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미도 디스코 팡팡'으로 시작하는 엉망진창인 글을 쓰다 보니, 글쓰기란 늘 누군가에게 간파당하고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따라다니면서 죄책감도 남겨주는 신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털어놓고 나면 왜 쓰는지 의문이 들지만 쓰지 않았다면 작가님에게 이렇게 무엇인가를 털어놓는 일도 없었겠지요.
- "가끔 좋은 차나 비싼 물건을 봐요. 그리고 그것들이 내 소유가 되는 일을 상상하곤,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몸서리쳐요. 물질적인 것은 나를 즉시 파괴해버릴 것 같아요. 그런 방식으로 나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면, 나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들이 내 소유가 된다면 나는 두려워 한시도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요."
- 갑자기 고백합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관찰합니다. 그중에는 유명한 사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쩌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고 그들의 과거 행적이나 발언이 하루 종일 회자됩니다. 비난이 쏟아질 때도 있겠지요. 그럴 때마다 저는 공포와 불안을 느낍니다. 저는 두렵고 암담한 일이라면 뭐든 제게 대입해 보는 성정을 지녔거든요. 저는 자주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단 며칠 만에 잃어버리는 일을 생각합니다. 모두가 나의 가장 안 좋고 부끄러운 면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는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두려워져 어떤 말이든 하지 않기로 합니다.
- 불가해하고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계속 극복해나가는 게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닐까요. 저는 불안과 공포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어떨 때는 무서울 만큼 강한 힘을 가지고 싶다가도 어떨 때는 한없이 약해져 어떤 것과도 싸우고 싶지 않은 우리의 변화하는 성정이 결국 불안과 공포의 근원인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먹는 약이나 좋은 정신과 의사보다는 누군가 와락 안아주는 일 같은 것이 우리의 불안을 잠재우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서면으로 방법을 묻고 서로를 깊게 이해하려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 이겨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패배하고 가끔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다시 패배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삶은 눈물 나는 일입니다.
- 벌어야 할 돈과 이뤄야 할 야망과 수습해야 할 문제와 아직 모르는 쾌락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으니 꼭 괜찮고 싶습니다.
- "섬유종이라는 것은 왜 생기는 건가요?"
하지만 선생님은 이미 다음 환자로 눈을 돌린 뒤였습니다. 저는 그의 가운 자락을 잡고 재차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게 왜 생긴 거죠?"
그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저희도 모릅니다."
그러고선 마치 경보 시합 중인 사람처럼 계속해서 다음 회진을 향해 나아갔죠. 회진이란 이런 것인가. 병원은 '왜'라는 질문에 응답하기엔 지나치게 바쁜 곳인가. '어떻게'를 수행하기만 해도 벅찬 세계인가. 병상에 오도카니 앉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도카니 앉은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었어요. 옆 침대에는 눈 치우다 미끄러져 팔이 부러진 할머니가 계셨고 앞 침대에는 발가락이 모두 골절된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드문드문 수다를 떨었어요. 어쩌다 다쳤는지, 얼마나 아픈지, 아파서 취소된 일들이 무엇인지.... 아픈 사람들과 함께 병원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한 가지가 명료해졌습니다. 저에게 행복은 아프거나 괴롭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픈 곳도 괴로운 문제도 없는 날에, 그것이 어마어마한 행복임을 알아보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 지난 크리스마스에도, 새해 첫날에도 저는 응급실에 있었습니다. 정확히는 12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시간과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날 모두 당직을 서고 아침에 퇴근했습니다. 그런 날들의 응급실은 어떨 것 같습니까. 병원 밖 보통 사람들은 행복한 날이지요. 대신 응달에 남겨진 사람들은 얼마나 처절하게 불행에 떠는지 모릅니다. 모두가 들뜬 세상의 변방에서 벌어지는 파괴와 고독을 목격하는 일입니다. 그런 것들을 매년 자청해서 보고 있자면 적어도 그다지 행복하고 싶지 않아집니다. 압도적인 패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죽음을 보고 있으면 자신 또한 영영 행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람들의 몸에는 문득 악성종양이 돋아나고, 때로는 악마 같은 불의가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부수어버립니다. 그런 것들이 인간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 많습니다. 저는 의학적으로 그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기계적으로 훈련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작가님이 경험한 대로 여기는 '왜'라는 질문이 미약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왜 인간들은 타인의 생명을 짓밟아버리고 왜 누군가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일까요. 그것들을 돋보기로 들여다보자 저는 불행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불행한 장소로 찾아가야 했으니까요.
-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는 조금 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반성하고 주위를 되돌아보고 읽고 이해하는 것이 글쓰기를 계속하는 행위니까요. 작가님이 비건-에코-페미니스트를 언급하셨던 것처럼 저 또한 꾸준히 폭력-학대-재난-슬픔 등을 언급해왔습니다. 비유하자면, 자신이 디디고 있는 디딤돌에 간신히 다른 디딤돌 하나를 올려놓고 그 달라진 광경을 묘사하는 일이 글쓰기의 갱신이겠지요. 타인의 세계를 어려워하는 제가 <에픽>에 썼던 원고 또한 남을 궁금해하고자 노력하는 원고입니다. 병원에서 내내 같이 일했어도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원무과 직원, 이송 기사, 간호조무사, 청소 업무 원님들의 노고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낯섦을 이겨내며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그러다 보면 큰 사건에 휘말려 세상에 어떤 식으로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기도 했다가, 식탁에 오른 고기를 보고 작가님의 글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 사실 우정의 범위를 넓힌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정에는 연민도 따르고 수고도 따르잖아요. 좋아하는 만큼 마음이 아플 테고요. 이전부터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더 고통스러워지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 오늘은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았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을 잘 보지 않지만 일요일 점심에 방영하는 <출발! 비디오 여행>만은 챙겨보는 편입니다. 29년째 방영 중인 프로그램이죠. 엄청나게 재밌지는 않습니다. 엄청나게 탁월하지도 않죠. 그저 몹시 꾸준하고 평이하고 안정적인 즐거움을 줘요. 그런 즐거움을 기복 없이 준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일인지 압니다. 제가 사수하고 싶은 행복은 그런 모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요일 점심마다 <출발! 비디오 여행>을 보는 시간 말이에요. 어떤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을 보냈건 간에 일요일에는 늦잠을 잔 뒤 천천히 아침을 먹고선 후식과 함께 텔레비전 앞으로 가고 싶습니다. 오래된 MC들의 싱거운 개그에도 웃음이 날 것입니다. 다 보고 나면 옆 사람도 저도 스르륵 잠이 들겠죠. 꿈에선 여러 영화가 섞일 테고요. 낮잠에서 깬 뒤엔 부은 눈으로 서로에게 물어봅니다. 무슨 꿈 꿨냐고. 그럼 잡냄새를 폴폴 풍기며 각자 호소합니다. 방금 꾼 꿈이 얼마나 무섭거나 이상했는지. 다행히 그것은 모두 꿈입니다. 저에게 <출발! 비디오 여행>은 이런 시간까지 포함된 무엇이에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서 점차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될 때 더 깊은 사랑을 느꼈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얼마든지 반복되어도 좋을 듯한 일요일 오후마다 그런 사랑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평생 같이 경험하며 평온하게 탐구해갈 일만 남아 있기를 저 역시 소망했습니다. 과연 그런 행운이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부디 그랬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우리는 모두를 잃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결국 다 상실시켜버리는 게 시간이잖아요. 그 사실은 저를 허무하게 만든다기보다는 더욱 절실하게 만듭니다. 선생님 말대로 무엇이든 아쉬워집니다. 이미 여러 번 반복한 일요일 오후에 옆 사람을 있는 힘껏 껴안아보는 것도 그래서겠죠. 내일이면 영영 헤어질 것처럼요.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때마다 "아이고야" 신음하며, 우리가 잘하지 못하는 모든 일은 항상 우리를 겸허한 자세로 이끈다고 생각합니다. 나아지고 달라져야 할 부분이 너무 많지만 그걸 다 따지고 들면 새로 태어나야 하는 지경이라 그냥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임해야 하는 겁니다. 저 또한 평생 다른 곳에 재능이 있을까 봐 걱정해서 많은 벌였습니다만, 결국은 주말마다 못하는 일에 안정감을 느끼고 안착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과의 서간 또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저는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모든 걸 잘하는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열심히 살았습니다. 끝내 저는 친절해 보이고도 싶고, 외모도 괜찮아 보이고 싶고, 인내심 있게 보이고도 싶고, 안 웃기지만 웃기고도 싶고, 소탈하지만 의외의 면이 있는 사람이고도 싶고, 정중하고 예의 바르지만 알고 보면 유쾌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고, 신비롭고 유일무이한 존재이고도 싶은 괴물 같은 과욕의 사내가 되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강박입니다. 문득 스물두 살 때 애인이 "당신은 욕심이 너무 많다" 하면서 떠나버렸던 생각이 납니다. 그땐 욕심이 많다기보단 그냥 구려서 차였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럼에도 제가 욕심을 부릴 때마다 마법처럼 떠오르는 말입니다.
제가 교만하고 이중적인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저는 세상에 무심한 척하지만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기웃거리면서 댓글 개수를 헤아립니다. 자랑하거나 아는 척하고 싶어 술자리에서 몇 마디 던져놓고 집에 돌아와 경솔함을 뉘우치며 이부자리에서 조기교육으로 습득한 헤엄을 치다가 잠이 듭니다. 열아홉 살이나 할 법한 실수를 하면서 작가님에게 꾸지람을 듣고, 가끔 애인에게 야단맞고 벌을 서거나 쫓겨나기도 합니다. 저 때문에 화가 난 간호사 선생님 눈치를 보다가 환자를 진료하러 복도를 돌아간 적도 있습니다. 결국 저는 누구보다 평범한 사람입니다. 다만 억울해하고 때때로 항변하고 가끔 불친절하고 실수하면서 어떻게든 나은 사람이고 싶어 노력은 해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응급실에서나 응급실 밖에서나 부정적인 말을 들으며 저는 제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모조리 인정해버리고 맙니다. 그게 제가 하는 최선의 노력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는 축구를 좋아하는지도 또 이 서간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저는 '약함'과 '다름'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죄가 있다면 그 반대의 사람들이 짊어져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약자의 주리를 틀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 반대의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통틀어도 그런 세상은 없었습니다. 과연 그런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을까요. 솔직히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벌써 너무 많은 것을 경험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삶'으로 돌리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제 성이 남들과 '다르'지만 실제 어떤 차별도 받지 않고 누구도 아프거나 죽지 않은 것처럼 성별이 여성이거나 다수와 '다른' 성적 지향이 있어도 그 때문에 어떤 차별도 없고 누구도 아프거나 죽기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믿는 단 하나의 가치 때문에 저는 그렇게 주장합니다. 제가 주어진 성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앞으로도 사람들은 많은 것이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고 약자가 약자라는 이유로 안위가 위협받아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의 '삶'을 바라는 위치에서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 선생님의 지난 편지에서 제가 보석처럼 여기는 문장이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궁상을 떨었어도 작가님의 힘든 시절 앞에서는 공손해지는 것처럼, 작가님의 행복한 기억 역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쓰셨지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열 번 가까이 긴 편지를 주고받아도 선생님의 불행과 행복은 여전히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처럼 느껴집니다. 우리 사이엔 늘 오해가 있고 앞으로도 그럴 테죠. 언젠가 선생님이 쓰셨듯 "우리는 대체로 패배하고 가끔 승리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다시 패배로 돌아올 것입니다". 서로를 모르니까요. 오해는 흔하고 이해는 희귀하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훌륭한 동료 작가 요조는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 도배를 하는 방법은 별거 없습니다. 여기에 종이와 풀이 있다고 칩시다. 종이에 풀을 바르면 어딘가에 붙는다는 것은 명징한 이치겠지요. 그걸 온 집 벽에다가 대고 하면 되는 겁니다. 실은 많은 것들이 그렇게 단순합니다. 달리기를 하는 방법은 몸을 약간 빠르고 급하게 앞으로 옮기는 일을 목적지까지 하는 것이겠고, 글을 쓰는 방법 또한 첫 문장을 쓰고 글을 이어나가 마지막 문장을 써서 마무리하는 것이겠지요. 요가를 하는 방법 또한 다른 도구가 필요하지 않으니 몸을 쥐어틀고.... 등등이겠지만 안 해봐서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일이 해본 일과 안 해본 일로 구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명을 듣는 것과 실제로 해보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하여간 도배는 전문가를 불러서 하시길 바랍니다. 그 일이 힘들다는 것을 알기 위해 꼭 직접 해볼 필요는 없다는 선지자의 충고입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일은 꼭 직접 해봐야 할 일과 반드시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일로도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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