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그 시기에 내가 겪은 것이 단순한 게임 과몰입이 아니라 가벼운 우울증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든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 기를 바랐다. 뉴욕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도착하자마 자 허리케인을 만났고,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검은 꽃」 영어판은 출판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 반응 없이 묻혀버렸다. 미국은 책이 출간되기 몇 달 전부터 리뷰 카피가 돌기 때문에 책이 서점에 깔리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독서계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미국의 독자들은 한국의 작가가 백 년 전 멕시코를 배경으로 쓴 이민사 이야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미 국에서 출간된 전작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빛의 제국」에 비하면 반응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좌절은 공격성으로 이어졌을 것이고, 마침 나의 손에는 조이스틱이 쥐여 있었고, 나는 스크린에 나타나는 적들을 향해 원 없이 총을 쏘아댔다. 조이스틱을 내려놓은 뒤부터는 아내와 함께 우리가 그렇게 좋아하던 센트럴파크에 자주 나가 걸었다. 자 연은 그대로 거기 있었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상관하지도 않았다. 다만 우주의 시간표에 따라 변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노랗게 물들며 쏟아져내리는 은행잎을 맞으며 나는 연못과 작은 둔덕들 사이를 오갔다. 뉴욕의 가을을 만끽하려는 수천 명의 이름 없는 관광객들 사이에 묻혀 걸었다. 몇 주 동안 겪은 어 둠이 천천히 녹아 사라졌다. 사실 뉴욕에 와서 잃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돌아와 새 소설을 시작해 이듬해 여름에 출간했다. 한때 무시무시했던 살인자가 자기 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되는, 노바디 중의 노바디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였다.
- 실뱅 테송의 말처럼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 하러 그 먼 길을 떠나겠는가.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허영과 자만은 여행자의 적이다. 달라진 정체성에 적응하라. 자기를 낮추고 노바디가 될 때 위험을 피하고 온전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
- 뉴욕에서 살던 어느 날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여행 가고 싶다."
"지금도 여행 중이잖아."
아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런 거 말고 진짜 여행."
마치 꿈속에서 꾸는 꿈같은 것인가? 아니면, 꾸역꾸역 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정말 맛있는 걸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말인가? 여행이 길어지면 생활처럼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충분한 안정이 담보되지 않으면 생활도 유랑처럼 느껴진다.
-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현실에서 무질서하게 일어나는 여러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운다. 죽음과 재난, 사랑과 배신 같은 일들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닥쳐올 때,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지켜내야 하고 그럴 때 이야기가 우리에게 심리적 틀을 제공하는 것이다.
-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살던 동네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진다. 주말 홍대 앞의 인파가 새삼 무시무시하게 느껴지고, 서울이 거대도시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지하철이나 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몸을 치고 지나가는 게 전과는 달리 불쾌하고, 한강은 평소보다 더 드넓어 보인다. 식당이 밀집한 거리를 지나갈 때면 한국 음식 특유의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 인간이든 동물이든 그렇게 모두 여행자라고 생각하며 떠나보내는 마음이 덜 괴롭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환대했다면, 그리고 그들로부터 신뢰를 받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여행에서뿐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도 많은 이들의 도움 덕분에 굴러간다.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을 반기고, 그들이 와 있는 동안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다 가도록 안내하는 것, 그것이 이 지구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여행자들이 서로에게 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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