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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올리브 키터리지(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저 / 출판사 문학동네)

by hyeranKIM 2022.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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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국이 있던 자리를 지나친다. 그 자리에는 이제 거대한 자동 유리 문이 달린 대형 드러그 스토어 체인점이 들어서 있다. 옛 약국과 슈퍼마켓이 있던 자리는 물론, 헨리와 데니즈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커다란 쓰레기통 곁에서 한담을 나누던 주차장 자리까지 전부 차지해버린 거대한 드러그 스토어에는 약만 파는 게 아니고 종이 타월과 각종 쓰레기봉투까지, 없는 게 없다. 접시와 머그잔, 주걱, 고양이 사료까지 살 수 있다. 옆쪽에 있던 나무들은 모두 잘려나가고 그 자리는 주차장이 되었다. 사람은 익숙해지지 않으면서도 익숙해지기 마련이지, 그는 생각한다.

 

- "경험이란 그런 거죠. 삶의 우선순위가 한꺼번에 정리되고, 그 후론 제 가족에게 깊이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매일을 살고 있어요. 가족과 친구보다 더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 기쁨이란 고통이 없는 상태다.

 

- 두 사람은 결혼 초기에 많이 싸웠다. 올리브가 지금처럼 지긋지긋해하는 싸움도 많았다. 하지만 결혼 후 어느 시기가 되면 어떤 종류의 싸움은 더는 하지 않게 된다고 그 이유는 지나온 날이 남아 있는 날들보다 더 많아진 시점에서는 사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올리브는 생각했다.

 

- 커피 머그잔을 텅 내려놓는 저 아가씨는 언젠가는 자기 팔에도 검버섯이 피고 혈압약 때문에 오줌이 자주 마려워져 커피도 조절해서 마시게 되리란 걸, 인생에 갑자기 속도가 붙고 그러다 보면 인생이 어느덧 훌쩍 지나가버려 정말로 숨까지 가빠진다는 걸 알지 못한다고

 

- 누가 뭐래도 삶은 선물이라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수많은 순간이 그저 찰나가 아니라 설물임을 아는 것이라고.

 

- 그 가을 공기는 아름다웠고, 땀에 젖은 건장하고 젊은 몸뚱이들은 다리에 진흙을 묻히고 공을 이마로 받으려고 온몸을 내던지곤 했다.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호, 무릎을 꺾고 주저앉는 골키퍼, 집으로 걸어가면서 헨리가 올리브의 손을 잡던 날들이 있었다. 이런 날들은 기억할 수 있었다. 중년의 그들, 전성기의 그들, 그들은 그 순간을 조용히 기뻐할 줄 알았을까? 필시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정작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 소중함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올리브는 지금은 그 추억을 건강하고 순수한 것으로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축구장에서의 그 순간들이 올리브가 지녔던 가장 순수한 추억들인지도 모른다. 순수하지 않은 다른 추억들도 있었으니까.

 

-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낸다. 올리브는 생각한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올리브는 깊은숨을 내쉬며 나무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사실이 아니기도 하니까. 불과 일 년 전 새 방의 굽도리 널에 필요한 치수를 재려고 무릎을 꿇고 자를 들고 엎드린 다음 그녀가 받아 적도록 수치를 불러주던 헨리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리고 일어서던 키 큰 헨리를. "됐어, 올리. 개들을 오줌 누이고 시내로 가자구." 그리고 차를 탔었지. 무슨 얘기를 했더라? 아아, 올리브는 얼마나 기억하고 싶었던가. 그러나 기억할 수 없었던가. 시내로 들어간 다음, 목재 가게에 갔다가 우유와 주스가 필요해서 들렀던 '숍 앤 세이브'의 주차장에서 올리브는 차에 있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두 사람의 인생은 끝이었다. 헨리는 차에서 나와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고, 다시는 집으로 이어지는 자갈길을 걷지 못했고, 다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저 가끔씩 그 커다란 청록색 눈으로 병원 침대에서 올리브를 멀거니 바라볼 뿐.

그리고 헨리는 곧 눈이 멀었다. 이제 그는 다시는 올리비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요즘은 뭐 볼 것도 없어." 헨리를 찾아가 곁에 앉았을 때 올리브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밤마다 먹던 크래커하고 치즈를 안 먹으니 살이 좀 빠졌어. 그래도 내 몰골은 엉망이겠지만." 헨리는 이 말을 들으면 그렇지 않다고 할 터이다. 헨리는 이렇게 말하겠지. "오, 그렇지 않아, 올리. 내겐 당신이 예쁘기만 한걸." 그러나 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날은 휠체어에 앉아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올리브는 매일 차를 몰고 가서 그의 곁을 지킨다. 당신은 성녀야. 몰리 콜린스는 그렇게 말했다. 맙소사, 멍청한 여자 같으니. 그녀는 삶이 두려운 늙은 여자일 뿐이다. 요즘 올리브가 아는 거라곤 해가 멀어지면 잘 시간이라는 사실뿐이다. 사람들은 그럭저럭 살아낸다는 그 말. 올리브는 확신하지 못한다. 거기에도 여전히 파도는 있지, 올리브는 생각한다.

 

- 때때로, 지금 같은 때, 올리브는 세상 모든 이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한 그것은 점점 더 무서워지는 삶의 바다에서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이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담배 피우는 앤을 바라보며 생각하건대, 그런 안정감을 갖는 데 아버지가 각기 다른 세 아이가 필요했다면 사랑으로는 불충분했던 게 아닐까? 그리고 크리스토퍼, 아들은 왜 그토록 무모하게 이런 일을 감행했는가. 그리고 나중에라도 왜 내게 말을 하지 않았던가? 거의 어두워진 가운데 올리브는 앤이 몸을 앞으로 숙여 담배를 아기 욕조에 살짝 담가 끄는 걸 보았다. 치익, 작은 소리가 났고, 앤은 담배를 닭장 울타리 너머로 던져버렸다. 음, 말이라.

크리스토퍼가 앤이 토한다고 이메일을 썼던 건 사실이 아니었다. 올리브는 따스해진 한 손을 제 뺨에 대보았다. 아들은, 크리스토퍼이기에 결코 말할 수 없었다. "엄마, 보고 싶어요." 그래서 아내가 토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 그들은 이 자리에 있고, 그녀의 몸은, 늙고 뚱뚱하고 살갗이 축 처진 몸은 그의 몸을 처절히 원했다. 헨리가 죽기 전 몇 년 동안 자신이 이렇게 헨리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 슬퍼서 올리브는 눈을 감았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그렇기에, 지금 그녀 곁에 앉은 이 남자가 예전 같으면 올리브가 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그도 필시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지금 둘은 이렇게 만났다. 올리브는 꼭 눌러 붙여놓은 스위스 치즈 두 조각을, 이 결합이 지닌 숭숭 난 구멍들을 그려보았다. 삶이 어떤 조각들을 가져갔는지를.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이 좋은 이 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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