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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김혜남 저 / 출판사 갤리온)

by hyeranKIM 2021.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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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사는 게 재미있는 이유

120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 베스트셀러 작가 김혜남이 <서른 살이 심리학에게 묻다> 이후 7년 만에 펴낸 최신작. 이 책에는 그녀가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깨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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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나는 단지 달라진 게 있다면 내 미래가 불확실하고 현재가 조금 불편해진 것밖에 없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내가 왜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망치고 있는 거지?'

당시 나는 피곤하면 오른쪽 다리를 조금 끌고, 글씨를 쓰는 게 힘들긴 했지만 환자를 진료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 중간중간 쉬어 준다면 별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왜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침대에 누워 오늘을 망쳐야 하는가. 처음에는 루게릭 병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만약 그 병이었다면 5년밖에 못 살고 죽는 거였다. 그러니 루게릭 병이 아닌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 파킨슨병 치료법이 아직은 없지만 계속해서 연구 중이니 앞으로 개발될 수도 있는 거였다. 그리고 내 뇌에서 도파민 분비 세포가 80퍼센트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20퍼센트는 남아 있다. 즉 파킨슨병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내 노력 여하에 따라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

 

- 이 길이 맞을까 저 길이 맞을까,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어떤 길로 가는 게 맞을지는 모르지만 내가 걸어간 길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나의 몫이다. 배우자를 찾는다고 했을 때 그가 나와 맞을지는 누구도 모르는 거다. 어쨌든 그와 결혼해서 살아 봐야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있고 설령 잘 안 맞아도 배우자를 내 남편 혹은 내 아내로 만들어 가는 건 내 몫이다. 물론 선택한 길이 틀릴 수도 있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낭떠러지에 도착할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두려워 한 발짝도 떼지 않으면 영영 아무 데도 못 가게 된다.

그리고 내 경험상 틀린 길은 없었다. 실패를 하더라도 실패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면 그것은 더 이상 실패가 아니었고, 길을 잘못 들었다 싶어도 나중에 보면 그 길에서 내가 미처 몰랐던 것들을 배움으로써 내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 때론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 때문에 화가 난 적도 있지만 분노의 힘이 나를 살게 한 적도 있다. 그러므로 가장 빠른 직선 코스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버린다면 한 발짝을 떼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이유는 없다. 남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 봐야 그 기쁨은 같이 나눌 사람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더 슬픈 일이다. 그러니 어떤 순간에도 삶을 포기하지 말고 용기 내어 일단 한 발짝만 내디뎌 보라.

 

-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 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 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폐허 이후' 도종환

 

-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은 꼭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길도 있을 수 있는데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실패했다고 단정 짓는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문이 닫힌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다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니 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좌절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정말이지 가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인생이고 끝까지 가 봐야 아는 게 인생이다.

 

- "나는 삶을 헤쳐 나가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을 돌아보며, 아직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겁니다. 내 경우엔 운 좋게도 뇌를 다치지 않아서 여전히 머리를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 크리스토퍼 리브

 

-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인권 운동가로 27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야만 했던 넬슨 만델라가 말했다.

"감옥에 다녀온 뒤로는 원할 때 산책할 수 있는 일, 가게에 가는 일, 신문을 사는 일, 말하거나 침묵할 수 있는 일 등 어떤 작은 일도 고맙게 생각했다."

나도 예전에는 감사할 게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욕심으로 나를 다그치며 앞으로만 달려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보니 나는 참 가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파킨슨병을 앓으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도 나는 가진 게 많다. 그래서 감사한 일도 너무나 많다. 어쩌면 이 복잡한 세상에서 내가 별 사고 없이 살아온 것 자체가 감사하고 다행한 일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면 기적이 별게 아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기적일지도 모른다.

 

- 1. 단점을 애써 고치려 하지 말고 그냥 장점에 집중할 것

2. '마이크로 월드'를 발견하다

나는 바쁘게 살면서 참 많은 것들을 휙휙 지나쳐 갔다. 그런데 병으로 인해 천천히 걷거나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발견했다. 세상을 구석구석 바라보며 물방울같이 아주 사소한 것에도 세상의 이치와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구로야나기 테츠코의 소설 <창가의 토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어쩌면 세상에서 진실로 두려운 것은 눈이 있어도 아름다운 것을 볼 줄 모르고, 귀가 있어도 음악을 듣지 못하고 마음이 있어도 참된 것을 이해하고 감동하지 못하며 가슴의 열정을 불사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닐까."

3. 겸손을 배우다

예전 같으면 내가 옳기 때문에 그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을 텐데 지금은 기다린다. '저 사람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구나. 내가 더 노력하고 저 사람도 준비가 되면 받아들이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예전 같으면 내 한계도 모른 채 나 잘난 줄 알고 살았을 텐데 이제는 그 한계를 알기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실수도 쉽게 인정하게 되었다. "그건 내 실수다. 당신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데 내가 너무 서둘러서 당신이 상처를 받은 것 같다"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4. 유머의 힘은 역시 세다

 

- 그렇게 1년 동안 죽을 것 같이 힘든 상황을 견디고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이제 내 인생에 버텨야 할 날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나는 또 버티고 있었다. 내 맘 같지 않은 첫 직장에서 인정받기까지의 날들을 버텨 내고 있었고 결혼을 깨 버리고 싶은 날들을 버텨 내고 있었고 마흔이 넘어서는 병으로부터 버텨 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게 버티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버틴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그것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왜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버틴다는 것은 그저 말없이 순종만 하는 수동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게 하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에 누워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게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버틴다는 것은 내적으로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나 모멸감, 부당함 등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외부에서 주어진 기대 행동에 나를 맞추면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아야 하는 매우 역동적이면서도 힘든 과정이다. 그래서 버틴다는 것은 기다림이라 할 수 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아 내는 것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오늘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이다.

 

- 그러고 보면 어떤 것을 이루는 과정에는 견디고 버터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버티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 일의 의미와 절박성을 깨닫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필요한 것들을 재정비하며 결국은 살아남는 법을 익히게 된다. 그러므로 버티어 살아남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폄하할 수 없는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이다.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항상 잘나가는 사람들이 자기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버티는 것이 답답하고 힘들겠지만 버티다 보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고 그러니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치지 말라고 말이다. 정말로 때론 버티는 것 자체가 답일 때가 있다.

 

- 무기력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외부 상황이 바뀌기만을 바란다. 상황이 확 변해서 무언가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상황을 바꿔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헛수고하는 건 아닐까? 맞다. 변하는 게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적어도 지금 무기력하게 서 있는 그곳은 탈출할 수 있고 가능성이 보이는 또 다른 곳에 닿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은 살아가게 되어 있다. 언니가 죽고 나서 나는 살면서 다시는 웃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몇 년이 지나고 웃음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다.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세상으로부터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최악의 상황에 놓인다 해도 우리에게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우리 자신의 선택권이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선택권이 있다. 무기력하게 누워서 천장만 보고 살 건지, 일단 밖에 나가 할 일을 찾아볼 건지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다.

 

- 누군가 시키면 하기 싫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싶어 하는데 명령을 받으면 그 주도권을 남에게 빼앗긴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이 명령을 내리고 통제를 가하면 그것을 자꾸만 벗어나고 싶어 한다. "봐,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 아니야. 난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자율성은 인간의 중요한 본능적 욕구 중 하나다. 타인의 간섭과 침입을 막고 내 영역을 지켜 인생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의사 표현도 바로 '싫어' 혹은 '안 해'다. 갓난아이는 배가 부르면 아무리 입에 우유를 넣어 주어도 고개를 돌리고 뱉어 버린다. 자고 싶지 않으면 죽어도 자지 않고, 조금만 불편하게 안아도 제대로 안으라며 자지러지게 울어 댄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이처럼 뭐든지 제멋대로 하려는 아이를 사회라는 테두리에 맞추어 나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과한 통제를 받으면 자율성에 심각한 손상이 생긴다. 말을 잘 들어야만 칭찬과 사랑을 주는 타인에 대해 극심한 분노와 애정을 동시에 느끼며 그 사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 사회적으로 보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내 안에서는 자꾸만 화가 치솟는다. 회사, 학교, 부모님, 남들의 눈 때문에 늘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나 자신이 싫은데,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조금이라도 통제하려고 들면 '통제' 그 자체에 예민해진다. 존중받기는커녕 남들에게 또다시 휘둘리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특히나 어릴 적 부모의 강한 통제 속에 자라난 아이는 어린이 되어 통제받는 것을 유달리 못 견딘다.

 

- 1년 넘게 상담을 하는 내내 그녀의 이야기에는 그녀가 없었다. 늘 그들에게 당하거나 그들과 있으며 겪는 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신의 인생인데 당신의 이야기가 없네요. 그들의 이야기밖에는요."

나는 그녀에게 그들의 역사를 읊는 대신 그녀 자신의 역사를 써 나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들에게 휘둘리고 끌려다니는 이야기 말고 그들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이야기 말고 그 와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녀는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야 하고 그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러느라 정작 내팽개치고 버려두었던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시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 후 그녀는 그들의 이야기를 줄여 나가기 시작했고 대신 그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2년, 그녀에게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조그만 카페를 차렸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친정 부모님과 시댁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었다. "너는 내 딸이고 내 며느리니까 당연히 내 뜻을 따라야 해"라는 그들의 목소리가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상황은 변한 게 없었다. 다만 바뀐 것은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녀가 그들의 역사 대신 자신의 역사를 써 나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자신의 역사를 써 나간다는 것, 그것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누가 나를 함부로 대하고 나를 자신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해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살아간다는 의미다. 친정 부모님의 횡포와 시부모님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애써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적당히 거절할 건 거절하고 무시할 건 무시하고 웃는 척이 필요할 땐 웃어 버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내 소중한 에너지를 다 써 버리는 대신 그것을 카페를 운영하고 내 삶을 살아가는 데 투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내 인생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통제 소재를 내 안으로 가져올 것.' 저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내가 맞춰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내가 저 일을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기 싫은 일을 할 때조차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거다', '내가 빨리해 주고 넘어가 버리는 거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즉 내가 그 일의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는 것이다.

 

- 부부 관계의 가장 큰 비극은 서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혼하고 1년만 지나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남편이 나를 아는 줄 알았다. 웬만한 일에는 일희일비하지 않지만 한편으로 내게도 여린 소녀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을, 이성적이고 차분한 편이지만 실은 내가 굉장히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남편이 당연히 아는 줄 알았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같이 살아왔으니가 말이다. 그런데 남편은 나를 몰랐다. 내 가슴속에 시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내색을 잘 안 했을 뿐 결혼하고 워킹맘으로 살면서 많이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남편은 그냥 내가 원래부터 통이 크고 대범한 여자인 줄 알고 살았단다.

생각해 보면 내 잘못도 크다. 시부모님과 시동생을 모시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나는 너무 괜찮은 척했다. 무엇보다 남편이 설마 내가 힘들어하는 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면서도 모른 척하면서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 남편을 원망했을 따름이다. 그런데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내 눈에는 남편이 지독한 워커홀릭으로 성공을 위해 가족의 희생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알고 보면 남편도 외로운 사람이고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둘 다 생활에 쫓기면서 너무 지쳐 집에 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단 쉬고 싶어 했고 상대방이 그 마음을 백분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다. 더 이상 서로를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그것은 점점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다.

 

-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결혼한 지 2주 된 부부, 2개월 된 부부, 2년 된 부부, 20년 된 부부를 상대로 서로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테스트했다. 그 결과 서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커플은 결혼한 지 20년 된 부부가 아니라 2주 된 부부였다. 왜냐하면 2주 된 부부는 '내 남편 오늘은 직장에서 뭐 하나?', '내 아내는 오늘 뭘 했을까?' 궁금해하고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다. 관심은 질문으로 이어지고 그에 답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조금 더 알아 간다. 하지만 20년 된 부부는 서로에 대해 묻지 않는다. '거 봐, 저 사람 저럴 줄 알았다니까', '저 여편네 또 잔소리하네'라고 생각하며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정작 서로에 대해 모를 수밖에.

사람은 안 변한다지만 나이를 먹고 세월이 쌓이면서 변하는 부분이 분명 있다.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아무리 안 변했다 치더라도 입맛은 변하기 마련이며, 시력도 변하고 뱃살도 나오고 체력도 예전 같지 않다. 그러니 5년 전 남편과 지금의 남편이 같을 수가 없고 10년 전 아내와 지금의 아내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나와 남편처럼 그동안 서로에게 쌓인 상처 때문에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까지도 어느 순간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끓어오르는 화를 참고 남편의 이야기를 그냥 듣기만 했다. 그러기를 몇 번, 어느 순간 남편은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어느 날부터인가 남편이 나의 일상을 물어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밥은 뭐 먹었어? 오늘은 어땠어? 괜찮아?" 그 후남편과 나는 다시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에 빠졌다. 그사이 변했지만 몰랐던 것들에서부터 오늘 하루 있었던 이야기 그리고 그동안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어릴 적 상처까지, 쌓인 이야기는 많았고 서로에게 하고픈 이야기도 많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 '사랑하니까 저 사람은 분명 내가 얘기 안 해도 알 거야'라는 생각은 틀렸다는 것을. 아무리 사랑해도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나에 대해 자구 알려 주어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을 차곡차곡 가슴에 쌓아 두는 대신 그 말을 밖으로 꺼내야 한다. 어제와 다른 나에 대해 얘기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절대 상대방을 다 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나 자신도 다 모른다. 그런데 상대방을 어찌 다 알겠는가.

 

-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 한계를 미리 설정해 두는 편이다. 관계를 맺게 되면 그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함부로 넘어서는 안 될 적정선을 만들고 지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친구 사이에 돈거래를 하지 않는다. 친구가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받지 않을 생각으로 줄 수 있는 만큼을 줘 버린다. 혹여나 받지 못하게 되더라도 마음이 상해서 우정에 금이 가지 않을 정도의 돈을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성격을 바꾸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에게 못하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유머가 없는 사람한테 유머러스해지라고 강요해 봐야 그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그가 못하는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처럼 한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관계를 잘 끌고 갈 수 있다.

 

- 정신 치료에서 자주 쓰는 말이 있다. "No comment is better than any comment." 굳이 풀자면 아무 말 안 하고 가만히 들어 주는 것이 그 어떤 말을 해 주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나미야 할아버지 말대로 사람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답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좀도둑일지라도 그저 내 말을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면서 "그렇다"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해 줄 사람이다. 하지만 듣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중간에 참견이나 비판을 하지 않는 것도 힘들고 듣는다는 자체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삶을 즐기려고 마음먹었다면 시간을 분배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해 가족에게 도움을 청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삶을 즐기려고 마음먹었다면 집에 가자마자 저녁 준비한다고 서두르기 전에 아이와 눈 한 번 더 마주치며 안아 주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삶을 즐기려고 마음먹었다면 출근하며 하늘 한번 쳐다볼 여유를 가지고 환자들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누군가 나에게 삶의 즐거움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 시절에 가졌던 죄책감과 피해의식은 나의 기쁨을 앗아 가고 나를 피곤하게 만들었으며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죄책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릴 시간에 삶을 즐길 아이디어를 내서 그걸 실천에 옮겼더라면 이렇게까지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아이를 하루 못 씻기고 재웠다고 해서 큰일 나지 않는다. 일이 많으면 시부모님 밥상을 못 차려 드릴 수도 있는 법이다. 남편에게 아이를 봐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해도 된다. 그렇게 하고 얻은 시간에 친구들을 만나 밀린 수다를 떨어도 좋을 일이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시간이 정말 없을까? 마음만 먹으면 끝없이 만들 수 있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러니 그 어떤 순간에도 삶을 즐겨라. '~해야 한다'라는 말을 줄이고, '~하고 싶다'라는 말을 늘려 나가는 것이 그 시작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고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 모든 게 재미없다고 말하는 당신, 혹시 꿈꾸기를 멈추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남이 뭐라 하든 정말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꿈이 없어서 삶이 지루한 게 아닐까? 지금 당장 이루지 못할 꿈이라고 냉큼 포기해 버리지 말고 그 꿈을 간직하고 이루기 위해 애써 보면 어떨까?

 

- 이제 사람들은 직접 만나고 부딪치는 것보다 스마트폰이라는 기계를 통해 연결되는 것을 더 선호하는 듯 보인다. 더구나 스마트폰을 통해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창을 몇 개 열어 놓고 올라오는 문자를 읽고 거기에 답을 남기면 그만이니까 이보다 더 편리할 수 없다. 그리고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심리적 안정감을 주며 자신의 메시지에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 것을 보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도 얻게 된다. 즉 외로움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스마트폰은 나와 세상을 연결해 주는 끈이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소통 수단인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원하기만 하면 수많은 사람들과 언제든 연결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외롭다고 말한다.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런데 외롭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사람을 만나면 피곤하다고만 한다. 왜 그러는 걸까?

현대사회는 속도와 확산의 시대다. 지구 한쪽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유행이 수초도 안 걸려 그 반대편에 도달한다. 더불어 사람들의 이동도 잦아지면서 관계에 있어서도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 많아졌다. 긴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 갈 겨를이 없어진 셈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든 짧은 시간에 상대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해진다. 즉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맡겨져 자란다. 바쁜 부모들은 아이의 양육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면서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지에 더 관심을 가진다. 아이들이 일찍부터 타인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에 무척 민감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해질수록 삶은 매우 불안정해진다.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에 대한 확신이 줄어들고 자꾸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타인의 요구에 순응해야 할 것 같은 상태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타인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면서도 타인의 평가를 두려워하고 동시에 자신을 통제하는 타인에게 분노하며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언제든 나에게 등을 돌릴지 모르는 타인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 결과 사람들은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다. 내 짝도 언제 마음이 돌아설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헤어질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 그가 떠나도 내 삶에는 아무런 여파가 없도록 말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깊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순간순간 보이는 이미지와 그때 느끼는 감성을 더 중요시하고 감각적이며 피상적인 관계만을 선호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젊은이들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이지만 실은 공허하고 외롭다. 더구나 상처가 났을 때 곁에서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약을 발라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 외롭게 하고 더 상처에 예민해지도록 만든다. 상처받기 싫어서 어느 누구도 깊이 만나고 싶지 않은데 그럴수록 더 상처에 예민해지는 아이러니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상처 없는 삶이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상처에 직면해 그것을 이겨 내려고 애쓰면서 조금씩 단단해져 간다. 굳은살이 박이면 소소한 아픔들은 그냥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굳은살이 있어야 더 큰 상처가 왔을 때도 그걸 이겨 나갈 힘이 생긴다. 하지만 상처를 계속 피하게 되면 굳은살이 생기기는커녕 아주 조금만 찔려도 죽을 것처럼 아파하게 된다. 상처 자체에 취약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상생활 자체가 버거워진다.

상처는 우리가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무언가 원하는데 그게 내 바람대로 되지 않을 때 상처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게 정말 합당한 것인지부터 생각해 보라.

 

-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를 지키는 법 들이다.

1. 외워 버려라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선택한 방법이다. 처음에 나는 시어머니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하거나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시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정말 왜 저러시는 거야?' 하며 짜증을 냈다. 시어머니를 이해하거나 상황을 논리적으로 납득하기 위해 무진장 애써 보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는커녕 자꾸만 화가 나고 시어머니가 너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절대 바뀌실 분이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외우기 시작했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하셔도 '우리 시어머니는 원래 저래'하고 인정해 버렸던 것이다.

"어차피 안 고쳐질 텐데 그냥 외워 버리세요." 외우다 보면 시어머니가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텐데, 저런 상황에서는 이런 행동을 보이실 텐데 하는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더 나아가 어떤 말을 하실지 예측이 가능해진다. 그 경지에 달하면 신기하게도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게 된다. 시어머니가 뭐라고 해도 "아, 예" 하며 은근슬쩍 넘기게 되고 시어머니가 곧 화를 낼 것 같으면 미리 선수쳐서 다른 이야기를 꺼내 갈등 상황을 피하게도 되었다. 그러려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나를 지키는 최소한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2. '~하는 척'이 필요한 때가 있다

3. 그가 나에게 상처를 주고자 해도 내가 받지 않으면 그만이다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비난에 화를 내는 것은 그 비난을 받을 만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주먹을 날리거나 상대에게 똑같이 화를 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럴 때는 선물을 받았다고 한번 생각해 보라.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면 돌려주면 그만이다. 누군가 나를 비난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게 부당하다면 그 비난을 받지 않으면 된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라도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 기분 나쁜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맨 처음 받는 것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를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므로 '느낌'을 상처로 남길지 그냥 상대방에게 돌려주고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다.

4. 더 이상 그가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당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다면 지금 그와의 관계를 풀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고 거기에 쓸 에너지를 당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써라. 기술을 연마하고 실력을 키우는 데 집중해서 그 사람 위로 올라가 버려라.

 

- 현대인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없다. 끊임없이 뭔가를 한다. 남들보다 더 빨리 가지는 못해도 뒤처지기는 싫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고,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검색하고 인터넷 뉴스를 보고 버스나 지하철에 앉아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거나 듣는다. 그야말로 쉴 새 없이 정보들을 쑤셔 넣는다. 그처럼 잠들기 직전까지 계속되는 자극으로 인해 뇌는 어느 순간 과부하에 걸려 두통을 호소한다. 뇌가 더 이상 자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에게 '멍 때릴'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불안함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못 견디기 때문이다.

하지만 밥을 먹으면 소화시킬 시간이 필요하듯 뇌도 쉴 시간이 필요하다. 여태까지 들어온 자극이나 머릿속에 쌓인 정보들이 소화될 시간이 있어야 한다. 뇌는 쉬는 시간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자극과 정보들을 내적으로 재배열하고 통합해 어떤 건 걸러내고 어떤 건 의미를 두는 등 사고를 형성한다. 그런데 뇌가 쉬지 못하면 끊임없는 자극에 반응하느라 지쳐 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답이 계속해서 떠오르지 않을 때는 그냥 그 문제를 잊어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뇌가 그 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들을 통합할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인생은 흘러가게 되어 있어요. 당신이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고, 당신이 스스로를 실패자로 보면 인생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시각 말고, 당신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그것부터 결정하세요."

 

- 충고는 기본적으로 '너는 틀렸다'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틀렸더라도 막상 그것을 지적하면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할뿐더러 청개구리처럼 엇나가고 싶어 한다. 나도 충고를 들으면서 엇나가고 싶은 마음을 느꼈었다. 그러니까 내가 충고를 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충고를 들었을 때 싫었기 때문이다. 내가 싫은 건 남도 싫은 법이다. 그리고 아무리 충고를 해 줘도 그 충고가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듣고 싶은 말만 듣고 결국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충고는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럼에도 누군가 잘못된 길을 간다고 하면 충고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사람이다. 소중한 사람이 불을 향해 뛰어든다는데 왜 말리고 싶지 않겠는가.

누군가에게 충고를 하고 싶다면 그를 내 생각대로 통제할 수 있을 거라는 환상부터 버려야 한다. 어차피 그는 당신의 충고를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난 후 조심스레 당신의 의견을 말해 주어라. 그리고 결정은 그에게 맡겨라. 그가 설령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나중에 그것을 후회할지언정 그것은 그의 몫일 뿐이다.

 

- 어른이 되어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나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누구나 부족한 사람이고 그래서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내 안의 상처 입은 아이를 안아 줄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그 아이는 멈추었던 성장을 계속하게 되는 거지.

 

- 완벽한 부모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그리고 부모로부터 자유로워져라. 부족하고 못난 부모를 탓할 필요도, 부모의 업적에 스스로를 옭아맬 필요도 없다. 부모는 자식이 걸어가야 할 길의 이정표는 될 수 있어도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또 과거로 돌아가 부모와의 해묵은 문제를 해결해야만 어른이 되는 게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과거에 어떤 상처를 입었든지, 자기 인생은 자기 책임이라고 인정하고 더 이상 과거에 휘둘리지 않기로 결심하는 일이다. 그리고 부모에게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 자식들이 자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부모의 목적이자 행복이다. 이는 누가 뭐래도 자명한 사실이란다. 그러니 자식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묵묵히 걸어가면 그뿐이다. 엄마는 엄마의 인생을, 아빠는 아빠의 인생을 살아갈 테니,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아가라.

 

- 너희들이 언젠가 내게 물었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가 진정한 사랑인지 어떻게 아느냐고.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지 누가 아느냐고. 그러니까 사랑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는 게 똑똑한 거 아니냐고. 그런데 운명의 짝은 불현듯 나타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만들어지는 거란다. 콩깍지가 걷혀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의 장점과 단점, 약점과 강점 모두 총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그래서 사랑을 한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온 사람을 껴안는 거니까.

그러니 사랑이 다가올 땐 거부하지 말고 온몸으로 껴안아라. 사랑을 할 땐 그 사랑에 미쳐 보아라. 사랑만큼 우리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일은 없다. 그러다 문득 사랑 때문에 힘겨운 날이 오면 이 시를 읽어 보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정현종, '방문객'

 

- 사실 사람들은 가깝지 않을수록 더 친절한 경향이 있다. 상대가 나와 가깝지 않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배려하고 원하는 것도 참으면서 의견을 조율한다. 갈등을 만들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야. 또 상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는 것도 비교적 쉽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실망도 적지. 반대로 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쉽게 상처받고 화를 낸다. 서로를 잘 알기에 오히려 깊은 상처를 줄 수 있고, 내가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도 크게 마음이 상하는 거야.

하지만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상대라도 그는 나와 다른 욕구를 지닌, 나와 엄연히 다른 존재란다. 그건 부모라도 마찬가지지. 그런데도 둘 사이의 경계를 무시하고 한 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채울 수 없는 헛된 기대를 품게 된다. 그가 나만을 위해 존재하길 바라고 내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주길 바라며 끊임없이 솟아나는 욕망과 욕구를 채워 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도 쉽게 발견된단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은 처음에는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예의를 지키고 상대의 기분을 헤아리면서 조심스레 접근한다. 그러다 만남이 반복될수록 '편한 사이'가 되어 부끄러운 모습들도 서서히 드러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를 받아들여 주고 좋아해 주면 우리 마음속의 어린아이는 기뻐하면서 한층 성장하고 성숙한다. 그러나 이 기쁨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어느새 그도 내 본모습에 실망해 언제든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바뀌게 된단다. 그래서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끝없는 테스트를 시작하지. 나만 봐 달라고, 내 얘기에 웃어 달라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 달라고 끊임없이 조른다. 말 안 해도 내가 뭘 생각하고 어떤 상태인지 알아달라고 요구하고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상한다. 그렇게 상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채워 줘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처음 만났을 때의 조심스러움과 배려는 사라지고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인 것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가까운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서 큰 상처를 주고받는 이유란 다. 가까운 만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지만 무심코 휘두른 손이 상대를 할퀼 수도 있는 거야.

 

- 베이징 사범 대학교수 위단이 쓴 <논어심득>에는 이런 말이 있다. "꽃은 활짝 피고 나면 시들 일만 남게 되고 달은 꽉 차게 되면 기울 일밖에 남지 않는다. 활짝 피기 전이나 꽉 차기 전에는 그래도 마음속에 기대와 동경이 있는 법이다. 친구나 가족의 관계도 모두 이와 같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만 확 트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다. 사랑이건 우정이건 두 사람이 친밀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대가 나와 다른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자신을 열고 상대를 이해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친밀함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고 이를 지속하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흔히 가까운 사이가 되면 "우리 사이에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 하며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까울수록 더 신경 쓰고 아껴야 한다는 뜻이란다. 상대가 모든 걸 받아 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고 상대의 약점을 건드리지 말고 자존심을 할퀼 수 있는 말은 피하며 예의와 신뢰를 지켜 나가야 하는 거지.

 

-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하면 많은 걸 희생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아 결혼을 두려워한다지. 그런데 엄마는 반대라고 생각해. 엄마는 오히려 결혼을 통해 자아를 더 단단하게 정립할 수 있었거든. 엄마로, 의사로, 아내로, 며느리로 1인 4역을 해 내느라 당시에는 너무 힘들고 억울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계에 부딪치면서 나 자신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고 더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남들과 부대끼며 사느라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못 한다고 나를 잃어버리는 건 결코 아니란다. 오히려 남들과 더불어 살면서 우리의 자아는 생각지 못했던 방향으로 확장되기도 하면서 성장한다.

이처럼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더욱 풍부한 인생을 만들어 가는 거란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갈등과 불협화음이 나오게 마련이지. 만약 갈등을 잘 관리하면 결혼 생활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감을 선물한다. 그러려면 당연히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고.

부부 갈등 문제로 엄마를 찾아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아니? 바로 "우리 남편(아내)은 결혼한 이후 지금까지 하나도 변한 게 없어요"다. 그런데 사람은 원래 잘 안 변한다. 그런데도 가족이라는 이유로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사람을 내 뜻대로 만들겠다고 고집 피울 때 행복은 뒷문으로 사라진단다. 자기 성격도 쉽게 못 고치는 인간이 어떻게 남의 성격을 바꾸겠니. 그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불만스러운 점만 조금 고쳐 주기를 바랄 때 부부 관계도 편안해질 수 있다. 또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진 사람은 있지. 그러므로 결혼을 결심할 때 그 사람의 문제를 고쳐 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고 그 문제를 네가 받아들이고 용납할 수 있는지부터 먼저 생각해 보렴.

또 여러 커플을 상담해 오면서 깨달은 건데, 이런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게 좋더구나. 첫째, 웬만하면 가치관이 다른 사람과는 결혼하지 마라. 경제적 상태가 같더라도 소비 지향적인 사람과 저축 지향적인 사람이 만나면 반드시 싸우게 되듯, 기본적인 가치관이 다르면 함께 살기 어렵단다. 둘째, 느닷없이 연락이 끊기거나 사라지는 사람 역시 피해야 해. 도박이나 기타 중독에 빠질 위험성이 높은 사람들이니까. 셋째, 사사건건 확인하고 간섭하는 사람은 의처증이나 의부증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하렴.

 

- 결혼 32년 차 선배로서 너희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첫째, 쓸데없는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라는 거야. 여자의 경우, 부부 관계를 해칠까 봐 혹은 힘든 사람 신경 쓰게 해서 뭐하나 싶어 참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참고 살아서 이득이 되는 경우도 있지. 그러나 지나칠 경우 오히려 배우자에 대한 감정적인 거리감을 만들어 내게 돼. 또 남자의 경우, 가족을 이끌고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말도 않고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끙끙 앓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하지만 이는 가족을 정말로 짐짝으로 만드는 행동이야. 그러니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고, 요구할 건 당당히 요구하고, 문제가 있으면 함께 노력해서 풀어 가렴. 둘째는 '나'만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다. 모든 인간관계는 상호 관계이기 때문에 한쪽만 100퍼센트 희생하는 경우는 없어. 상대도 나름대로 양보하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혼자 희생한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다 보면 그것이 강화되고 고착되어 정말로 바꿀 수 없는 현실처럼 여겨져 결국 본인만 불행해진단다. 특히 시댁이나 처가와 갈등이 심할 경우 욕하는 버릇이 생기는데, 그래 봐야 달라지는 것 없이 속만 상한다. 그러니 반드시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면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가는 부드러움도 필요하다. 셋째는 나중에 후회할 행동이나 말은 하지 말라는 거야. 특히나 한순간 유혹에 빠져 오랫동안 가꿔 온 관계를 하룻밤에 무너뜨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말 돌이키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 두렴.

마지막으로 결혼 생활은 힘든 게 당연하다. 연애는 먼 곳에서 산을 구경하는 거라면, 결혼은 그 산을 직접 오르는 거다. 멀리서 봤을 땐 몰랐던 상대의 장점과 단점을 속속들이 경험하는 게 결혼 생활이라는 말이다. 게다가 현실의 문제까지 겹쳐지면 더욱 골치 아플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론 참고 때론 싸우며 현명하게 그 산을 올랐을 때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은 남다르다. 지금까지 엄마 아빠의 결혼 생활에도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결혼 서약을 여전히 지키고 있단다. 앞으로 더 나이가 들어 거동도 불편해지고 인간관계도 좁아지고 영향력도 줄어들 때가 오겠지. 그때 나를 아주 잘 아는 좋은 친구가 늘 곁에 있다면 참 행복할 게다. 그게 네 아버지였으면 더 좋겠고.

 

- 작가 생텍쥐페리는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좋은 벗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통된 그 많은 추억, 함께 겪은 그 많은 괴로운 시간, 그 많은 어긋남, 화해, 마음의 격동...., 우정은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래된 친구가 더욱 좋은 이유다.

 

- 나이 든다는 것은 상실의 연속이다. 건강을 잃고, 직업을 잃고, 경제적인 능력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과정이다. 여러 가지 상실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아마도 자존감의 상실일 것이다. 사회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고, 더 이상 맡아야 할 역할이 없어진다는 것은 노인들에게 큰 상처를 준다. 그런데 이러한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다시금 자신의 위치를 되찾고자 욕심을 부리게 된다. 조그만 일에도 무시당하는 것 같아 버럭 화를 내고, 버릇없다며 아랫사람들을 야단치기 일쑤고, 세상이 노인을 우습게 알고 공경할 줄 모른다고 불평이 많아진다. 그렇게 스스로를 젊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기에 더 어려운 사람으로 만들고 만다.

나이 들수록 욕심이 많아지는 것은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불안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두려움 대문이다. 그러나 노인은 젊음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젊음을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 노인은 그가 살아왔던 길과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온몸으로 보여 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경험하고 그 풍경들을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기억들이 몸으로 배어 나와 사계가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아니 든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또 노인이 되면 기억력이 나빠지고 치매가 오는 게 당연하다고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꾸준히 활동하고 적당한 영양이 공급된다면 지능이 80세까지 발달한다고 한다. 인생 후반부에도 충분히 변화하고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이 듦을 억울해 하면 노년은 무료한 여분의 시간에 불과하다. 반면 이제껏 그랬듯 운명을 받아들이고 개척하고자 한다면 성숙하게 나이 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 모든 연령대가 그러하듯 노년기 역시 그에 맞는 발달 과제와 역할이 있다.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통합하여 미래에 전달해 주는 것이다. 이는 내가 죽어도 다음 세대를 통해 생명은 연속되며 세상은 존속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즉 유한한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일이다. 그런데 자기 초월이 거창한 종교적 수련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리면 된다. 다른 사람들의 기쁨에서 기쁨을 느끼고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며 비록 우리가 거기 있을 수 없다 해도 내일의 세계를 위해 자신을 투자하는 것이다.

 

- 사실 인간처럼 미숙한 존재로 태어나는 동물은 없다. 웬만한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거나 아니면 스스로 기어가서 엄마 젖을 빤다. 그러나 갓난아이는 혼자서는 젖을 찾아 움직이지도 못하고 꼬박 1년을 엄마 품에 안겨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후로도 10년간은 부모의 절대적인 보살핌을 받아야 생존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오랜 기간 타인의 돌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즉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극히 관계 의존적인 동물이며,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찾아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 나이를 먹을수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게 별로 재미가 없다고 말한다. 웬만한 일은 다 겪어봤기에 호기심이 안 생긴다는 것이다. 먹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다면서 뭐 신나는 일 없냐고 묻는다. 하지만 오금이 저릴 만큼 재미있는 일이 우리 인생에서 그다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평범한 일상이 이어질 뿐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은 자신감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해 봤자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거라는 걱정, 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시도해 보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떤 일에서도 쉽사리 호기심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하는 동안 우리는 그날 누릴 수 있는 진짜 재미를 놓쳐 버리고 만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퍼센트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30퍼센트는 이미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이며 22퍼센트는 아주 사소한 걱정들이고 4퍼센트는 우리가 전혀 손쓸 수 없는 일들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 4퍼센트만이 우리가 정말로 걱정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데없는 96퍼센트의 걱정과 불평불만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느라 정작 오늘을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만다. 그에 대해 인도의 명상가 오쇼 라즈니쉬는 <장자, 도를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은 경험이지 이론이 아니다. 삶에는 해석이 필요 없다. 삶은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다... 매 순간 삶이 그대의 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대는 머리로 궁리하고 있다. 그대는 삶에게 말한다. '기다려라. 내가 문을 열어주겠다. 그러나 먼저 결정 내릴 시간을 달라.' 삶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평생토록 삶이 그냥 왔다가 간다. 그대는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 채 다만 고달프게 질질 끌려갈 뿐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생각만으로 지쳐 버리는 삶에서 벗어나라. 오쇼의 말처럼 삶은 그냥 살아야 하고 경험해야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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