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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그냥 하지 말라(송길영 저 / 출판사 북스톤)

by hyeranKIM 2022.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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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집에서는 쉬고 직장에서는 일을 하고 이동하는 과정은 고단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능을 나눈 거죠. 지금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고 집에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자동차에서도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걸 넘어 다양한 형태의 일상을 살 수 있는 정도까지 우리의 삶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아예 새로운 것은 아니죠. 디지털 노마드라는 표현은 이미 존재했고, 제가 본 데이터에도 2015년부터 삶의 유동성이 관찰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그때에는 항구적인 삶의 터전을 이동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물리적 공간인 '일터'가 고정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재택근무를 하고 메타버스까지 등장하면서 일하는 장소가 굳이 어느 한 곳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의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술 발달도 돕습니다. 차박의 주요 이슈 중 하나가 냉난방, 수도나 전기입니다. 예전에는 자동차에 이를 구현하려면 엄청난 설비가 추가적으로 필요했지만 이제는 전기자동차가 나오면서 간단히 해결되고 있습니다. 즉 인프라와 기술발전 덕분에 사람들의 선택지가 넓어진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이제는 자동차가 하나의 커다란 전기 시스템을 갖춘 '공간'이 될 것입니다. 공간은 '경험'을 담는 장이죠. 즉 차에서 많은 경험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예컨대 집이 사무실이 되듯이, 이제는 이동하는 자동차도 사무실이 되지 않을까요?

 

- 우리가 차를 중심으로 경험을 이어간다면 어떤 삶을 맞을까요? 'Go, West!'를 외치던 미국 서부시대의 삶일 수도 있고,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가는 삶일 수도 있으며, 마젤란의 삶의 방식일 수도 있겠죠. 이런 식의 노마드 라이프가 구현된다면 우리 삶이 얼마나 다채로워질지 생각해 볼 법합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가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도와주거나 결핍되게 할지 바라봐야 하겠죠. 예컨대 노마드 라이프에서 공교육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온라인 교육일 수도 있고 지역마다 준비한 일정한 스테이션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혹은 홈스쿨링이 주가 될 수도 있겠죠.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이런 다변화된 삶을 우리 업이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해 볼 일입니다. 트럭 운전사를 위하 휴게소처럼 중간중간에 샤워 등이 가능한 쉼터를 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 삶의 거주를 어떻게 할지도 재정의해야겠죠. 기존에는 내 주소가 붙박이로 있었는데 노마드 라이프에서는 '지금은 OO'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에 따른 나의 귀속감, 정체성, 사회적 인프라도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 전체적인 소득 수준이 높아졌고 삶에 대한 기준이 올라갔고 기술이 발달했고 이 모든 것이 풍요한 삶을 가능케 할수록 우리는 더 나은 삶을 희망하고 욕망합니다. 그런 이유로 예전 같았으면 '굳이 거기까지 할 필요가?' 했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디테일에 대한 요구가 적었지만 지금은 당연해집니다. 그 당연한 섬세함이 풍요로운 삶을 만드는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당에 카페에 못 가게 되었다고 해서 집에서 아무 커피나 마실까요? 아니죠. 커피 마시는 시간을 좋아하게 된 이들은 집에 있을 때에도 카페에서의 경험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에 따라 나의 취향을 만족시킬 만큼 훌륭한 전자동 에스프레소 머신 같은 설비가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커피 머신에 굉장한 투자를 한 상태이니 머신에 들어갈 원두에 대한 취향도 올라갑니다. 갓 볶은 신선한 원두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이제는 정기적으로 원두를 배송하는 서비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외부에서 수행하던 많은 기능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취향과 전문성도 집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홈 트레이닝도 오롯이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네트워크로 연결된 외부 강사의 지도를 받아 가며 본격적으로 합니다. 펠로톤이 그렇고, 룰루레몬도 원격으로 운동 코칭을 하는 미러를 인수하며 이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집에 디바이스가 들어오고 외부와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설치됩니다. 이런 변화가 산업에는 모두 기회가 됩니다. 물론 일부 기존 산업에는 위기가 되겠죠.

 

- 지난 16년간의 데이터를 다시 살펴보니 주목해야 할 변화상으로 꾸준히 다루었던 3가지 중요한 화두가 보였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은 코로나로 속도가 더 빨라졌고 앞으로 더 강화될 변화입니다. 말하자면 '변화의 상수'입니다. 지금부터 이 3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변화의 상수 1: 분화하는 사회

첫 번째 키워드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혼자'입니다. 흔히 한국 사람들은 밥심으로 산다고 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났을 때 밥 먹었냐고 인사처럼 묻습니다. 그만큼 밥이 중요한 문화예요.

 

- 2010년에 나온 한 월간지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혼자 먹고 혼자 놀고 혼자 술 마시고 혼자 여행 가고."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늘어날 것 같다면서, 신촌의 어느 식당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있는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의 모습과 함께 이것이 참 신기하다고 한 것이죠. 그때만 하더라도 식당의 기본 식단 구성은 4인상이었습니다. 한국의 식사가 반찬을 나누는 구조로 돼 있어서 식당은 4명이 와야 이문이 많이 남으니 식당 종업원이 '몇 분이세요?'라고 물으면 혼자 왔다고 말하기가 괜히 미안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혼자 밥 먹는 게 일상화돼 이제는 혼자 식사하는 사람의 시선을 보호해 주는 칸막이도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혼자 밥 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죠. 이게 불과 10년 밖에 안 된 일입니다. 10년 만에 우리 사회는 1인 사회로 빠르게 분화하고 있었습니다.

 

- 나아가 이 흐름이 계속된다면 1인 사회로의 분화를 넘어 가족의 해체까지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는 '사람 구실'이라는 게 결국 누군가의 엄마 아빠 아들딸이라는 관계 역할을 하는 것에서 출발했는데 그게 희미해지는 겁니다. 전통적으로 가족은 재화를 조달하고 가사노동을 하고 유대를 강화하는 등 가정이 유지되는 데 필요한 각종 역할과 책임을 서로 나누고 서로에게 의지했는데 그런 기능이 하나둘 외주화되며 축소되고 있습니다. 딜리버리 서비스를 비롯해 각종 가사노동이나 행정업무 아웃소싱 서비스가 성업 중이고, 반려 산업도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가족의 의미가 희미해졌기 때문에 이런 산업이 뜨는 것일 수도 있겠고요. 좋든 싫든 가족이 내 삶의 안전판이자 나를 지지해 주는 존재였다면 가족의 기능이 외주화되고 관계는 단속적으로 변하면서 가족이 차지하던 절대적인 의미가 축소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결혼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는 그 행위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딱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 비혼과 비출산을 택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사회로 예전부터 변화하고 있었다면 10~20년 후의 모습도 예상해 볼 수 있겠죠. 지금이야 혼자 살더라도 부모님이 편찮으시면 병원에 모시고 가며 자식 된 도리를 하려고 애쓰는데, 혼자 사는 사람이 노년이 되면 누가 그런 역할을 해줄까요? 우리 사회의 취약한 사회보장을 보완했던 게 강력한 효도 시스템이어서, 자손이 없으면 노년의 삶이 어려워지기 십상이었습니다. 아파도 병원에 가기 힘들고 등록하고 문진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자손 없이도 건강하고 인간다운 노년을 보내려면 사회나 개인이나 효도에 대한 강박을 없애고 독립된 개체로 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지원해야 합니다. 사회보장 시스템이 그만큼 발달해야 하는데 쉽지는 않아 보이고 각자도생으로 가기 십상인데 이 또한 만만찮은 과업입니다. 효도 시스템을 외주화할 만큼 엄청난 부를 쌓든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야겠죠. 이 점을 먼저 깨닫고 꾸준히 독서하고 운동하는 생활습관을 가진 어르신들처럼 말입니다. 자신의 생산성과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의 혁신을 계속 해나가야 합니다. 기술과 세상이 바뀌는 속도에 뒤처지지 않도록 스스로 업데이트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 변화의 상수 2: 장수하는 인간

한국은 시니어층의 스마트폰 사용률이 엄청나게 높습니다. 손주 사진을 편집해서 카카오톡에 킬러 콘텐츠로 공유하는 작업을 할아버지 할머니가 하십니다. 유튜브도 많이 보고, 지인들끼리 밴드 앱에 모여서 커뮤니티 활동을 합니다. 어느 나라 시니어들이 이만큼 할까요. 한국은 스마트폰을 다룰 줄 모르면 또래와 어울리기 힘들어서 구민센터에서 나이 든 분들을 위한 강좌를 열어 가르쳐줄 정도입니다. 이분들도 충분히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향유하는 수용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점을 놓치지 않고 배려하는 것도 중요한 과업이자 산업의 기회가 되겠죠. 이제는 여러분의 부모님께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쏴드리면 아주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변화가 모든 연령층을 다 포괄해서 종합적으로 움직이고 연령대별 차이가 줄고 있어요. 그렇다면 시니어에 대한 배려가 너무 많을 필요는 없을 테고 오히려 지나친 배려를 싫어할지도 모릅니다. 시니어라 지칭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젊으니까요. 굳이 말한다면 '건강에 신경 쓰시는 분' 정도면 충분하지, 예전처럼 '올드' '시니어' '그레이' 같은 표현 자체가 적합하지 않다는 거죠.

 

- 변화의 상수 3: 비대면의 확산

이제는 소량의 생필품도 한 시간 이내에 배달해 주는 퀵커머스 서비스가 시작되었으니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는 편의점마저 생존의 위협받기 시작했습니다. 세탁소는 세탁 어플에 대체되고 있고요. 플랫폼 서비스로 가상화, 무인화되는 흐름 앞에 동네 상점이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둘 비는 상점에 세계 과자 전문점, 아이스크림 전문점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전에는 인형 뽑기 가게가 있었고요. 이들 가게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무인으로 운영돼 직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인화가 가능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기술이 발달해야 합니다. 사람이 없어도 운영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둘째는 공급자와 소비자가 무인화를 수용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한국 사람들은 첨단 기술을 몹시 좋아하고 빠르게 습득합니다. 하다못해 스크린 골프장도 셀프서비스라 알아서 다 해야 하는데 그걸 다 합니다. 기술을 수용하는 인텔리전스가 매우 높아 무인 서비스에 대한 수용성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의 무인화 흐름이 단순히 기술 발달이나 우리의 수용력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관계 맺기에 대한 우리의 생각 변화 때문에 더 빨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직원 없는 가게가 들어오는 이유로는 아무래도 인건비 상승을 무시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점원을 두지 않으니 오히려 손님들이 좋아해요. 최근 저희 동네에 카페가 문을 열었는데 무인 카페였습니다. 일하는 분은 아침에 와서 한 시간 청소하고 물건만 채우고 떠나고 그다음부터 매장에 있는 사람은 손님뿐입니다. 그런데 그 손님이 적지 않았습니다. 점원이 없으니 가는 것입니다. 동네 카페는 오래 있으면 사장님이 눈치를 주는데 여기는 눈치 줄 사람이 없거든요. 인건비가 없는 만큼 더 싸기도 하고요.

 

- 그러면 앞으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당연히 렌털 서비스는 무인화될 것이고 접점이 있는 리테일 서비스도 자동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일자리가 사라지겠죠. 정수기 관리 직원이 필요 없어진 것처럼, 생명보험회사 설계사도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로봇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드는 무인 카페도 이미 확산되는 중입니다. 으레 이런 매장에는 벤딩 머신이 있어서 바나나나 샐러드 같은 것들을 파니 인근 편의점 매출도 타격을 입겠죠. 이런 변화를 기존에 종사하던 분들과 소상공인 모두가 유연하게 흡수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 또한 일어날 일이었고, 일어나고 있던 변화입니다. 사람들이 대면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내용이 예전에도 있었어요. 특히 전화 통화를 꺼리는 현상은 밀레니얼의 특성으로까지 부각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특정 세대만의 특징은 아니라는 것이죠.

 

- 이렇게 전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데 콜센터가 계속 유지될까요? 이미 전 세계 많은 기업이 콜센터의 기능을 자동화해서 챗봇 서비스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활성화되고 있죠. 애초의 의도는 인건비 절감이었는데 이게 웬걸, 비용 절감은 둘째치고 밀레니얼 이하의 사용자들이 챗봇을 선호하는 모습이 관찰되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더욱더 챗봇으로 가게 될 거고, 머잖아 인공지능이 언어 인식 및 합성까지 진화할 테니 설사 전화를 하더라도 로봇에게 하지 사람에게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 환경이 바뀌면 과거의 계획은 무의미해집니다.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삶에 대한 우리의 정의와 그에 따른 준비를 돌아보아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 밀레니얼뿐 아니라 Z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릴 정도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익숙합니다. 테크놀로지에 대해서도 이전 세대에 비해 장벽이 낮고요. 테크놀로지에 대한 정의 중 제가 좋아하는 것은 "당신이 태어난 다음에 나온 것 Technology is anything invented after you were born, everything else is just stuff"이라는 말입니다. 컴퓨터과학자 앨런 케이 Alan Kay의 말인데, 한마디로 내가 새로 배워야 하는 신기한 게 테크놀로지라는 거예요. 저에게 스마트폰은 테크놀로지입니다. 그래서 처음 쓸 때 적잖이 애를 먹었죠. 반면 1996년 이후 태어난 Z세대는 스마트폰이 너무 쉬운 기술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나고 영상으로 대화하는 데 익숙합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기계와의 대화를 배웠다는 것이 데이터에 나타납니다. 아기의 첫마디가 아마존의 AI 스피커를 부르는 '알렉사'였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요. 실제로 두 돌도 안 된 꼬마가 태블릿 PC를 척척 쓰는 걸 보고 신기해하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오히려 책이 어렵습니다. 확대도 안 되고 클릭도 안 되니까요. 그래서 손가락을 벌려보고 꾹꾹 눌러도 보다가 결국 책에 화를 냅니다. 이 아이에게 책은 적합한 미디어가 아닌 거예요. 저는 여전히 종이책이 좋습니다. 손에 잡히는 물성이 좋고, 페이지를 넘길 수 있고 꽂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다음 세대는 "검색이 안 돼? 그걸 어떻게 봐?"라고 합니다. 이런 차이는 각자에게 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생각대로만 판단하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이들 디지털 네이티브를 가리켜 '네이티브 프로듀서'라고도 합니다. 그전까지는 창의적 활동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정도였다면 이들은 디지털 디바이스를 이용해 멀티미디어를 만들고 그걸 기반으로 더 많은 창의활동을 자연스럽게 해오고 있습니다.

 

- 우리가 그동안 재택근무를 기피했던 이유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기보다는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계속 만나왔으니 누군가가 '안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의문을 품어도 '굳이 왜?'라고 하는 거죠. 마치 하루 세 끼를 먹고 밤에는 잠을 자는 것처럼 우리 몸에 익은 자연스러운 관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관습은 삶을 안정적으로 이어주는 노하우이자 버릇이어서, 그것을 깨려면 사고의 체계를 바꾸어야 합니다. 쉽지 않죠. 게다가 재택근무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도 있었고요. 그러다 이번에 해보니 해볼 만하다는 걸 실감한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비단 재택근무일 뿐일까요?

'학생은 학교에 가야지'라는 믿음은요? 온라인 교육이 대신했습니다. 또 있죠. 노동하지 않는데 돈을 주는 건 온당치 않다는 것이 우리 사회 많은 이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본소득제를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고요. 그러나 이번 재난으로 생계의 어려움에 직면한 이들이 많아지자 전격적으로 재난지원금을 지급했습니다. 복지를 넘어 생존의 차원이 되자 합의가 빨라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알던 믿음이 하나둘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가 어딘가에 고용되면 그 울타리 안에서 평생 보상받을 것이라는 항구적 약속이나 그에 대한 고마움 역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종신고용이라는 과거의 묵시적 계약이 무효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이를 '가치관의 액상화(liquefaction)'라 표현합니다. 액상화란 지진이 일어난 후 지반이 약해져서 기존의 건물이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흔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의 생각, 기저의 가치관이 마치 지진이 일어난 후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이 변화가 다른 것도 바꾸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흔들리면 다 바뀌기 때문입니다.

 

- 예전에는 호미를 팔고 싶으면 장터에 나가 목청 높여 호객을 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세계화, 플랫폼화되었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작은 일을 하더라도 그만큼의 전문성을 갖추지 못하면 경쟁이 어렵습니다. 요구받는 역량의 깊이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가상화되기 시작했죠. 비대면, 무인화 등이 가속화되면서 우리 상품의 장점과 훌륭한 조건을 다양한 형태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처럼 만나서 소통하고 설득하지 않게 되면서 어떻게 나의 의견을 정돈하고 전달하고 협업할 것인지도 새로운 고민거리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여기에 자동화가 더해집니다. 기계와 협업할수록 우리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지만 직업적 안정성은 예전 같지 않을 게 분명합니다. 그럴 때 인간은 어떤 형태의 일을 할 것인지가 새로운 도전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교육 시스템과 개인의 경쟁력을 어떻게 새로 확보해야 할까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지금은 저성장 시대입니다. 이제는 과거처럼 무한 확장이 어렵고, 지구온난화 등 환경 이슈 때문에라도 예전과 같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지양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헐값에 많이 파는 대신 더 정교하게 경쟁력을 다듬어서 부가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 기존의 관성이 힘을 쓰지 못하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격차가 만들어집니다. 미국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 UC 버클리 교수는 코로나 팬데믹이 새로운 형태의 계층화를 심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새로운 계층은 4가지로, 첫째는 원격층(The Remotes)입니다. 공간 제약을 받지 않는 전문적 기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필요한 자원이 모두 디지털에 있어서 노트북만 있으면 일할 수 있죠. 온라인으로 일할 수 있는 투자자, 개발자들은 비대면 세상에서도 어려움 없고 심지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필수적 일을 하는 사람들(The Essentials)입니다. 공공서비스를 하는 분들은 일자리를 잃을 염려는 없지만 위험한 환경에 더 많이 노출되기에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의료 서비스 종사자가 단적인 예죠.

세 번째는 실직자(The Unpaid)들입니다. 이번 코로나에 외식업이나 여행업은 일자리가 줄어서 많은 분들이 힘들어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심란한데, 더 무섭게도 마지막 계층이 있습니다. 바로 잊힌 층(The Forgotten) 아예 보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수감자, 홈리스, 무국적 노동자 등은 의료공백으로 생계의 레벨이 아니라 생존까지 위협받는 상황입니다.

 

- 유발 하라리는 인간에게 흥미로운 형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허구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허구를 집단적으로 함께 믿는다는 것이죠. 예컨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물자를 잃으면 당연히 상심하게 됩니다. 그때 상심한 채로 무력감에 빠지면 다시는 배를 만들고 탐험에 나설 수 없겠죠. 그때 인간은 무엇인가 설명하려 노력합니다. 이런 식이에요.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절대 존재가 바다 밑에 있는데, 우리가 했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경고하려고 배를 침몰시킨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목숨과 재물을 보존하려면, 그분이 원하는 대로 착하게 살고 제물을 바치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심청이 인당수에 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려 노력합니다. 그래야 안온감을 느끼고 두 번째 세 번째 시도를 할 수 있으니까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공통의 믿음을 가진 덕에 협력할 수 있고 화폐나 국가 같은 것을 만들어 더 큰 문명을 이룰 수 있으며, 그 덕분에 근육도 변변찮은 인류가 이 행성의 지배 종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공통'입니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돈이라고 했을 때, 혼자 믿으면 교환이 안 되고 모두 다 믿어야 화폐로서 교환되고 가치가 보존되는 거죠. 이게 바로 '공통의 상상(Collective imagination)'이라는 개념입니다.

 

- 정말 훌륭한 사람은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하는 사람이에요. 많은 산업 또는 학문의 전문가들이 그들 사이에 통용되는 나름의 언어를 만들고 그들끼리는 쉽지만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그리고 정말 나쁜 사람은 쉬운 얘기를 어렵게 합니다. 상대방의 무지 혹은 정보의 격차가 자신의 헤게모니를 키워주기 때문에 일부러 못 알아듣게 말하는 거예요.

 

- 이제는 기존처럼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보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행위란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어서 정해진 진도를 나가는 건데, 유튜브만 봐도 세상에 수많은 지식과 그에 따른 엄청난 지혜가 있는데 그걸 어떻게 다 가르치나요. 이제는 내가 배우고 싶은 걸 정의하고 그것을 스스로 체크해야 합니다. 즉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 배울 범주를 정하고 그것을 나의 본진으로 삼는 것이죠. 그에 따라 현명해지기 위한 정보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찾는 작업, 곧 얼개를 만드는 작업이 교육의 역할이 될 테고 나머지는 매체를 통한 자가학습으로 가지 않을지 조심스럽게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 이성적 판단이 가능하려면 측정이 중요합니다. 피터 드러커는 일찍이 "측정할 수 없으면 개선할 수 없다(If you can't measure it, you can't improve it)'라는 금과옥조를 전해주었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고칠 수 있는 것이죠. 우리 아이가 수학을 못한다면 집합이 문제인지 연산이 문제인지 알아야 고칠 수 있지, 종합적으로 수학을 못한다고만 하면 결국 수포자로 끝나게 됩니다. 과학적 의사결정의 출발점은 인풋이에요. 측정을 통해 인풋과 아웃풋의 연관관계를 이해해야 이를 기반으로 결과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 달라진 세상에서 누구나 적응을 요구받고 있는데 왜 누구는 유난히 적응이 어려울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기존의 법칙이 항구적일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변화하는데도 눈 감고 귀 닫고, 한마디로 생각하지 않고 관성처럼 예전의 방식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세상이 변화하는 동안 내 경쟁력의 현행화를 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일에 대한 나의 전문성이 떨어졌다는 뜻이니까요. 요즘에는 순수예술 하는 사람도 포토샵 같은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배웁니다. 나의 작품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몰라도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디지털 디바이스가 기본 툴이 되었기 때문에 배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툴에 대한 숙련도는 일에 대한 준비성, 현행화의 기본 요소입니다.

셋째, 지금 이 시스템이 최대한 유지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면 순진하거나 무능한 게 아니라 사악한 거예요. 실제로 기업 강연을 가서 사회가 투명성을 요구한다는 말을 하면 정년이 얼마 안 남은 분들에게서 꼭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렇게 쉽게 안 바뀐다고요. 강연에서 현행화와 적응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열심히 말해도 나중에 식사하며 대화해 보면 어떤 화제를 꺼내든 결국엔 '3번 아이언'으로 대화가 흐르는 분도 봤습니다. 나는 골프를 안 친다고 백번 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관심도 아는 것도 없으니 그 얘기밖에 안 하는 거죠.

 

- 단계별로 증거가 남기 시작하면, 과정의 충실함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 투명성을 기반으로 성실함의 가치가 재정의될 것입니다. 무임승차자가 사라지고 일의 단계가 줄어들겠죠. 그러면 중간의 무임승차자는 어디로 갈까요?

 

- 우리 삶에 투명성을 반드시 탑재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나우 데이터로 기록되는 시대임을 잊지 마세요. 투명한 시대에는 의사결정 과정과 근거, 나아가 우리 삶 또한 투명해야 합니다. 투명성의 가장 큰 이슈는 단계별 충실함입니다. 지금까지는 끝이 좋으면 좋은 거였는데, 이제는 모든 단계가 좋아야 해요. 과정이 중요해집니다. 과거에는 과정의 중요성을 주로 '어떻게 효율을 높일지'의 범주로 생각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절차적 정당성'의 이슈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해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 이미 잘하는 사람들을 뽑는다면 매니지먼트도 감시가 아니라 구성원 스스로 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되겠죠. 나는 일하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그걸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관리자가 보고서 줄맞춤과 오타를 잡았다면 이제는 각자 일을 하고 합치는 형태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모두에게 책임과 권한이 양여되어야 합니다. 누군가 의사결정을 부탁하고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알아서 전문성을 기반으로 완성시켜 오고, 그것을 조합하는 일을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전통적인 개념의 관리자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 일상의 모든 행위는 의미가 있고 욕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커피 한잔해요'라는 말도 연인 사이에서는 데이트를 의미하지만, 직장 상사가 하면 뭔가 심각한 얘기의 예고편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커피 마시는 행위는 일과를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부스트업일 수 있겠고요. 각각의 커피에 투영된 욕망이 다르고, 그 욕망에 따라 소비가 달라지는 거죠. 노동의 커피는 캔커피이고, 아침에 일어나서 마시는 커피는 드립이지만 때로는 에스프레소가 더 적합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소비하는 행위 자체가 특정 의미를 구현하고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지금까지는 필요에 의해 무언가를 사고 썼는데, 이제는 필요를 넘어 감성이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소비한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물질 소비가 아닌 의미 소비입니다.

그렇게 변화한 이유는 풍요로워졌기 때문이에요. 특히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자란 밀레니얼 이후 세대들에게 소비는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의 하나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브랜드가 나를 표현하는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 이제는 스스로의 흔적을 남기고 성장의 기록을 채록하는 것이 곧 나의 프로파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직접 하셔야 하고요. 둘째,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 성장 과정이 나의 자산으로 환금될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문화적 자본이니까요. 그리고 그게 나의 업이 될 테니까요.

 

- 첫째, 이성적 사고입니다. 데이터가 남고 각자의 기록이 나의 메시지가 되기에 생각 없이 시도하면 안 됩니다. 특히 만나지 않은 채 협업하는 세상에서는 이성적 사고가 무척 중요합니다. 이제는 데이터 리터러시, 통계적 해석 능력,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 능력이 누구에게나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이 3가지는 말하자면 똑똑해지기 위한 플랫폼이에요. 내가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같이하려면 공인된 정보를 공유해야 하는데, 이는 데이터와 시스템과 리터러시의 합으로 만들어집니다.

둘째는 업의 진정성입니다. 이성적 사고가 충족되면 자신의 업에 대해 다시 정의하고 적용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진짜 자기 것이어야 하고 서로 어긋남이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업무에 필요한 전문적 지식은 당연히 요구될 것입니다. 자기다움에 대한 추구, 직업윤리도 필요하고요. 진정성이란 곧 자기다움의 윤리니까요. 직업이라는 것 자체가 여럿이 합의한 분업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사회적 역할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 이렇게 진정성을 기반으로 협업하는 것은 결국 공존으로 연결됩니다. 그것도 성숙한 공존입니다. 지금까지는 공존이 '너는 이거 써, 난 이거 쓸게' 하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서로가 배려하고 함께함으로써 공공선을 만들 수 있는 공동체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관계가 폭증했기 때문이에요. 과거에는 100명 정도만 만났다면 이제는 디지털로 백만 단위까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관계가 확장됐습니다. 확장된 만큼 공존의 개념 또한 더욱 성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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