택 속에 나의 성장과 행복이 존재한다.

 

- 시어머니가 미웠을 때 내가 밤에 잠을 설칠 만큼 괴로웠던 까닭은 이 어긋난 관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내일도 모레도 그런 시어머니를 매일 봐야 한다는 게 너무 끔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일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더 커져만 갔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감정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거리를 두자 똑같은 비난을 들어도 그것이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았다.

 

-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하라.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이라는 말을 남겼다. 서로 덜 상처 주면서 살고 싶다면, 관계로 인해 더 이상 괴롭지 않고 행복해지고 싶다면 거리를 두어라.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것은 결코 서운해할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서로를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만드는지는 경험해 보면 바로 깨닫게 될 것이다.

 

- 너무 가까워서 서로 상처 입지 않으며, 너무 멀어서 외롭다고 느끼지 않는 최적의 거리는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고슴도치처럼 한두 번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가 상처를 입으면 아프기 때문에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게 된다. 다시금 시도했다가 또 다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처 입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그 누구와도 가까워질 수 없고,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을 위해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나 자신이 너무나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물방울처럼, 유리처럼 투명해지는 일이었다. 스스로 속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겁내지 않는 상태.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말하는 상태.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건 대단히 가슴 떨린다. 왜냐하면 거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했는데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정말 안 되는 일이니까. 그제야 나는 용기란 한없이 떨리는 몸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걸 알게 됐다."

김연수의 <지지 않는 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를 지키고,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용기를 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거리를 두 자고 했다가 서로 서먹해지기만 한다면, 오히려 관계가 더 어긋난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러나 한번 용기를 내 보라. 거리를 둔다는 것은 서먹해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 안에 존중이 살아 숨 쉬는 한 우리는 거리를 둠으로써 오히려 관계가 더 좋아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에서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가 무엇을 하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무관심해지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사랑하는 그가 정말로 잘못된 길로 간다면 말려야 한다. 그에게 왜 그 길로 가면 안 되는지 충분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최종 선택은 그의 몫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곁에는 늘 내가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거리 두기다. 서로를 진정 소중히 여기기에 꼭 해 줘야 하는 것이 바로 거리 두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설령 또 한 번 상처 입을지라도 용기를 내어 보라.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는 법을 익히는 것이다.

 

- 생후 7~8개월경부터 아이는 엄마가 옆에 있어야만 안심하고 엄마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는 것을 못 견디는데 이것을 '분리불안'이라고 한다. 분리불안은 3세까지 지속되는데 이때 심한 아이들은 엄마가 화장실에만 가도 울어서 아이와 함께 화장실에 들어가거나 문을 열어 놓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 늘 엄마가 옆에서 반응을 보여 주고 안심시켜 주면 아이는 자신이 혼자 놀고 있어도 엄마가 어디 도망가지 않고 내 옆에 있어 줄 거라는 믿음, 즉 '기초적 신뢰(Basic Trust)'를 다지게 된다.

 

- 혹시 이 상황이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세상은 원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도 화가 나는 것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기대했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할 권리가 있다. 그래서 단지 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내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벌컥 화를 내며 상대방을 바꾸려고 해 봐야 그는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만 나빠질 뿐이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무시당한다고 생각해서 상처를 입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므로 화가 날 때는 절대 바뀌지 않을 부분에 대해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해도 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으며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화가 났는가? 그럴 때는 감정을 통제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화를 누그러뜨려야 한다. 갈등 상황에서 잠시 물러나 산책을 하거나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스스로 화를 진정시키는 법을 익히게 되면 이후의 상황에서도 흥분하지 않고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이 자신을 화나게 했고,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를 찬찬히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아무리 나를 화나게 만들었어도 내가 그에게 아무렇게나 화낼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다. "누구든지 화를 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정도로,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목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화를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처럼 시간이 걸리더라도 올바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그와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왜 화가 났는지, 무엇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최대한 상대를 존중하며 이야기해야 한다. 이때 나를 화나게 하는 말이나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어 "당신은 그랬어야 했어(Should)"라는 식의 비판보다는 "당신이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wish)"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좋다.

한계를 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내가 참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상대방에게 얘기하고 되도록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상대방은 절대 알아서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 누구에게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고, 그들의 삶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인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너무 일찍 배운다. 핵가족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아이들은 너무 일찍 부모 혹은 가족을 떠나 사회로 내던져진다. 한 살도 안 되어 베이비시터나 양육 기관에 맡겨질뿐더러 유치원 말고도 여러 학원을 다닌다. 즉 주 양육자가 끊임없이 바뀌는 상황을 너무 일찍 경험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아이들은 엄마, 아빠만큼이나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고 그들에게 잘 보여야만 자신이 버림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부모도 매일 붇는다. "오늘 선생님께 칭찬받았니?", "친구들이랑 잘 지냈고?", "발표는 잘했어?" 그러면 아이는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돋보여야 하고 비난받으면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설령 짧은 시간밖에 함께하지 못한다 해도 아이에게 "잘못해도 괜찮아, 너는 충분히 사랑스러운 아이야"라는 말을 해 주거나 아이가 그렇게 느낄 수 있도록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부모마저 아이가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했을 때만 칭찬하는 경우, 아이는 부모님 마음에 들기 위한 행동만 골라서 하려고 든다. 더 나아가 엄마, 아빠의 관심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부모가 싫어하는 것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을 기회를 애초에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부모의 높은 기대에 완벽히 부응하기란 불가능하다. 결국 아이는 자신이 실망만 일으키는 존재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는다.

 

- 사노라면 우리의 희망과 상관없이 불행한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게 인생이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불행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이리저리 애를 써도 상처를 일으키는 사건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은 세상이 상처를 주기 때문에 벽을 쌓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음의 감옥을 만든 것은 자신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적은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이 믿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깨달았어. 모든 것은 결국 어느 정도는 '그러면 좀 어때'라는 것을. 오늘 할 일을 다 못했어. 그럼 어때. 차가 잘 안 나가. 그럼 어때. 돈이 별로 없어. 그럼 어때. 부모님은 날 별로 사랑하지 않은 것 같아. 그럼 어때. 무슨 말인지 알겠지? 해방되는 기분이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내 방식이 될 거야."

치료가 끝난 한 환자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죠?"라고 묻자 나는 그녀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지금껏 당신의 주인은 과거였지만 이제부터는 당신이 주인이니까요. 가장 자신다운 선택을 하는 것, 그게 정답이에요."

 

-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자존감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것에 별문제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존감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자존감이 낮거나 어떤 이유로든 현재 자존감이 많이 낮아진 상태일 확률이 높다.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얘기를 별로 하지 않는데 비해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언급하며 강박적으로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 자존감을 높이는 법

1. 작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할 것

: 내가 뭔가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느끼는 것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자존감의 요소 중 그나마 스스로 노력해서 높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효능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급한 마음에 처음부터 대단한 걸 보여 주겠다는 생각으로 목표를 무리하게 잡으면 안 된다. 쉬운 일부터 시작해서 좀 더 어려운 일에 도전해야 매일 성취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고 그런 소소한 성취감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 자신감이 생긴다.

2. 단점을 감추거나 극복하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 것

: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단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단점을 기꺼이 인정하고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단점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그와 상관없이 장점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다. 또 그들은 장점을 더 키워 나가는 것이야말로 단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임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단점을 감추거나 극복하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마라.

3. 남들에게 너그럽듯 자신에게도 조금만 더 너그러워질 것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에게만 너무 가혹하고 혹독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남들에게 너그럽듯 자기 자신에게도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틀릴 수 있다. 실패할 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 자체가 부족하거나 결함이 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완벽할 수도 없고 우리가 모든 일을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고 자기를 미워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당장 근거 없는 자기 비난을 그만두어라. 당신은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다.

 

- 그들은 자기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얼마나 아파할지는 관심 밖이며, 그들에게 타인은 열등감과 욕구 불만을 해소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모멸감을 느끼고 상처받는 것을 오히려 즐긴다. 그래서 숨기고 싶은 과거나 학벌, 외모 등 일부러 상대의 약점을 건드려서 분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 부당한 비난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리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도 수치심과 모욕감에 부르르 떨면서 분노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무리 억울해도 결코 상대방의 도발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그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은 잠시 이성을 잃었다가도 중심을 잡는다. 그러고는 내용이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거부권을 행사한다. 부당한 비난에 휘둘려 말도 안 되는 싸움에 말려드는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사실 화풀이를 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 객관적인 평가일 리 만무하다. 게다가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건 그의 생각일 뿐이다. 설령 비판의 내용이 옳다고 해도 화풀이를 하려고 약한 사람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는 것은 나쁜 행동이다.

 

- 애초에 잘못은 노골적으로 상처 주는 말을 한 사람에게 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내 잘못이 아닌 것을 떠안고 괴로워할 이유는 없다. 그러므로 상대의 잘못은 다시 그에게 돌려주고 그의 비난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그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자 해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더 이상 나를 평가할 자격이 없는 사람의 도발에 넘어가 상처 입고 괴로워하지 마라. 노골적으로 상처 주는 사람들이 나를 만만하게 보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나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 상황에서 나를 지킬 것은 오직 나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무시당해서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것을 상처라고 이름 붙이지는 않는다. 만약 부당한 대우에 상처를 입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이 당신을 아무렇게나 휘둘러도 좋다고 허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상대방이 괴롭히면 괴로워하고 상처를 주면 주는 대로 다 받는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그러므로 부당한 비난에 휘둘려 상처받았다고 말하지 마라. 그 어떤 순간에도 부당한 비난은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지 당신이 받을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인 관계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통제권은 당신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를 가까이하고 누구를 멀리할지, 누구와의 관계에 더 힘을 쏟을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내가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면 정말 아플 것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작정하고 상처를 준다 해도 그것은 내가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소중한 나를 지키기 위해 상처 유발자와 관계를 단호하게 끊는 것도 고려해 볼 일이다.

 

-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 나 고통을 반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릴 적 받은 상처를 미처 해결하지 못한 채 자라난 사람이 자기 아이나 배우자를 상대로 그 상처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어릴 적 불행했던 상황을 똑같이 재현함으로써 그때 억눌렸던 감정이나 욕구들을 해소하고 보상받고자 하지만 결과적으로 불행을 반복하는 셈이다. 이것을 우리는 '대물림'이라고 부른다.

가족 문제가 유독 힘들고 풀기 어려운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릴 적 가족에게 입은 상처를 현재의 가족에게 되풀이하고 있는데도 많은 이들이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문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고 만다. 어떻게 하면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할아버지에서 아버지에게로, 아버지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아들이나 딸에게로 이어지는 불행의 반복을 막을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상처를 입은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상처를 어떻게 보느냐이다. 어떤 사람들은 똑같은 일을 당해도 상처라 얘기하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상처라고 한다. 누가 나를 해코지했을 때 그것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스크래치가 났을 뿐이야. 괜찮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즉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보다 우리가 상처를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현재와 미래는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으면 자기가 나쁜 짓을 해서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부모들은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아이에게 상처를 준 것인데 말이다. 아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그들도 부모는 처음이었고, 그래서 서툴렀을 뿐이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우리에게는 과거를 바꿀 힘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삶과 부모와 조부모의 삶을 관통하는 고리를 알게 되면 적어도 그것을 몰라서 상처를 더 키우는 사태는 막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가족 간에 도저히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한번 의심해 보라. 혹시나 나도 모르는 사이 대물림되고 있는 상처가 없는지를 말이다.

 

- 화목한 가정은 안 싸우는 가정이 아니라 갈등을 잘 해결할 줄 아는 가정이다. 갈등이 없는 집은 한 군데도 없으며, 그 갈등을 서로 모른 채 덮어 두거나 본체만체 살기로 작정하지 않는 이상 싸움은 피하기 어렵다. 그러니 갈등이 없으리라는 환상부터 버려라.

형제자매라고 해봐야 둘밖에 없는데 둘이 사이좋게 지내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애초에 너무 달라서 친하지 않은 형제자매도 있게 마련이다. 그럴 때는 굳이 사이좋게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게 좋다. "쟤는 참 나랑 안 맞아. 그런데 우리는 형제니까"라고 인정하며 형제 사이의 기본만 지켜 나간다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억지로 둘을 붙여놓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라고 강요할 때 생긴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아이들 앞에서 싸우는 것은 되도록 피해야 하지만 싸움 그 자체가 두려워 피해 버리면 갈등이 풀리기는커녕 더 깊어진다. 게다가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아이들은 부모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또 아이들은 엄마 아빠 사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가 공부를 못하고 착하지 않아서 부모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부모 사이의 갈등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말한다. "가족 간에 싸우지 않는 게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요한 건 잘 싸우는 법을 익히는 겁니다." 갈등이 생기면 빨리 그것을 인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로 애쓰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잘 싸우는 법이란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무엇을 양보하고 배려해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싸운다고 해서 무조건 불행하고, 싸우지 않는다고 해서 당연히 행복한 건 아니다. 서로 할퀴어 상처 주기 위해 싸우거나 너무 자주 다투는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갈등을 풀기 위해 싸우는 것은 꼭 필요하다. 갈등이 곪아 썩거나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에 말이다.

 

- 아내와 남편은 인간관계를 통틀어 가장 가까운 사이에 속한다. 그런데 그 관계가 '죽었다'라는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 그것은 서로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지만 서로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고 상대방에 대해 알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뻔뻔하게 말하곤 한다. 가족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고, 그들은 내가 필요로 할 때 언제든 달려와 줄 것이며,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고. 다만 사느라 바빠서 지금 잠시 서로에게 소홀한 것일 뿐이라고.

그러나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가족을 꾸리고 30년 넘게 살면서 무섭도록 공감하는 말이 하나 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우리들의 삶과 인간관계에 가장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무관심이다. 만약 '남편은, 아내는, 딸은 언제든 나를 이해해 줄 거야'라고 생각하며 관계 유지를 위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죽어 버린다. 관계야말로 관심을 가지고 제때 물을 주고, 항상 보살펴야 할 씨앗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는 노력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심지어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말하지 않는데 어찌 알겠는가. 우리는 모른다. 남편을 모르고, 아내를 모르며, 아이들을 모른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의 머릿속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래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대화가 더 필요한 이유다.

그제의 남편과 오늘의 남편은 다르다. 그제의 아내와 오늘의 아내는 다르다. 하루 사이에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게 됐는지 잠자코 있는 부부는 정녕 모른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물어야 한다. 당신의 걱정은 무엇이고 내가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상대방에게 말해 줘야 한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래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 대해 더 알아 가야 한다.

 

- 부모와 아이 사이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1. 아이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다.

: 부모들은 흔히 아이의 성공과 실패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금만 아이가 엇나가면 혼을 내고 똑바로 하라고 다그친다. 아이의 발달 상태를 살피고 각종 육아 서적들을 섭렵하고 정신분석 용어도 척척 쓰며 이론으로 무장한 엄마들은 아이의 미래에 대해서도 완벽한 플랜을 마련해 움직인다. 그런데 그처럼 똑똑하고 해박한 엄마들이 나에게 상담을 받으러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겨서 왔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엄마에게 문제가 있었다. 물론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항변했다. 그녀가 놓치고 있는 것은 딱 하나, 사랑이었다. "다른 아이를 볼 때는 어떻게 하세요? 뭘 잘못하면 '아우 괜찮아'라고 해 주고, 뭘 잘하면 '아이고, 잘했다' 칭찬해 주죠? 그런데 왜 당신의 아이한테는 그러지 못하나요? 다른 아이에게는 반응을 해 주는데 정작 당신의 아이는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죠. 그런데 아이는 가르치기 전에 반응을 먼저 해 줘야 해요. 살 비비고 안아 주고 충분히 사랑을 줘야죠." 부모가 아이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다는 일념으로 아이를 판단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시하는 것은 충분히 사랑을 주고 난 다음이어야 한다. 아이는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해 나가면서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때 그 실수들을 용납하지 않거나 다음부터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부모 앞에서 아이는 위축된다. 그러므로 아이가 정말 잘 커 나가기를 바란다면 부모는 아이의 실수들을 따뜻하게 사랑으로 감싸고, 아이를 믿어 주고, 아이의 성장을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한다.

2. 워킹맘은 쓸데없는 죄책감부터 버려야 한다.

: 일도 완벽하게 하고 아이도 완벽하게 키우는 슈퍼우먼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때론 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고 때론 집안일이나 육아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그러니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다고 자책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괜한 죄책감에 시달리면 엄마나 아이 모두에게 좋지 않다. 애들 키우느라 일 못해서 걱정하고 일하느라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 전전긍긍하다 보면 결국 그 스트레스는 아이 앞에서 폭발하게 된다.

워킹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쓸데없는 죄책감은 버리고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꼭 해야 할 일과 안 해도 될 일을 구분하고 중요도에 따라 일을 처리해 나가며 어떤 것들은 과감히 생략하거나 버릴 수 있어야 한다. 퇴근하고 나면 엄마의 사랑이 고픈 아이와 놀아 주는 게 우선이다. 10~20분 아이와 집중해서 놀아 주고 나서 쌓여 잇는 집안일을 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집안일을 하루쯤 미룬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3. 아이를 잘 키우고 싶다면 '적절한 좌절'을 주어라.

작은 일이라도 혼자 힘으로 해내면 뿌듯한 성취감을 느낀다. 그 성취감은 더 어려운 과업에 도전하게 만들고 설사 실패한다 해도 다시금 도전할 용기를 내게 만든다. 그런데 부모들은 아이가 힘들어하거나 어려워하면, 아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빼앗아 대신해 버릴 때가 있다. 그처럼 뭐든 엄마가 해 주는 아이는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자기가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엄마부터 찾게 된다. 그리고 조금만 힘들어도 쉽게 무너지고 만다. 몇 걸음 더 걸을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주지 않고 얼른 안아 버리면, 그 순간 넘어지지 않을 수는 있어도 결국 혼자 걷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건강한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넘어지더라도 일어날 기회를 자꾸 주어야 한다. '적절한 좌절'을 일부러라도 줄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서는 연습을 충분히 해야만 아이는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와 위기도 자기 힘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의 좌절의 경험이 너무 적다. 아이가 원하면 어떻게든 아이의 짐을 들어 주려는 부모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풍족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자란 부모는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아이들이 바라는 것을 웬만하면 해 주려고 노력한다. 뭐든지 원하면 금방 가질 수 있게 된 아이들은 도통 인내할 줄을 모르며, 욕구 통제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땀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에 인내할 줄 모르는 아이는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게 된다. 반면 좌절을 겪어 본 아이는 조그만 거라도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너무 힘겨운 좌절은 위험하지만 적절한 좌절을 통해 인내하고 노력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아이에게 매우 중요하다. 부모는 힘없는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하지만 언젠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아이에게 필요한 힘을 길러 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4. 아이는 아이의 삶을, 부모는 부모의 삶을 살아야 한다.

: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을 넘어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관념을 가진 환자들이 종종 있다. 어린 시절 불행한 가족을 경험했던 사람일수록 좋은 부모 노릇에 대한 강박이 지나치다. 그들은 자신을 위한 잠깐의 휴식이나 여가를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을 아이에게 바쳐야 부모 역할을 다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지치고 힘든데도 억지로 웃으면 그게 정말 아이에게 좋을까? 아이는 엄마의 억지 미소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혹시나 자기가 뭔가 잘못해서 엄마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아닌지 불안해한다. 엄마가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닌가 싶어 자꾸만 눈치를 보기도 한다. 그래서 힘들 때는 차라리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하거나 기분 전환을 한 뒤에 아이를 보는 게 좋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면 부모 자신의 삶부터 챙길 줄 알아야 한다. 아이에게는 아이의 삶이 있고, 부모에게는 부모의 삶이 있다. 아이가 원하는 건 본인의 삶을 전부 포기한 채 자기에게 매달리는 부모가 아니다. 또 못다 이룬 꿈을 자기에게 전가하는 부모도 아니다. 부모가 자기 삶을 묵묵히 걸어갈 때 아이는 그를 보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한다.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 자신의 삶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옆에서 응원해 주고, 지치면 토닥여 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 아내와 남편이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일까?

1.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 것

: 우리는 종종 배우자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건다. 특히 어린 시절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컸던 사람들은 미처 해결되지 못한 불편한 감정들을 애꿎은 배우자에게 돌리고 그것을 다 감싸 안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우자를 원망하기도 한다. 물론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가 다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배우자가 아버지, 어머니 혹은 형제자매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즉 어린 시절 가족에게 바랐지만 못 받은 것을 배우자에게서 받아 내려는 마음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부부 관계가 힘들어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할 때는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상처받은 어린 시절의 내면 아이가 지금의 삶에 잘못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상대방이 절대 들어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면 자신의 과도한 기대를 낮추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다.

2. 그럼에도 비난은 하지 말 것

: 부부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방의 약점을 건드리는 비난의 말은 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학력이나 시댁 혹은 친정에 대한 비난, 상대방의 인격 자체를 모독하는 비난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그리고 화가 날 때는 잠시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서 화를 누그러뜨리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난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3. 서로가 '여자'와 '남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

: 결혼을 했다고 해서 여자이고 싶고, 남자이고 싶은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싶다면 상대방을 남자로 혹은 여자로 바라볼 수 있도록, 최대한 설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4. 새로움의 힘은 세다

: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부부가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같이 해 나가는 시간을 가지면 좋다. 그 활동이 꼭 비쌀 필요는 없다. 돈 한 푼 없이도 인생을 즐길 방법은 많다. 마음이 있다면 말이다.

5.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나'임을 잊지 말 것

: 예전에는 내가 행복하지 못한 게 남편과 결혼했기 때문이고 남편이 너무 바빠 가정을 돌보는데 소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남편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때 내가 그 행복을 만들 생각은 미처 못 했던 걸까. 내 아픔을 남편이 대신 겪어 주지 못하는 것처럼, 내 인생을 남편이 대신 살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내 행복 또한 남편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남편에게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 책임이 없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다.

 

- 30여 년 넘게 다른 문화에서 커온 그들이 무조건 시댁이나 처가의 문화에 맞추라고 해서 따라야 할 의무도 없거니와 아무리 맞추려고 노력해도 다 맞출 수는 없다. 하물며 내가 낳은 딸도 내 맘에 안 들 때가 있는데, 며느리가 어떻게 내 마음에 꼭 들겠는가.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가 같이 살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내 아이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우리 집과는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새 가족을 맞이할 때는 '오픈 마인드'가 중요하다. 서로 다른 것들이 동화되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선 낯선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나 사위가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 그리고 우리 집 방식만 옳다는 고집을 버리고 며느리나 사위의 좋은 점이 있으면 그것을 '쿨'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게 서로 맞춰 가려고 노력하되 그 목표를 아들이나 딸 같은 관계를 맺는 데 두지 않기를 바란다.

 

- 사람들은 독립은 좋은 것이지만 한편으로 관계가 멀어지는 슬픈 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녀의 독립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게 아니라, 관계가 성장하면서 서로의 역할이 달라지는 과정의 시작일 뿐이다. 이제 자녀는 독립해서 자신의 가정을 일구어야 한다. 그때 부모가 할 일은 절대적인 보호자 역할에서 벗어나 든든한 베이스캠프가 되는 것이다. 어른이 된 자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베이스캠프다. 실패하거나 좌절했을 때 잠시 돌아와 편안히 쉬면서 위로를 얻는 곳.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도전할 힘을 얻는 곳이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베이스캠프인 것이다.

 

- "어머니는 기대야 할 존재가 아니라 기대는 것을 불필요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다." 미국의 작가 도로시 캔필드 피셔의 소설 <며느리>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요약해 놓은 문장이다.

 

- 법정 스님은 인연을 맺는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 진정한 인연과 스쳐 가는 인연을 구분해서 인연을 맺어야 한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인연을 맺도록 노력하고, 스쳐 가는 인연이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려야 한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헤프게 인연을 맺어 놓으면 쓸 만한 인연을 만나지 못하는 대신에 어설픈 인연만 만나게 되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인연을 맺음에 너무 헤퍼서는 안 된다. 옷깃을 한번 스친 사람들까지 인연을 맺으려고 하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적인 일이다."

 

- 누군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면 그가 원하는 것은 빛나는 조언이나 충고가 아니다. 다만 그는 곁에서 자기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할 일은 그저 곁에서 묵묵히 잘 들어 주는 것뿐이다. 아무리 상대방이 틀렸고 당신이 옳다고 생각되더라도 일단은 그의 입장에 서서 끝까지 들어 주어라. 어떠한 경우라도 상대방이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 비판하려 들지 마라. 상대방이 자기 문제를 스스로 잘 헤쳐나갈 것이라 믿고 기다려 줘야 한다. 그것이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길이다. 그래서 어쩌면 최고의 조언은 잘 들어 주는 것 그 자체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 모든 과정을 거쳐 완성되는 것이 바로 우정이다. 우정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아무 의미 없이 가장 자발적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다. 대부분의 만남은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지만 친구는 단지 좋아서 만난다. 우리는 친구가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며, 친구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같이 성장해 나간다. 그래서 좋은 친구는 지금은 보잘것없어도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 안의 가능성을 알아봐 주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다. 내 곁에 있으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사람인 것이다.

 

- 친구와의 우정을 돈독하게 다지기 위해 지켜야 할 것들이다.

1. 절대 친구를 바꾸려고 하지 마라

: 아무리 좋은 얘기도 반복해서 들으면 지겨운 법이다. 모두 친구를 위해 하는 말이겠지만 수차례 지적하며 단점을 고치라고 강요하면 관계만 나빠질 뿐이다. 만약 나쁜 남자에게 끌려다니는 친구가 있다고 해 보자. 아무리 말려도 친구는 자기 마음이 끝날 때까지 계속 나쁜 남자에게 끌려다닐 것이다. 친구로서 더 중요한 역할은 그가 남자에게 상처받고 돌아왔을 때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것이다.

친구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의 단점과 잘못을 어느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어야 한다. 나의 단점을 친구가 받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2. 친구 숫자에 연연하지 마라

: 많은 사람들이 친구가 많은 이를 부러워한다. 그래서 내향적인 성격을 외향적으로 바꾸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성격과 맞지 않은 방식으로는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해 나가기 힘들다. 친구 많은 사람이 부럽다고 억지로 사람들을 더 만나 봐야 스트레스만 가중될 뿐이다. 그러니 친구 숫자에 연연하지 마라.

3. 친구의 비밀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 누구에게나 너무 아프거나 부끄러워서 감춰 왔던 비밀이 있는 법이다. 우리는 보통 그런 비밀을 매우 친한 친구에게만 털어놓는다. 비밀을 알아도 친구는 나를 멀리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봐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친구가 나를 위로해 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관계든 마찬가지지만 친구 관계 역시 유지하기는 어려워도 깨지는 건 한순간이다. 그러니 친구의 비밀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고 지켜주어라. 아무리 세상이 비밀은 없다지만 입이 가벼운 사람은 특히 친구를 만들지 못하는 법이다.

4. 경조사는 꼭 챙겨라

: 장례식은 죽은 자를 잘 보내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남겨진 자들이 해묵은 감정들을 풀어내는 자리이며 그들이 앞으로도 잘 살아갈 힘을 얻는 자리라는 것을. 조문객들은 죽은 사람과 남겨진 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끌벅적 나누며 상을 당한 사람들의 슬픔을 나눠 가지는 중이라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자리를 결국 축제가 된다는 것을. 그제야 나는 왜 그렇게 장례식장이 떠들썩하고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 경사도 되도록 챙겨야 하지만 조사는 반드시 챙기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늘 말한다. 너무 힘들고 슬플 때 친구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나는 그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장례식장에 못 가게 되면 꼭 전화나 문자를 통해서라도 옆에 있다는 걸 알게 해 줘야 한다.

5. 좋은 친구를 만나고 싶다면 먼저 좋은 친구가 되어라

: "좋은 친구를 얻으려면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나의 벗이 될만한가 재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친구라고 불릴 만한지, 부족한 점은 없는지 살피라는 말이다. 내 부족한 면을 채우겠다는 욕심으로 친구를 구하면 절대 진정한 친구를 얻지 못한다. 좋은 사람 옆에는 좋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법이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 다음은 이상한 사람들을 유형별로 나누고, 그에 맞춰 당신이 알아 두어야 할 대응 방법을 정리한 것이다.

1. 질투와 시기심이 강한 사람

: 그들은 속으로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없는 거야?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돼?'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대할 때는 가급적이면 자랑을 삼가고 겸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다. 굳이 그 사람의 시기심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또 그들이 가진 장점을 칭찬해 주면 그들의 공격성이 많이 수그러든다.

그렇게 비위를 맞춰 주는 일에 신물이 날 지경이라면 그들이 감히 시기하지도 못 할 만큼 높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큰 성취를 이루어라. 사람들은 보통 배경이나 능력이 비슷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끼지, 자기보다 월등한 조건을 갖춘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기심이 강한 사람을 피하려면 더 높이 올라가 버리는 것이 그에게 휘둘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물론 터무니없는 시기와 질투를 받으면 화가 나게 마련이다. 게다가 마음을 독하게 먹지 않으면 시기심에 가득 찬 말에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방이 상처 주려고 마음먹어도 내가 상처를 안 받으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언제든 기억하기 바란다.

2.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

: 그나마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길은 그의 이야기를 최대한 잘 들어 주는 것이다. 혹여나 불평꾼에게 충고나 격려를 하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만두어라. 그들은 자기 이야기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여 주기를 바랄 뿐이니까. 그러면서 은근히 "뭐 그렇다고 꼭 나쁜 것만도 아니야" 하며 다른 관점을 제시해 주는 것도 좋다.

3. 지독한 나르시시스트

: 나르시시스트를 대할 때는 그의 장점을 부각해 주되, 지적 사항에 대해서는 틀렸다고 말하거나 고치라는 식의 직설적인 화법은 피하고 달래듯 말하는 화술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참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그런데 이렇게 하면 더 괜찮을 것 같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라고 말하며 가급적 상대가 결정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르시시스트들은 타인에게 통제당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4. 아첨꾼

: '저것도 참 대단한 능력이다'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만일 그의 행동이 너무 신경에 거슬려서 못 견디겠다면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회사에서 약자에게는 어느 정도의 처세술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그것을 극도로 혐오하면 인간관계에 있어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5.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

: 그런 사람과는 가급적 대화를 피하는 것이 좋다. 대화를 계속 진행해 봐야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 외에 남는 것이 없다.

6. 습관적 회의론자

: 이들을 끌고 나갈 때는 괜한 희망을 심어 주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오히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낮춰 주는 편이 낫다. 만일 동료가 습관적 회의론자라면 "같이 잘 만들어 보자"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

 

불손한 자, 고집스러운 자 그리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언제나 예의로 대하라는 말이 있다. 그들과는 충돌하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뜻이다. 당신이 그들을 아무리 바꾸려고 노력해 봐야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한다는 마음에 괜한 충고나 조언을 건네지 마라. 그리고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그들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비판하지 마라.

 

- 다음은 회사에서 마주치기도 싫은 사람들을 대하는 몇 가지 방법이다.

1. 일부러 적을 만들지는 마라

: 싫으면 꼭 티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상대방이 그것을 알아채고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말이다. 심지어 그것을 솔직하고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일 목적하는 바가 싸움이라면 싫은 티를 내도 좋다. 하지만 싸움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라. 그렇다고 싫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싫어도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지는 말라는 말이다. 안 그래도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회사에서 일부러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2. 싫은 사람과 그와 같이 하는 일을 구분하라

: 싫은 사람과 일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지만 일은 일일뿐이다. 일에는 최대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좋다. 일을 망칠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다. 만약에 바로 위의 상사를 싫어한다고 해 보자. 그를 싫어하는 것과 역할을 다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무리 상사가 싫어도 팀원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해야 하고, 상사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는 다해야 한다.

3. 하얀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다

: 직장에서는 결코 솔직함이 최선은 아니다. 특히 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 너무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면 갈등이 격화되기 쉽다. 그럴 때 약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하얀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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