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삶에 마지막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외부적 환경이나 상황 등 그들의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 존재 자체다. 막대한 명예나 부를 일군 사람이든 비극적인 트라우마 피해자든 그들의 외적 조건 이전에 그들이 한 명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에 오롯이 집중하다 보면, 그들의 존재 내면에서 그들이 살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나는 돌에 새기듯 깨달았다.
- '나'가 흐려지면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마음의 영역에선 그게 팩트다. 공황발작은 자기 소멸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이 버둥거리며 보내는 모스부호 같은 급전이다.
- 오랜 경력의 인부들도 힘들어하는 그랜드 피아노를 혼자서 옮기는 전문 이사꾼이 있단다. 피아노의 어느 지점에 집중적으로 힘을 모아야 피아노가 중심을 잃지 않고 들리는지를 몸으로 익힌 사람이다. 이는 피아노의 구조와 무게 중심을 오랜 경험을 통해 몸으로 체득해서 가능한 일이다. 그랜드 피아노를 혼자서 들어 올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 철옹성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정확한 한 지점도 그랜드 피아노처럼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알면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 지점이 바로 한 개별적 존재로서 그 사람의 고유한 '자기'다.
- 심리적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어지지 않고 계속 공급받아야 하는 산소 같은 것이 있다. '당신이 옳다'라는 확신이다.
-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데 '너는 옳다'라고 지지해 주면 상대가 오판하지 않을까. 자만심에 빠져 결국 잘못되지 않을까. 쓴 약처럼 따끔한 말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게 어른다운 걱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의외로 많다. 아니다. 그건 사람을 어리석고 표피적인 존재로만 상정하는 틀에 박힌 생각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오만한 시선이다.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의 내용 자체를 메시지의 전부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그 말이 내포한 정서와 전제를 더 근원적인 메시지로 파악하고 받아들인다.
- 가장 절박하고 힘이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네가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옳다'라는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수용이다. '너는 옳다'라는 존재에 대한 수용을 건너뛴 객관적인 조언이나 도움은 산소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에게 요리를 해주는 일처럼 불필요하고 무의미하다. '저 사람은 지금 내가 산소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시키는 인증 작업일 뿐이다. 호흡이 가빠 산소 호흡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양념치킨을 시켜준다면 고마운 일도 아니고 도움이 될 리도 없다.
- 내가 틀린 게 아니구나. 내가 잘못된 게 아니구나. 내가 비정상이라서가 아니구나 안도하게 해서 그다음 행보를 어떻게 할지 쉽게 결정하게 한다.
- 나는 그런 때 언제나 "그렇구나,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지쳤구나, 다 불태워버리고 싶을 만큼 화가 나는구나, 그럴 만한 일이 있었나 보구나"라고 온 체중을 실어 말한다. 그다음에 "그런 맘을 들게 했던 그 일이 구체적으로 뭔데?"라고 묻는다. 그가 누구이든 어떤 상황의 하소연이든 예외 없다. 사람은 괜히 집을 나가지 않으며 괜히 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물며 괜히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없다.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스스로 백 가지 이상은 찾아본 이후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 우선적으로 그 마음을 인정한다. 그런 마음이 들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그러니 당신 마음은 옳다고. 다른 말은 모두 그 말 이후에 해야 마땅하다. 그게 제대로 된 순서다. 사람 마음을 대하는 예의이기도 하다.
- 기회가 왔다 싶으면 예의를 차릴 여유가 없다. 과도한 나 드러내기는 평소에 한 개별적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삶들이 많아서라고 생각한다. 만성적인 '나' 기근이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 나는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곤 한다. 단둘이 만난 자리뿐 아니라 여럿이 만나 얘기를 하는 자리에서도 그렇다. 어떤 모임이어도 이 뜬금없어 보이는 말이 끼어들 틈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야기가 공허하거나 무의미하게 맴돈다고 느낄 때 묻는다. 이 질문을 던지면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다. 질문 전후 이야기의 질이 확연히 달라지기도 한다. 별말 아닌 것 같지만 존재 자체에 대해 주목이어서 그렇다. 심리적으로 벼랑 끝에 있으면서도 낌새조차 내보이지 않고 소리 없이 스러지고 있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라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는 질문 하나가 예상치 않게 '심리적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질문은 심장 충격기 같은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
- "상담 선생님에게 얘기를 듣고 엄마는 진짜 놀랐어. 네가 그렇게 힘든 줄 엄마가 미처 몰랐어. 미안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네 마음은 지금 어떠니?" 아이의 눈에 엄마가 눈을 맞추고 그렇게 직접 물어야 한다.
- 질병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반응이 때로 가장 효과적인 치유다. 그것이 사람 마음에 더 빠르게 스미고 와닿는다. 그런 일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탁월한 치유자가 된다.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라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피하지 않고 물어봐 줄 수 있고, 그걸 들으면서 이해하고, 이해되는 만큼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도움이다.
- 그 누구도 함부로 내 주권을 침범할 수 없다.
상대방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경계를 침범하는 행위다. 주권이 훼손되면 사람은 모욕감, 모멸감, 수치심과 함께 그로 인한 분노가 생긴다. 이런 감정들이 올라온다면 내 경계가 침범당하고 있다는 신호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40대 미혼 여성 A가 있다. 동갑내기 남자와 긴 연애 끝에 결혼을 결심했는데 홀로 사는 엄마의 반대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대상포진까지 생길 정도였다. 남자는 괜찮은 직장과 높은 연봉, 수수한 외모를 가졌다. 누가 봐도 멀쩡한 남자를 반대하는 엄마의 반대 사유는 남자가 전문직이 아니어서다. 나중에 자기 딸에게 얹혀살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읍소도 하고 선물 공세 등으로 설득도 해봤지만 엄마는 완강했다. 결혼을 강행하고 싶지만 그러다 엄마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그 죄책감을 어쩌느냐며 눈물지었다. 얼핏 그녀는 엄마의 마음을 배려하는 효녀 같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와 엄마 사이의 경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사람이다. 주권을 빼앗기고도 수치심이나 모멸감, 분노 등을 또렷하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경계가 무너졌는데 그걸 인식하지 못한 채 불필요한 노력을 하며 진을 빼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최선을 다하는 건 공중에 대고 쏘아대는 총 쏘기다. 목표물과 상관없는 사격이니 아무리 많이 쏴도 헛일이다. 그녀는 국경 수비대가 한 명도 없는 나라 같다. 엄마가 경계를 허물고 침략군처럼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의사결정 영역까지 쳐들어왔는데 나가라는 말도 못 하고 맞서 싸우지도 못한다. 한술 더 떠 침략군은 쳐들어오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겠느냐며 울고 있는 것이다. 칼로 자기를 찌르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 팔은 얼마나 아프겠느냐고 공감하는 격이다. 자신이 찔리고 있다는 자각이 없으니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에게도 '나중에 여자에게 빌붙어 살 위인'이라는 괜한 모욕감을 안겨준다. 엄마와 자기 사이의 경계를 지키지 못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는 무례한 사람이 된 것이다. 자기 경계를 지키지 못하면 자기 보호도 못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는 상대적인 가해자가 된다. 그녀의 엄마는 딸의 남자친구에 대해 맘이 든다, 안 든다는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 거기까지가 전부다. 결혼을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는 결정은 엄마의 몫이 아니다. 그럴 권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 결정권을 쥐고 있는 듯 딸이라는 타국의 국경을 허물고 들어와 그 나라의 주권을 침탈한 침략군이 됐다. 그런 상황인데도 침략군 엄마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갑 자신보다 더 갑을 염려해 주는 을이나 병 같다. 경계가 무너진 사람의 안쓰럽고 부적절한 태도다. 백번 양보해도 엄마에 대한 과잉보호다. 딸의 입장에서는 걱정돼서 그렇다고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다. 사람에 대해 잘 몰라서 그렇다. 사람이 개별적이고 독립적 존재라는 말은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과 관계의 변화에 따라 주체적으로 끊임없이 적응해 가는 존재라는 의미다. 노인이나 어린아이, 성인 누구나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로 독립적이고 온전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가진다. 딸의 남자친구가 맘에 안 들어도 그 남자가 딸의 남편이 되고 자신의 사위가 되면 그 관계에 맞춰 사람의 마음과 판단은 또 달라진다. 달라진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고 적응해서다. 적응은 인간의 본능이다. 끝내 적응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한 불행감은 엄마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런 대화 끝에 그녀는 결혼을 감행했다. 그녀의 엄마는 여전히 사위를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건강하게 산다. 사위에 대한 탐탁지 않은 엄마의 감정은 딸이 해결해 줘야 할 과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은 엄마 자신이 해결해야 할 엄마의 숙제다. 딸의 경계 바깥에서 벌어지는 엄마 영역 안의 엄마 과제다. 엄마가 힘들어하면 경계 바깥에서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딸인 자신의 책임이거나 딸이 제대로 하지 못한 무엇 때문은 아니다. 그런 경계를 분명히 자각하고 엄마의 몫으로 돌려줘야 엄마의 감정도 딸이 개입할 때보다 더 빠르게 수습된다. 딸이 경계에 대한 인식 없이 계속 개입을 하면 엄마도 자신의 불편하고 싫은 감정이 딸 때문이라고 여기게 된다. 자신의 과제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는 한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엄마의 과제를 엄마에게 돌려줘야 한다.
- 사람들은 누가 죽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그 마음에 대해 자세히 묻는 것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라 여긴다. 아니다. 정반대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심각한 내 고통을 드러냈을 때 바로 그 마음과 바로 그 상황에 깊이 주목하고 물어봐 준다면 위로와 치유는 이미 시작된다. 무엇을 묻느냐가 아니고 나에게 집중하고 나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치유이기 때문이다. 죽고 싶은 마음에 대해 묻기 시작하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죽고 싶은 마음 언저리에 있는 그 사람의 일상에 대해 묻고 듣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일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지다가 그 일상과 '그의 죽고 싶은 마음'의 연결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또 물으면 된다. 어떤 것을 묻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는데도 그 고통이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외면되지 않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 인간의 마음이나 감정은 날씨 같다. 춥기도 하고 덥기도 하고 화창하고 맑다가 바람이 불기도 하고 태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예고 없이 지진이 일어나기도 하고 쓰나미가 덮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지개가 걸린다. 모른 체하는 데 일등이 있다면 날씨가 그렇다. 지금 날씨가 좋아도 주변의 고기압과 저기압이 만나면 내 머리 위로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도 한다. 이 움직임과 변화 모두 지구와 대기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태풍이나 쓰나미가 우리 일상을 벼랑 끝으로 몰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구의 병은 아니다. 추우면 소름이 돋고 무더우면 땀이 흐르지만, 그것은 잘못된 현상도 병에 걸린 것도 아니다. 땀이 나 소름 때문에 불편할 순 있지만 약 먹을 일은 아니다. 내 몸의 체온을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 몸이 알아서 대응하는 중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감정도 그렇다. 슬픔이나 무기력, 외로움 같은 감정도 날씨와 비슷하대. 감정은 병의 증상이 아니라 내 삶이나 존재의 내면을 알려주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울은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단단한 벽 앞에 섰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감정 반응이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라는 벽, 하루는 24시간뿐이라는 시간의 절대적 한계라는 벽 앞에 있다. 인간의 삶은 벽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울한 존재다. 그러므로 우울은 질병이 아닌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다. 병이 아니라 삶 그 자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울의 질곡에 빠지면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아 평생 우울의 감옥 안에 갇혀 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득하고 막막하다. 홀로 헤쳐 나가기 버거울 때도 많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다. 그럴 때 내게 필요한 도움은 일상에 밀착된 '도움이 되는 도움'이어야 한다.
- 누군가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충조평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화가 시작된다. 충조평판은 고통에 빠진 사람의 상황에서 고통은 제거하고 상황만 인식할 때 나오는 말이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제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 리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비수일 뿐이다.
- "그런 생각은 잊어. 너한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충조
"그럴수록 네가 더 열심히 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지." 충조
"긍정적으로 마음을 먹어봐." 충조
"그건 너를 너무 사랑해서 한 말일 거야." 평판
"네가 너무 예민해서 그런 거 아니야?" 평판
"남자는 다 거기서 거기야, 별다른 사람 있는 줄 아니." 충조평판
-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 공감은 상대를 공감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깊은 감정도 함께 자극되는 일이다. 상대에게 공감하다가 예기치 않게 지난 시절의 내 상처를 마주하는 기회를 만나는 과정이다. 이렇듯 상대에게 공감하는 도중에 내 존재의 한 조각이 자극받으면 상대에게 공감하는 일보다 내 상처에 먼저 집중하고 주목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따스하게 물어줘야 한다. 언제나 나를 놓쳐선 안 된다. 언제나 내가 먼저다. 그게 공감의 중요한 성공 비결이다.
-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정확하게라는 말은 대화의 과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감에는 과녁이 있다. 과녁에서 멀어지는 대화는 지리멸렬해진다.
- 상대방은 힘들고 다급해 보이는데 내가 피곤하고 심란해서 공감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때도 우선은 자기 보호다. 자기 보호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가 힘들어 보인다고 개입하는 것은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다급한 마음에 무작정 뛰어드는 것과 같다. 둘 다 불행해진다. 우리 모두는 자기 보호를 잘 해야만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처 입은 존재들이다. 예외가 없다. 공감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을 내게 묻는다면 단연코 자기 보호에 대한 민감함이라고 말할 것이다.
-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고 그래서 모든 감정은 옳다. 불안을 느낀다면 '이러면 안 되는데' 할 게 아니다.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왜 그런 걸까?' 곰곰이 나와 내 상황을 짚어봐야 한다.
- "너 계속 그렇게 살 거니?"
"그렇게 계속 살고 싶은 거 맞니?"
"진짜니?"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든 개의치 말고 진심으로 물어봐 줘야 한다. 빠르게 대답을 하거나 대답을 들으려 애쓰지 말고 자기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그 질문 언저리에서 충분히 배회하며 머무를 수 있도록 자신에게 시간을 줘야 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고 쫓기지 말고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자기 마음을 먼저 둘러봐야 한다. 그 일을 계속하든 당장 그만두든 결론은 중요하지 않다. 처음으로 그 질문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집중 또 집중하는 것, 자기 마음의 구석구석을 거울로 비춰주는 것,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 곳이 있으면 플래시도 비춰가며 찬찬히 더듬어 보고 눈길도 포개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좋은 대답과 결정이 자신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주목하고 공감해 주는 과정 자체가 자신을 끝내 보호하는 것이다.
- 사람은 옳은 말로 인해 도움을 받지 않는다. 자기모순을 안고 씨름하며 그것을 깨닫는 과정에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경험을 한 사람이 갖게 되는 여유와 너그러움, 공감력 그 자체가 스스로를 돕고 결국 자기를 구한다.
- 성공한 사람은 부지런할 것이다, 머리가 좋을 것이다, 합리적일 것이다 등 집단적 지레짐작이 집단 사고다. 모름지기 여자란, 모름지기 장남이란, 모름지기 성직자란, 모름지기 학생이란... 우리 사회의 이런 집단 사고들은 자연의 곡선을 직선으로 밀어버리는 포크레인 같은 심리적 폭력이다. 사람에 대한 판단과 평가가 이미 내려졌으므로 그가 어떤 개별성을 가진 존재인지에 집중하는 일에는 당연히 소홀해진다.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집단 사고에 휘둘리면 어떤 사람도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
- 공감은 똑같이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상대가 가지는 감정이나 느낌이 그럴 수 있겠다고 기꺼이 수용되고 이해되는 상태다. 그 상태가 되면 상대방 감정 결의 바짝 다가가서 그 느낌을 더 잘 알고 끄덕이게 된다. 상대와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상관없다. 같은 감정을 느껴야만 공감이 아니다. "엄마는 그래본 적이 없지만 너는 지금 친구가 죽은 것처럼 슬픈 거구나, 그런 정도였구나." 그렇게 말하면 된다. 엄마와 아들도 각자 개별적 존재들이라서 서로가 느끼는 감정은 당연히 다르다. 엄마가 아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느낌을 아들에게 전달할 수만 있으면 된다. 그게 공감이다.
- 모든 인간은 각각 개별적 존재, 모두가 서로 다른 유일한 존재들이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감정을 갖지 않는다. 다르다. 그러므로 공감한다는 것은 네가 느끼는 것을 부정하거나 있을 수 없는 일, 비합리적인 일이라고 함부로 규정하지 않고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관심을 갖고 그의 속마음을 알 때까지 끝까지 집중해서 물어봐 주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태도 그 자체다. 그것이 공감적 태도다. 공감적 태도가 공감이다. 그 태도는 상대방을 안전하게 느끼게 하고 믿게 하고 자기 마음을 더 열게 만든다.
- 내 성격 때문에 내가 그동안 외롭게 살았다, 그래서 나를 닮은 아들을 다그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그녀가 외롭게 산 것은 예민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예민한 성격을 잘못된 성격, 좋지 못한 특성이라 규정당하고 공감 받지 못한 채 위축돼서 살아서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민하면서도 당당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 누군가에게 공감자가 되려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상처도 공감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감하는 일의 전제는 공감 받는 일이다. 자전하며 동시에 공전하는 지구처럼 공감은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자기도 주목받고 공감 받는 행위다. 타인을 구심점으로 오롯이 집중하지만 동시에 자기중심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가능하다. 공감은 본래 상호적이고 동시적인 것이다. 지구가 자전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공전을 멈추거나 공전을 하느라 힘이 빠져서 자전을 쉬면 자연의 모든 이치가 깨지듯 공감도 마찬가지다. 상호 성과 동시성을 잃으면 공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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