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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마음공부 (페이융 저 / 출판사 유노북스)

by hyeranKIM 2021.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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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마음공부

반야심경은 600권에 달하는 ‘반야바라밀경’의 핵심을 단 260자로 응축해 놓은 경전으로, 가장 짧으면서도 부처의 심오한 지혜를 있는 그대로 담고 있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아 왔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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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나라 때 협산선회 선사는 "중생은 색만 보고 심은 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반야심경은 모든 문제를 심의 경지로 이끌어 간다. 심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저 마음 하나만 바꿀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진다.

어떤 이가 백록현단 선사에게 "무상불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백록현단 선사가 "해변의 돌사자다"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묻자 백록현단 선사가 대답하기를 "마음이 있다면 물 위에 있을 수도 있으니 파도와 모래도 무섭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속세에 아무리 파도가 치고 진흙과 모래가 있어도 마음만 있다면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울 수 있다.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어떻게 마음이 없을 수 있나요? 제 심장이 이렇게 뛰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분노나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라고 반문할 것이다.

그렇다. 심장이 쉬지 않고 뛰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심'이 아니다. 심장이라는 기관이 뛰고 있을 뿐이다. 또 분노나 기쁨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유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심'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한산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 마음은 가을 달 같고 푸른 연못은 티 없이 맑구나.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내게 마음이 하나 있는데 가을 하늘의 밝은 달처럼 티 없이 맑아서 어떤 것으로도 비유할 수 없으니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해도 말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말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존재이고 가장 강한 힘의 원천이다.

세상은 번화하면서도 또 황량하다. 가을 달처럼 맑은 사람들의 마음이 황폐해지고 또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온종일 허영심에 가득 차 속세에서 말하는 성공과 행복을 좇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실패하고 불행해진다.

 

- 현실이란 우리의 마음이 투사된 것이다. 눈앞에 맞닥뜨린 현실은 바로 자신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밖에 강하고 큰 '현실'이 있다고 착각하고 성장을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착각이 번뇌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생들을 수없이 만들어 낸다.

인생을 한바탕 도박에 비유한다면, 우리가 자신의 패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이 도박이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인생에서 승패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전투가 되고 우리가 성공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만 몰두한다면 끊임없이 실패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반면 심미를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놀이가 되고 한바탕의 도박도 그저 재밋거리가 될 것이다. 또 평정심을 목적으로 한다면 우리가 만들어 내는 현실은 수행이 되고 도박은 우리에게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단지 진정한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에 들어서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승패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고 고락의 순환을 뛰어넘어 평정한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야만 성공을 위한 불변의 비결을 얻겠다거나 불변의 기쁨을 누리겠다는 헛된 생각을 갖지 않고, 생명의 여정 속에서 생명과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비로소 운명의 주인이 되어 무엇을 하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 "현실을 직시해"

우리가 자라면서 수없이 듣는 이 말이 아름다운 인생을 짓밟고 아름다운 것들을 망가뜨린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혐오하는 모습으로 변하게 되고 한평생 현실의 늪에서 어우적 거리며 8가지 고통, 즉 생고, 노고, 병고, 사고, 애별리고(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원증회고(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는 고통), 구부득고(구하려고 노력해도 구할 수 없는 고통), 오온성고(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 요소가 너무 강한 고통)를 겪는다.

우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와서, 천천히 노쇠하고, 수시로 병마에 고통받다가, 조용히 죽는다. 길고도 짧은 이 인생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은 늘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 없고,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은 늘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사물이다. 얻고자 하는 것이 한없이 많아서 만족할 수 없고, 또 일생 동안 갖가지 형태와 색깔, 복잡한 감정과 생각 사이에 얽매여 기복을 겪는다. 교통사고, 실직, 파산 등 예상하지 못한 화를 만나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이런 고통과 액운을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떠나는 것이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떠나 드넓은 대자연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다.

 

- 진정한 해탈은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라고 했다. 이것은 불교 사상의 적극적인 면을 보여 주는 개념이다.

인생의 고통과 재앙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서서 관찰하고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 해탈한다는 것이다.

 

- 초기 불교에서 반야의 수행은 계, 정, 혜였다. 계, 정, 혜 세 가지 방법을 통해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 해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육도로 확대되었고 이를 피안에 도달할 수 있는 여섯 가지 방법이라고 하여 '육바라밀'이라고 불렀다.

육도의 수행을 통해 연실의 환상에서 벗어나 오온의 공함을 비추어 볼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 인생의 고통과 재앙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서서 관찰하라. 그리고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라.

달마는 보시(dana)를 수행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마음의 때를 없애고 중생을 도울 수 있으며 모습을 취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모습을 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보시를 할 때 자신이 보시를 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고 보시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보시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보시에는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가 있다. 재보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기 재물을 주는 것이고, 법보시는 불법을 전파하는 것이며, 무외보시는 남에게 용기를 주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보시라는 행위가 우리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내 말 좀 들어 봐", "내가 바라는 건...", "내 생각은..." 등의 말을 수없이 많이 하며 살아가고 있다. 또 이런 말들이 인생을 앞으로 끌고 나간다고 생각한다.

일생 동안 우리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심지어 일상적인 교류에서도 타인의 말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고 타인의 애환을 들어주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보시를 하면 자신이 아닌 타인이 중심이 되어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보시는 남의 슬픔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남을 도와주는 행위 속에서 우리 안의 소유욕과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는 불안감이 사라지고 평정심을 얻게 된다. 보시를 하면 현실 속의 냉혹한 관계를 따뜻하게 변화시킬 수도 있다.

 

- 불교에 오계가 있는데, 살생하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음탕함을 행하지 말 것, 헛된 말을 하지 말 것, 술을 마시지 말 것이다.

<증일아함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불살계: 사람이 다른 중생을 함부로 해쳐 목숨을 빼앗으면 죽어서 악도로 떨어지거나 살아서 수명이 짧아진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불살계라고 한다.

불투도계: 사람이 주인이 있는 물건을 훔치면 죽어서 악도록 떨어지거나 살아서 가난해진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불투도계라고 한다.

불사음계: 사람이 음탕함이 도가 지나쳐 남의 아내를 범하면 죽어서 악도로 떨어지거나 살아서 그의 아내가 정숙하지 못하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불사음계라고 한다.

불망어계: 사람이 헛된 말로 진실을 감추고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면 죽어서 악도로 떨어지거나 살아서 말투가 흉악하여 사람들의 미움을 산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불망어계라고 한다.

불음주계: 사람이 술을 마시면 사납고 어리석게 행동하게 된다.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불음주계라고 한다.

이 오계가 나중에 '십계'로 늘어났다. 이를 '십선업'이라고도 부른다.

첫째, 살생하지 않는 것,

둘째, 도둑질하지 않는 것,

셋째, 음탕함을 행하지 않는 것,

넷째, 헛된 말을 하지 않는 것,

다섯째, 이간질을 하지 않는 것,

여섯째, 험한 말을 하지 않는 것,

일곱째, 아첨하지 않는 것,

여덟째,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

아홉째, 화내지 않는 것,

열째,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몸'의 범주에 들어간다. 살생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뜻만이 아니라 그 어떤 생명도 해치지 말라는 것이다. 살생하지 않는 것의 근본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지키는 것이다.

불교도들은 길을 걸을 때에도 행여 개미나 벌레를 밟아 죽일까 봐 걸음걸이를 가볍게 하고 앉을 때에도 의자 위에 벌레가 있지 않은지 살피며 조심해서 앉는다. 이것은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에 대해 경외감과 자비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도둑질을 하지 않는 것도 옛날에는 도둑질이라고 하면 주로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저작권이 있는 남의 작품을 불법 다운로드하는 것도 역시 도둑질이다.

음탕함을 행하지 않는 것이란 출가한 사람에게는 성적 욕망을 없애는 것이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성적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네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는 '입'에 관한 것이다.

여덟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는 '마음'에 관한 것이다.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은 재물, 명예, 사랑 등을 억지로 좇지 않고 모든 일을 인연에 따르는 것이고 화내지 않는 것은 현실이 어떻든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이며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현실을 똑똑히 바라보고 어리석은 마음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계는 몸과 입,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몸과 입, 마음이 깨끗하면 현실도 깨끗해진다. 계를 지키면 잘못된 행동으로 악연을 맺는 일이 없어지고 좋은 행동으로 선연을 맺게 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수행에서 계는 기본 바탕이며, 계가 없으면 다른 수행은 무의미해진다. 부처가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계의 수행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부처는 제자들에게 자기 수행에만 정진하고 남이 계를 지키는지 어기는지, 또 남이 계를 얼마나 잘 지키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 자신만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계율을 엄수하면 자기도 모르게 현실도 바뀌게 된다. 설사 아주 작은 계율이라도 예상치 못한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불법을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내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심오한 이론을 연구하고 대단한 비결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대답한다. 그런 것들을 현실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주 단순한 행동이다.

지금부터 이간질하지 않는 계를 수행해 보자. 남을 헐뜯지 않고 남의 험담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한 달, 석 달, 1년, 2년이 쌓이면 어떻게 될까? 인간관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겠는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이 평화롭고 따뜻하게 변하지 않겠는가?

 

- 인욕의 핵심은 '참는 것'이 아니라 '모욕'이 닥쳤을 때 '분노와 증오가 생기지 않는 것'에 있다. 남들이 자신을 욕했을 때 꾹 참으면 되받아치지 않고 상대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화가 치밀고 지옥에 떨어지라고 상대를 저주한다면 그것은 인욕이 아니라 화를 마음속에 꾹꾹 눌러두는 것이다.

한산이 자신의 친구인 미치광이 선승 습득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누가 나를 비방하고 못살게 굴고 나를 욕되게 하고 비웃고 또 나를 무시하고 천대하고 미워하고 속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자 습득이 대답했다.

"참고, 양보하고, 내버려 두고, 피하고, 인내하고, 공경하고, 그를 상대하지 말게. 그러면 몇 년 뒤에는 그들이 그대를 보게 될 것이네."

이런 인내는 최후의 승리를 위해 인내하는 중국식 권모와 비슷하지만 인욕의 인내는 그 대가로 승리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나중에 상대가 어떻게 되든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므로 몇 년이 지난 뒤에 자신은 그를 볼 필요가 없다.

<금강경>에서 부처가 이렇게 말한다.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이 갈기갈기 잘렸을 때 나는 무엇이 나인지 무엇이 타인인지 또 무엇이 중생인지 무엇이 목숨인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사지가 마디마디 잘릴 때 내 마음이 무엇이 나이고 무엇이 타인이고 또 무엇이 중생이고 무엇이 목숨인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생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철저한 인욕의 경지다.

어떤 이가 부처를 욕했다. 하지만 부처는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한 어투로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상대가 받지 않는다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인가?"

그가 대답했다.

"물론 내 것이지요."

부처가 말했다.

"그렇다면 방금 전 그대가 내게 한 욕을 내가 받지 않는다면 그 역시 그대의 것이네."

부처는 누가 자신을 욕하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자비를 베풀었다. 자신을 욕 한 사람에게 남을 욕하면 악한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가르쳐 주며 업을 짓지 말라고 타이른 것이다.

인욕은 '내원해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남이 자신을 미워하고 해쳤을 때 보복하고 싶다는 마음을 참는 것이다.

'안수고인'이라는 인욕도 있는데 이는 질병이나 추위, 더위 같은 자연현상으로 인한 고통이 닥쳤을 때 차분한 마음으로 그것을 참으며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가장 높은 경지의 인욕은 '체찰법인'으로 우주 만물의 진정한 모습을 알고 모든 가상과 망령된 생각에 동요되지 않는 것이다.

 

- 선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혜능이 다음과 같이 명쾌한 설명을 내놓았다.

"외부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선이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 외부의 모습에 집착하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외부의 모습을 없애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본성은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고요하지만, 다만 경계를 보고 경계를 생각하면 곧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경계를 보고도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선정이다."

혜능의 뜻을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선이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 선을 통해 수행하려는 것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갖가지 현실에서 벗어나는 법이고, 정을 통해 수행하려는 것은 자기 마음을 안정시켜 어지럽지 않게 하는 법이다. 이 기본 원칙을 안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으며 언제 어디에서는 선정을 할 수 있다.

 

- 보시와 인욕은 두 가지 상반된 방향에서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바꾼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나이를 먹고 점점 성장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얻을 수 있는지, 이미 가진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얻을 수 있는지, 이미 가진 것들을 어떻게 지킬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성공학에 그토록 열광하고 앞다퉈 배우려 하는 것이다.

성공학의 핵심은 어떻게 얻고 어떻게 지킬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이용해 더 많이 창출해 낼 것인가에 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어떻게 하면 타인으로 하여금 나의 바람을 충족시키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 힘으로 타인을 바꿀 수 있는가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부처는 우리에게 보시를 배우라고 말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주라는 것이다. 부처가 말하는 보시는 자선과는 다르다. 부자가 가난한 이에게 베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부처가 말하는 보시는 누구라도 언제든 할 수 있는 행동이자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 작은 행동으로 우리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다.

보시가 자신이 아닌 외부에 자발적으로 선의를 베푸는 것인 반면, 인욕은 외부로부터 받는 악의를 스스로 참아 내는 것이다. 보시는 밖에서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바꾸고, 얻으려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남에게 주는 법을 가르친다.

인욕은 외부의 공격에 저항하고 보복하려는 생각을 바꾸어 악의에 악의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로 돌려주는 것이다. 악의적인 상대에게 악의와 분노로 함께 맞서는 것이 아니라 평정심을 보여 준다.

지계와 정진은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데 집중하는 방법이다. 타인이 아닌 자신을 갈고닦는 방법이다.

지계는 욕망에 이끌려 행동하는 우리의 관성을 변화시키고 정진은 타성에 따라 쉽게 물러나는 우리 자신의 관성을 변화시킨다.

 

- 나를 둘러싼 현실을 외부의 힘으로 여기면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다가 오히려 자신이 바뀐다. 반면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현실을 변화시키게 된다.

 

- 프로이트는 자아가 욕망의 나, 현실의 나, 도덕의 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세 가지 사이에 균형이 깨지면 스트레스가 생겨나고 이것이 정신병이나 심리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 오온의 첫 번째는 '색온'이다. 색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호색'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원시불교에서 오온의 색은 우리 자신의 몸을 의미했다. 세월이 흐르며 범위가 확대되어 사람의 육신 전체, 즉 눈, 코, 귀, 혀, 내장 등을 모두 색이라고 하게 되었다.

색의 기본적인 의미는 눈, 귀, 코, 혀, 몸이 다섯 개의 기본적인 신체 기관, 그리고 이 다섯 개의 신체 기관에 대응되는 오진, 즉 색, 소리, 냄새, 맛, 촉감이다. 이것들이 색온의 기본 요소다.

 

- 부처는 이 몸이 정말로 자신의 것이라면 이 몸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리가 없지 않느냐고 했다. 시시때때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 몸이 어떻게 자신일 수 있겠는가? 나 자신이 어떻게 나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이 몸은 시시각각 노쇠해 가고 있다. 이 몸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세포가 각각 하나의 세계다. 세포가 분해되면 전자가 된다. 전자와 전자의 거리는 우리의 우주와 다른 우주 사이의 거리와 같다고 한다. 몸속에 수많은 우주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몸 중 어떤 부분이 나일까? 이 몸은 그저 인연에 따라 조합된 것이고 수시로 변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죽어서 먼지가 되어 흙 속에 묻히거나 공기 중에서 흩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순전한 환상이다. 이 몸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수시로 바뀌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있음을 안다면, 그때 비로소 자아의 비좁은 세상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 오온 중 두 번째는 '수온'이다.

수는 감각이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아픈 것처럼 외부에 대한 몸의 감각이 바로 수다. 부처는 수온을 고통스러운 것, 즐거운 것,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 세 가지로 나누었다.

 

- 인연의 조합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느낌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불변하는 것도 아니다. 단 1초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몸과 외부 세계의 상태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는 공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어떤 느낌이 든 생겨났다가 곧 사라지기 때문에 거의 생겨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인연의 조합이 변하면 한 가지 느낌이 사라지고 또 다른 느낌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공은 수와 다르지 않다. 인연이 생겨나면 수도 생겨나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도 무언가 일어난 것과 같다.

수가 공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때 그것이 불변의 느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있다. 또 공도 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은 우리에게 생겨난 느낌이 헛된 것이며 그것이 인연에 따라 시시각각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발생한 것도 발생하지 않은 것이고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느낌은 진짜도 가짜도 아니고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의 표현법으로 말하자면, "수는 곧 공이요, 공은 곧 수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치를 안다면 어떤 느낌이 들더라도 그 느낌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 오온 중 세 번째는 '상온'이다.

상이란 느끼는 대상에 대해 형성되는 개념이다. 미녀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수다. 그 느낌에 뒤이어 "저 여자는 미인이다"라는 판단이 생겨난다. 이런 개념이 바로 상이 된다. 햇볕 아래에서 덥다고 느끼는 것은 수다. 그런 다음 "여름이 왔구나"라고 생각한다. 덥다는 느낌으로 여름이 왔다는 판단이 생기는 것, 이것이 바로 상이다.

상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우리가 외부의 사물을 느낀 다음에 개념이 생겨난다. 바람을 예로 들면, 처음에는 움직이는 무언가가 우리 몸으로 불어오는 느낌뿐이지만 거기서 개념이 생겨나고 '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둘째, 우리에게 먼저 개념이 생겨난 뒤에 현실에서 그것이 증명된다. 도시의 아이들은 양이라는 개념이 먼저 생긴 뒤에 어느 날 실제로 양을 보고 그것이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오온 중 네 번째는 '행온'이다.

행이란 걷는다는 뜻이 아니고 행동한다는 뜻과도 조금은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행온이란 업을 지을 때의 심리적 활동이다. 이것에 반드시 행위가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누가 실수로 내 발을 밟았을 때 마음속에서 분노가 생긴다면 그것도 이미 행이다. 화가 나는 것만으로도 업을 짓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타인의 불행을 보고 마음속에 연민이 생긴다면 그것도 역시 행이다. 연민이 선업을 짓기 때문이다.

미인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수이고, 속으로 '와,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이며, 그런 뒤에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그것은 행이다.

물론 행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행이란 '아직 기억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행은 지금까지 쌓아 온 업력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 바깥세상에 대해 감정을 느끼고 개념을 판단하며 의욕도 가지고 있다. 이 '의욕'이 바로 행이다. 행온의 작용은 업을 짓는 것이다.

 

- 업력은 우리의 마음과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어떤 마음과 행위일까? 바로 신업, 구업, 의업이다. 신업이란 주로 죽이고 훔치고 음탕함을 행하는 것이고, 구업이란 이간질, 거짓말, 아첨이고, 의업이란 욕심, 분노, 어리석음이다.

인과의 순환과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신정, 구정, 의정을 행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 말, 생각이 모두 깨끗해야 한다는 뜻이다.

죽이거나 훔치거나 음탕하지 않고, 이간질하거나 험한 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아첨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거나 성을 내거나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의 운명도 깨끗해져서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업력에는 공업과 불공업이 있다. 불공업을 별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업은 집단의 행위가 집단 전체에 공동의 결과를 초래한 것을 뜻한다. 지구상의 생물 전체는 공동의 업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지구에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 전체 역시 공동의 업력을 가지고 있고 한 국가는 국가 공동의 업력을 가지고 있으며, 민족은 민족공동의 업력을, 도시는 도시 공동의 업력을, 회사는 회사 공동의 업력을 가지고 있다.

불공업은 개체 단독의 업력이다. 어째서 사람의 생김새는 각기 다를까? 어째서 사람의 운명은 천차만별일까? 그것은 모두 각자의 업력 때문이다. 어째서 똑같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부상을 당하고 어떤 이는 다치지도 않고 멀쩡한 걸까? 그 역시 각자의 업력 때문이다.

 

- 오온 중 마지막은 '식온'이다.

대승불교의 주장에 따르면, 식온은 팔식으로 나뉜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이다.

팔식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심이다. 이것들이 모이면 여러 현상을 일으키고 인지와 판단을 만들어 낸다. 둘째는 의다. 의는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각이 생기면 의는 한 가지 '나'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것을 의라고 한다. 셋째는 식이다. 이것은 외부 환경을 분별하고 지각할 수 있는 마음이다.

때로는 심, 의, 식을 심으로 통칭하기도 하고 식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식은 다른 마음을 일으키고 자신이 주도하기 때문에 심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말나식과 아뢰야식은 불교의 매우 독특한 관찰법이다. 쉽게 말하면, 말나식은 '나'가 있다고 착각하는 의식으로 아집의 근본이다. 아뢰야식은 '여래장'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주가 처음 생겨난 그 순간의 의식을 포함해 모든 의식의 씨앗이 그 안에 들어 있고 모든 선악의 씨앗도 역시 아뢰야식 안에 있다.

 

- 의지력과 업력의 차원에서 노력하면 바꾸지 못할 것은 없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말에서도 불학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누구든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바로 자아를 찾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가 시인인지 미치광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기 운명을 찾은 다음(타인의 운명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평생 그것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외의 다른 길은 모두 인간의 도피 방식이다"라고 말했다.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불변의 실체를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연에 대한 지각을 통해 자기 운명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이 세상에 오면 저마다 독특한 인연을 갖게 되고 자기만의 독특한 길을 걷게 된다.

 

- '생겨남'과 '사라짐'을 모두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생겨남'의 환희 때문에 '사라짐'을 잊지 않고 또 '사라짐'의 우울함 때문에 '생겨남'의 환희를 잊지 않는다. 그들은 생멸이 모두 있어야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심오한 깨달음은 관점의 전환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관점, 무한성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바라본 결과다.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사라지든 그저 에너지의 전환일 뿐이다.

사실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우리 개인의 관점에서 보면 물론 생사가 있다. 가족이 사망했을 때 우리는 몹시 슬퍼한다. 하지만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인이 죽어도 인류는 여전히 건재하다.

또 인류라는 물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건재하다. 지구라는 행성도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그래도 은하계는 존재한다. 은하계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우주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우주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허공은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는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는 것이다. 단지 인류가 이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허공에 살면서 자기 세계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생멸 현상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다.

 

- 더러움과 깨끗함은 인간에게는 아주 흔한 현상이다. 사물의 성질은 언제나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으로 나뉜다. 우리는 언제나 깨끗한 것을 가까이하고 더러운 것을 멀리하려고 한다.

더러움과 깨끗함의 구분은 인간의 마음, 즉 사물의 성질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기본적인 감정인 좋아함과 싫어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부유함과 가난함, 높음과 낮은 등등이 모두 인간의 이런 감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분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없다. 이 구분은 인간이 자신의 감정에 얽매여서 만들어 낸 개념일 뿐이다.

중국의 노자, 인도의 석가모니, 예수까지 모두 이 사실을 꿰뚫어 보았다. 우리가 악을 없애고 선을 널리 퍼뜨리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선을 퍼뜨리려고 하면 오히려 악이 더 많아진다. 왜 그럴까? 선악을 나눔으로 인해 비로소 악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선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악을 근본적으로 없애고 싶다면 구분하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 우리는 국가의 경계, 민족의 경계, 성별의 경계, 선악의 경계, 애증의 경계 등등 수없이 경계를 그었다. 그런 뒤에 그 경계에 따라 가치판단이 굳어졌다. 이것은 좋은 것, 이것은 나쁜 것으로 말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경계와 가치판단을 받아들이며 틀에 박힌 사고를 갖게 되었다. 무엇을 보든 곧바로 단정 짓고 판단한다. 우리 자신의 생활은 바로 이런 고정관념의 결과다.

갖가지 개념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곤경에 빠져 있는 것 같고, 옴짝달싹도 할 수 없으며,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다.

사실 곤경은 없다. 우리의 편견과 아집이 그런 곤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갖가지 차별성에 집착하고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지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점점 좁아지는 것이다.

부처는 차이를 보아야 하지만 또 차이를 보지 말라고 말했다. 세속에 살면서 동시에 세속을 초월하라고 했다. 부처의 말은 어떤 파편 조각 속에 갇혀 살지 말고 온전한 존재 안에 살며, 작은 도랑에 살지 말고 너른 바다에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매우 탁월한 지혜다. 분리된 사물들을 하나로 모으는 지혜이며, 서로 모순된 것들을 하나로 온전히 이어 붙이는 지혜다. 이 세상은 곳곳이 나뉘어 있고 구분으로 인한 집착이 흔하게 존재한다. 태어남과 죽음 중에서 태어남에 집착하고 즐거움과 고통 중에서 즐거움에 집착하며 오래 지속되는 것과 짧게 끝나는 것 중에서 오래 지속되는 것에 집착한다. 또 고향과 타향 중에서 고향에 집착하고, 강함과 약함 중에서 강함에 집착한다. 어떻게 구분하고 집착하는 습속에서 벗어날까? 세 가지 장벽을 깨뜨려야 한다. 첫째,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장벽, 둘째, 명분의 장벽, 셋째, 비교의 장벽을 깨뜨려라.

 

- 세상에 그게 아니면 안 될 것은 없다. 결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집을 사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대학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우리를 비좁은 공간에 가둔다. 그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점점 길이 좁아지고 결국에는 막다른 길이 나타난다.

온전한 전체를 두 가지로 분리하고 그중 하나에만 집착하는 순간 고통이 생겨난다.

 

- 나를 부르는 명칭이 무엇이든 그것은 내 인생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살면서 붙여진 모든 이름을 다 합쳐도 다채롭고 오묘한 인생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 노자는 "어떤 사물이든 때로는 줄어드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늘어나는 것이고, 때로는 늘어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줄어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화는 복에 기대어 있고 복은 화 속에 숨어 있다"라고 한 노자의 말은 유명하다. 재앙 속에 행복의 싹이 숨어 있고 행복 속에서 재앙의 싹이 움트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자의 이 화가 반드시 화인 것도 아니고, 눈앞의 복이 반드시 복인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몸을 낮추는 것을 싫어하지만, 몸을 낮춘 덕분에 재앙을 피하기도 한다. 또 적게 가지면 많이 얻고 욕심을 내면 오히려 잃을 수 있다. 서로 대립된 개념들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쉽게 뒤집히는 것이다.

 

- 공직으로 진출할 수도 있고 사업을 할 수도 있다. 또 권력과 부를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가정, 사랑, 자유, 존엄과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행복을 해친다면, 차라리 성공하지 않고 청소부로 살더라도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누리며 자유롭게 사는 것이 낫다.

이런 합일의 이치를 안다면, 이른바 성공과 실패라는 것이 영원한 성공도 없고 영원한 실패도 없으며, 불변의 성공도 불변의 실패도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 성패 이외에 더 넓은 인생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자유로운 인생이 수없이 많이 있는데 굳이 성공의 길에만 매달려 죽기 살기로 달릴 필요가 있을까? 그 성공의 길 위에서 사랑과 존엄을 잃어버릴 필요가 있을까?

 

- 진정으로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을 온전한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누려야 한다. 맑은 날에는 햇볕을 누리고, 비 오는 날에는 비바람을 누린다면 불행함도 사라질 것이다.

 

- 명나라 때 원료범이 자신의 경험을 쓴 <요범사훈>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젊었을 때 만난 대단한 점쟁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점쟁이가 원료범에게 몇 살 때는 어떤 일이 있을 것이고 몇 살 때는 어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해 주었는데, 그 점쾌가 모두 들어맞았다는 것이다. 그는 무척 신기하게 생각했지만 한 불교도가 그에게 말했다.

"하나도 신기하지 않습니다. 그건 모두 당신이 예전에 했던 행동의 결과입니다. 그 점쟁이는 그것을 예리하게 관찰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지금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면 운명은 바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점쟁이의 예언이 빗나갈 것입니다."

 

- "세상의 생겨남과 사라짐이 순환하고 반복되는 것은 모두 집착 때문이다. 정에 집착하고 사랑에 집착하고 권력, 재물, 명예에 집착한다. 그런 후에 여러 가지 마음이 생기고 행위가 생겨나는데, 이런 마음과 행위가 업력을 만들고 장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업의 결과는 그에 대한 과보로 나타난다. 어떤 업을 짓든 그에 대한 과보가 따라온다. 어떤 과보는 일찍 나타나고 어떤 과보는 기나긴 윤회를 거친 뒤에야 나타난다. 어떤 행동을 해서 어떤 업을 짓든 그것은 모두 미래의 원인이며 훗날 분명한 과보가 나타나게 된다."

 

-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었다. 운명이나 신령한 힘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행동이 뿌린 씨앗이 자라나서 맺은 열매다.

불운이 닥치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불운으로 빠뜨린 사람이나 일을 증오한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 집중한다.

홍콩의 한 백만장자는 부하 직원이 실수를 저지르면 질책하지 않고 잘못을 일깨워 주기만 한다고 한다. 그 이유를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쓴 탓이지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어떤 일이 닥칠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해 보라. 우리가 타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우리가 번뇌에 빠지는 대부분의 원인은 타인을 원망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아붓는 것이다. 남을 원망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원망한다고 해서 그가 바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닥치든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스스로 짊어지고 천천히 해결하면 된다. 남에게 책임을 미뤄서는 문제를 영영 해결할 수 없다. 그저 계속 원망할 뿐이다.

 

- 부처는 무엇이 나인지 무엇이 타인인지 또 무엇이 중생인지 무엇이 목숨인지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리왕이 자기 몸을 갈기갈기 찢을 때에도 참을 수 있고 원망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부처의 이 말은 신비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종의 비유다. 분별심이 없으면 외부 환경이 어떠하든 외부의 힘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흔들리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려 주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인이다.

깨달음을 얻은 이는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참을 수 있다. 자기 육신이 살육을 당해도 무상(만물은 공이며 일정한 형태가 없음)의 이치를 알기 때문에 고통이라는 감각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생사의 이치를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인의 마음이지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 부처는 고통이 곧 진리라고 했다. 고통이 몇 가지나 될까? 부처는 생고, 노고, 병고, 사고,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오온성고를 합쳐 팔고라고 했다.

생고는 태어날 때의 고통이다. 우리는 거의 기억하지 못하지만 모태에서 서서히 자라고 모태를 떠나 세상으로 나오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노고는 시간이 주는 고통이다. 일단 세상에 나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늙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도 지킬 수 없고 아무리 좋은 일도 결국에는 끝난다.

병고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다. 부처도 병에 걸릴 수 있다. 인간의 육신을 가졌다면 누구라도 병이 나게 되고 병은 육신의 고통을 일으킨다.

사고는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다. 원증회고는 싫어하고 원망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이다. 같이 있기 싫은 동료와 함께 일해야 하거나 원수가 부부가 되거나, 부모와 자식이 서로 미워하면서도 헤어질 수 없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반대로 애별리고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하는 고통이다.

구부득고는 갖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없는 고통이다. 오온성고는 오온을 통해서 느끼는 고통이다.

 

- 인생의 모든 것이 풍경이라고 여기면, 자아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고 해가 떴다가 지고 바람이 불고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을 달리기 경주로 여기면, 자아의식이 강해져 모든 일에 연연하고 자기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남을 원망한다.

지금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자.

"사는 게 왜 이렇게 지치고 피곤할까?"

나는 위핑보 시인의 <그저 이뿐인 인생>이라는 글을 좋아한다. 그렇다. 인생은 원래 이런 것이다. 차분하고 담담하지만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인생을 누릴 권리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 내 인생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감옥에 갇혀 살아도 재미를 찾아낼 수 있다.

삶이란 원래 번잡한 것이다. 참고 또 참으며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 생각은 우리를 무한한 경지로 인도하고, 생명은 그 경지에서 자신을 초월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무한의 세계로 나아가라.

 

- 인간 세상의 소음은 대부분 우리 자신이 주관적인 편견을 벗어나지 못함으로 인해 생겨난다. 주관적인 편견을 세상의 진실로 착각한 채 타인을 인정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주관적인 편견이 시시때때로 삶을 옭아매고 소중한 자원을 낭비시킨다. 이를 피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화가 치밀거나 짜증이 날 때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 화가 누그러지고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아닌 다른 생물의 관점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 인간이 없고 고양이, 개, 코끼리, 호랑이 같은 것들만 있다면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만약 동물도 식물도 존재하지 않아서 그 어떤 '관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세상을 느낄 생물이 하나도 없다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걸까? 만약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관세음보살은 모든 '관점'은 사물 본연의 모습을 숨기고 있으며 모든 사물은 공임을 깨달았다. 그는 우리를 잠시나마 어지러운 세상에서 꺼내 끝없는 우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우주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방향에서 보는 것도 아니다. 바로 마음으로 보고 모든 방향에서 다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보이는 것이 비로소 존재의 온전한 모습이다.

모든 개체는 언젠가는 반드시 사라진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이 동물은 기나긴 세월 동안 유지되어 왔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미지의 미래에 인간이 멸종한다고 해도 지구는 계속해서 유지될 것이다.

지구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해서 사라진다 해도 은하계는 계속 유지될 것이고 은하계가 사라진다고 해도 우주라는 이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것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개체의 사망은 두려울 것이 없다. 우주의 품 안에서 인간은 평온하게 잠들 것이다. 영원히 우주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시의 숨 막히는 공간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머리 위의 하늘을 잊지 말라고 새벽과 밤에 그것들을 올려다보라고 말해 주고 있다.

 

- 그저 한평생 살다 가는 인생인데 왜 그렇게 자신을 못살게 굴고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위장해서 살아야 할까? 어째서 자기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당당하게 살 수 없을까?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하다면 남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늘 감추고 숨기는 것은 남에게 떳떳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기술이라는 것이 사실은 추함을 가리기 위한 것일 때가 많다. 감추고 가리면서 불안하게 사느니, 그 추함을 다 떨쳐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은가? 추함이 사라지면 삶이 밝아질 것이고 그러면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 어수선한 인생길에서 우리는 잡다한 일상에 너무 많이 얽매여 살고 있다. 사소한 다툼, 유언비어 등에 연연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일분일초를 헛되이 흘려보내고 있다. 불평, 원망, 고민 등이 우리의 영혼을 차지해 버렸다. 상사에게 무시당하거나 동료가 자신보다 더 빨리 승진하고 연봉이 오르면 심란해진다.

날마다 이런 잡다한 일들 때문에 분주히 뛰어다니며 일희일비한다면 그 인생은 작은 병 속에 갇힌 지렁이들처럼 비좁은 공간에서 서로 얽히고설켜 다투는 격이다. 병 밖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돈과 명예에만 관심을 쏟으면 인생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노예처럼 세상을 힘겹게 살아간다.

공자가 끊임없이 좌절하고 조롱당하고 오해받으면서도 여전히 자기만의 즐거움을 잃지 않았던 것은 세상을 초월해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는 그가 자신의 주인이므로 속세의 영욕과 빈부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영혼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을 수 있었다.

공자는 집중하면 먹고 마시는 것도 잊고 걱정 근심도 잊을 수 있었다. 잡다한 일은 다 잊었으므로 그의 생각은 구속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었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진정한 안락함을 느꼈으므로 시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래서 나이 든 노화든 그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 자신에게 진정으로 속해 있는 것을 찾고 나면 집중할 수 있고 우리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 몰두할 수 있는 취미가 있으면 생활의 고단함도 견딜 수 있고 죽음이 다가와도 두려움이나 공허함을 느끼지 않는다. 신앙이나 추구하는 것이 있으면 생활을 초월해 언제 어디서든 인간 본인의 자태를 유지하며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다.

 

- 어렸을 때는 자유롭고 천진난만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각종 규칙을 지키며 조심스러워지고 운신의 폭도 점점 좁아진다. 야스퍼스는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고정관념, 상식, 숨김, 당연시하는 마음 등으로 만들어진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라고 했다.

많은 이들이 이런 '감옥'에 안주하며 나오지 않으려 한다. 노인들은 은퇴한 뒤에 할 일 없이 빈둥거리게 될까 봐 은퇴를 두려워한다.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해 저녁 6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버릇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무미건조한 일상과 틀에 박힌 업무, 심지어 걸음걸이와 표정까지도 이미 습관으로 굳어져 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며 살아가는 것이다. "너 자신으로 살면 된다"라는 당나라 때 임제선사의 말은 바로 이런 태도를 고치라는 뜻이다.

 

- 단조로운 인생을 원치 않는다면 일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보이는 규정과 법칙을 뛰어넘고 마음속에서 화석처럼 굳어진 생각을 훌훌 던져 버려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삶을 대하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아주 잠깐이라도 자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본다면 인생의 톱니바퀴가 녹슬지 않고 언제나 생기 넘치는 인생을 살 수 있다.

이것은 한 번쯤 꼭 해볼 만한 인생의 모험이다. '궤도를 벗어나' 잠시만이라도 생명의 오묘함과 무한함을 새삼 깨닫고 이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 우리는 상식을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곤 한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상식 안에 수많은 오해와 편견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식은 시야를 가로막는다. 모든 장애물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마음속이 투명하고 잡티가 없다면 이 세상과 세상 밖 모두를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이 순간 모욕을 당하고 있다면, 좋다, 받아들이라. 모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관찰하라. 모욕이 어떻게 생겨났다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말이다.

모욕을 당하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저항하지도 말고 화내지도 말라. 모욕, 질병 등 불쾌한 일이 생겼을 때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저항하거나 분노하면 헛된 생각이 더 강해질 뿐이다.

헛된 생각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생겨나지 않았기를 바라고 또 그것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병은 찾아오면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과 과정을 거친 뒤에야 사라진다.

지금 당장은 아프고 괴롭지만 그저 이 순간뿐이다. 피하지 말고 받아들인 뒤 그것이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면 된다. 사라지면 내려놓으면 된다.

지금 이 순간 한 가지 일을 해냈다면 결과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다. 그 과정에 찾아오는 모든 순간을 누리고 결과의 득실에 연연하지 않으면 된다. 이 순간 나는 걷고 있으며 내가 어디로 가려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단숨에 목적지에 도착하겠다는 망상은 버려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갔다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돌아오는 것이다.

사실 목적지란 모든 걸음이 닿는 바로 그 자리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회피하지도 말고 환상을 가져서도 안 된다. 자신의 발을 보며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한다.

 

- 당장 내일 죽는다는 생각으로 살아 보라. 그러면 인생이 소중해지고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내일 죽는다는 마음으로 살라. 비관적으로 살라는 뜻도 아니고 허무주의를 의미하지도 않으며 본성을 잃고 쾌락과 방종을 일삼으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당장 내일 죽는다는 마음이란 생명의 본질에 대한 담담한 관조와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인식이다. 죽음의 필연성과 숙명성이 생명에 의의를 부여한다.

인간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면 자연계에 사계절이 운행하지 않고 꽃이 봉오리를 맺었다가 시들어 떨어지지도 않고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지지 않는다면 탄생의 열정도 없고 사랑의 희열도 없으며 희망도 꿈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진정으로 무서운 세계가 아닐까?

인간이 언젠가는 죽으며 자신이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 다시 말해 자기 생명이 갈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모의 기대를 위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위해, 접대를 위해, 헛된 명예를 위해, 인간관계를 위해, 작은 이익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틀에 박힌 공식 안에 욱여넣은 채 아름다운 계절의 풍경을 포기하고 마땅히 행복해야 했던 숱한 나날을 잃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이 가기 전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멀리 떠나라. 계획을 서둘러 완성하고 동경하는 산과 호수를 지금 감상하라. 지금 당장 해야 한다. 어째서 꼭 무언가를 기다린 뒤에야 그것들을 할 수 있을까?

시험이 끝난 뒤에, 돈을 많이 번 뒤에, 회의가 끝난 뒤에 등등, 이런저런 것들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의 예리한 칼날이 희망의 날개를 잘라 버린다. 그러면 우리는 탄식하며 또 분주히 살아간다. 압박감 속에서 종종걸음을 치며 열심히 뛰어다니느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4분의 1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생의 가치와 의의, 행복은 오로지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 한 과학자가 땅콩이 담긴 유리병을 원숭이에게 주었다. 원숭이가 땅콩을 꺼내려고 병을 마구 흔들었지만 병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땅콩에만 시선을 빼앗겨 냉정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것을 넘어 진정으로 멀리 내다볼 수 있다면 그 어떤 장애물도 나를 가로막을 수 없다. 눈앞에 있는 것을 떠나 멀리 바라볼 수 있다면 해결 방법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 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관점에 따라 다르고,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마음으로 보는 모든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그 영화로움의 뒤편에서 황량함을 보고 황량함의 뒤편에서 영화로움을 발견할 수 있으며, 복과 화가 기묘하게 바뀌는 이치도 알 수 있다. 그 이치를 깨닫는다면 눈앞의 형과 색에 미혹되지 않고 당장의 얻음에 기뻐하지도 당장의 잃음에 슬퍼하지도 않을 수 있다. 영혼이 그 형과 색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그 공을 보았다면 모든 것을 다 본 것이다.

눈에 보이지만 하나도 보지 못했다고 하면 가식이고 모든 것을 보았다고 하면 어리석음이다. 본 것은 그저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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