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 10~11
상수의 영업 전략 역시 그런 감정적 접근이었다. 상수는 '실'이야말로 기계와 거리가 멀고 아날로그적이라서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이때 움직이는 건 구입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따지고 계산하는 영역이 아니라 온갖 기억과 향수 같은 것을 건드려 얻는 감정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상수는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가 감아올릴 실을 보여줌으로써 사장들이 공장을 돌려 마침내 손에 쥘 실물의 세계 - 티셔츠일 수도, 삼각팬티일 수도, 등산복일 수도, 베갯잇일 수도 있는 -를 환기함으로써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그건 기계가 표상하는 수많은 절차들,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을 지불하고 기계를 들이고 당연히 잔금을 치르고 기계를 돌려야 하니까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해야 하니까 반드시 임금을 주어야 하고 임금은 해마다 인상되고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의 스트라이크가 있고 그런데 기계는 기계니까 언제라도 고장 날 수가 있고 그러면 수리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스트라이크가 심하게 일어난 경우에는 유리창 수십 장과 당연히 기계들이 손상될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하도 되도록 기계는 망가지지 않아야 하는데 화난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면 그것도 권리 주장을 위한 것이니까 그 비용도 생각해야 하고 그런데 기계를 부순 자들은 그대로 두면 안 되고 어떻게든 손해배상 청수를 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원한을 사서 개인적인 린치를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는 없고 아무튼 기계들을 지켜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도 있고 사업이라는 게 한순간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가족들을 지켜내지 못할 수도 있어서 사실상 물거품인데 기계를 들이는 일 따위는 하지 말고 그냥 부동산 투기나 할까... 이런 생각을 못 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2. P 27
"누구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3. P 30
"일은요, 일자리는 참 중요합니다. 박경애 씨, 일본에서는 서툰 어부는 폭풍우를 두려워하지만 능숙한 어부는 안개를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안개가 안 끼도록 잘 살면 됩니다. 지금 당장 이렇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거 안 무서워하고 삽시다. 나도 그럴 거요."
4. P 34~35
페이지의 언니들이 보내는 편지에는 사랑의 생몰이 다 드러나 있었다. 어떤 사랑은 같은 기차에 탔다는 이유만으로 시작되었다. 혹은 어린 시절 운동회날 달리기에서 둘 다 꼴등으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첫눈을 함께 봤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학대받은 기억이 똑같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유로, 같은 밴드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낡은 점퍼나 코트를 유심히 보게 됐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추워 보였다는 혹은 더워 보였다는 이유로, 식당에서 땀 흘리며 무언가를 열심히 먹었다는 이유로, 돌아서서 지하철역까지 느릿느릿 걸었다는 이유로.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가난과 폭력, 배신과 거짓말, 종교, 정치, 국적의 차이, 집안싸움, 부모 반대, 언니 또는 형의 반대, 동생의 반대, 베프나 은사의 반대 혹은 기르는 고양이나 개의 반대, 윤리적 판단 - 불륜, 제삼자의 출현 - 같은 일종의 유형들이 있었다. 그렇게 소멸은 정확하고 슬픈 것이었다.
5. P 56
창조주여,
제가 부탁했습니까,
진흙에서 저를 빚어 사람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절 끌어내달라고?
- 밀턴 <실락원> -
6. P 59~60
그들은 자신들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만났다 헤어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그것마저 관계의 숙명처럼 느껴지던 시절은 오히려 로맨스의 과정이었고 한쪽이 결혼을 한 상황은 확실히 그것의 정리에 가까운 일이었다. 식장에 가서 무슨 오기인지 50만원을 축의금으로 내고 계단식 연단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평소에 신지도 않던 펌프스 때문에 발가락의 찌릿찌릿한 통증을 참아가며 식당에 가 잔치국수를 먹는 일. 관계의 변화는 그렇게 등 떠밀리듯 왔다. 우리 헤어져, 하는 선언이나 다 관둬, 하며 뒤도는 동작이 아니라 식권을 받아 식당으로 가 남들이 다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그 절차를 기꺼이 밟으며 그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오는 것이었다.
그 날 경애는 접시에 육회와 초밥과 샐러드, 연어 따위를 연신 담아 와 먹었고 친구들과 맥주까지 한잔하고 혼자 집으로 가는 길에 동네 편의점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대체 끝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실감하고 확신하는지 알 수 없었다. 끝이 만져진다면 모를까. 느끼는 것이고 상상하고 인식하는 것인데 지금 내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끝을 말해. 끝을 말하려면 지금 발밑에서 너풀거리며 나뒹구는 아이스크림 포장이나, 택시의 노란 헤드라이트 불빛같이 눈앞에 지나가는 어떤 것도 아픔을 환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떤 풍경도 산주를 떠올리게 하지 않고 지시하지 않는다고.
7. P 94
"아무것도 안하면 어떡합니까? 일을 해야지."
"일은 늘 하니까 특별한 뭘 한 게 아니라는 거에요."
8. P101~104
경애의 엄마는 들어와서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세탁기를 돌리지 않아 아무 바구니에나 수북이 담긴 경애의 지난 계절의 빨래들을, 여름이 왔는데도 그렇게 방치된 점퍼와 티셔츠, 양말, 장갑, 담요와 속옷들을. 그리고 누군가가 아주 구겨버린 것처럼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경애를. 경애 엄마는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시작해 저녁까지 이어진 그 빨래는 세탁기를 일곱번 돌려야 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경애 엄마는 그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그날 다 해냈는데, 그렇게 해야 경애가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경애는 여러번 넘어져왔다고 경애 엄마는 생각했다. 남편이 평생을 살아갈 반려자로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 경애가 겨우 돌이 되었을 때였다. 경애의 엄마는 폭력과 폭언을 피해 이혼을 결심했고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다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런 기술마저 없었으면 경애를 그 불행헤서 건져내주지 못했을 거라고, 결국 미용가위와 롯드, 고무줄과 염색약, 드라이어와 고데기, 거울과 가운 같은 것들이 어려서 미용실에 앉혀두어도 한번 울지도 않던 그 아기를 구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믿을 건 자신의 그 두 손밖에 없었다. 가위질하고 파마하는 이 기술, 이 무형의 것밖에. 하지만 자기가 기술이라는 것에 매달려 사는 동안 경애도 사실 믿을 거라고는 엄마의 두 손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녀는 경애가 친구들을 잃고 우울증을 겪었을 때에야 깨달았다. 자기가 믿을 게 자신의 두 손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 아기 역시 믿을 건 엄마의 두 손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경애의 엄마는 언제나 경애가 일어서는 아이라고 믿었고 꽃처럼 예쁘게 보내야 할 경애의 시간들이 오래되어 퀴퀴해진 빨래처럼 방치된 채 흐르고 있어도 슬프거나 경애에게 뭐라고 한소리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순간이 왔을 때 말 그대로 힘들어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냥 자기 딸은 아플때 아파야 하는 사람이라서 그렇겠거니 여기면 속상해하거나 마음 부대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경애가 그 화재사건을 겪고 경찰서에 왔다 갔다 하고 학교에서 선생들에게 한마디씩 듣고 그게 동네 장사를 했던 경애 엄마의 귀에 들려올 때도, 파마를 하러 왔던 아줌마들이 그러게 돈만 벌지 말고 애를 좀 살펴야지, 한다든가, 벌써부터 술집을 들락거려서 어떡해,라는 말을 했을 때 경애의 엄마는 그런 소리 하려면 다시는 머리하러 오지 말라고 가위를 탁 내려놓았다.
상대가 아무리 사과해도 다시 가위를 잡지 않았다. 그러면 머리를 자르다 만 동네 여자들은 그렇게 들쑥날쑥하 머리가 창피해서 내 머리 어떡하느냐며 화내고 욕하다가 나가버리곤 했는데, 그런 여자들이 얼마나 무섭고 안 좋은 소문을 내든 경애 엄마는 자기 성질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걸 부끄러워하면 내 자식은 죽는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자기라도 그러지 않으면 경애는 일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경애 엄마는 미용식 벽에다 「누가복음」의 문장을 붙여놓았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서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경애 엄마가 집을 치우는 동안 경애는 그냥 침대에 누워서 엄마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경애 엄마는 깨끗한 수건 한장 없는 서랍장을 뒤져보다가 밖으로 나가서 수건과 속옷을 사왔고 경애를 일으켜세워 욕실로 보냈다. 그리고 국을 끓였는데, 경애가 좋아하는 말간 콩나물국이었다. 다른 것 하나 없이 콩나물을 끓여 소금만 넣으면 되는 국이었다. 싱크대 앞에 서서 경애의 엄마는 그들이 함께했던 저녁들을 떠올렸다. 미용실 곁방에서 늘 조용히 엄마가 일을 끝내기를 기다리다가 실곱시가 되면 문을 열고 가게를 살피던 아이. 경애가 엄마, 언제 밥 먹어? 하고 물으면 비로소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경애가 들어간 욕실에서는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경애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건 경애 엄마도 알고 있었다. 엄마 나 회사 그만뒀어, 라고 전화했을 때 이미 경애에게 또 넘어질 만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신기하게도 그런 것들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엄마."
경애가 욕실에서 불렀다. 경애 엄마는 욕실 문 앞에 앉아서 왜, 하고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앉아 있다 가. 엄마 힘든데 아무것도 하지 마."
"집을 이 꼴로 해놓고 그런 말이 나오니."
경애 엄마는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을 이기기 위해 일부러 핀잔을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우리 아무것도 하지 말자."
경애 엄마는 경애가 씻는 것,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그런.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자. 엄마도 안할게. 엄마도 그냥 누워 있을란다."
9. P 123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이 되고 만다"
10. P 158
상수의 마음은 특정할 수 없는 무언가와 무언가 '사이'에 있다고 경애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면 긴장돼서 진정제를 찾아야 하는 나약함과 상사에게 정말 낙하산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요구를 당당하게 하기 위해 그 상사의 방문을 열어젖히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패기 사이에 상수의 마음이 있었고, 경애와 자신 둘만 있는 사무실에 매번 허황된 매출 목표금액을 적어보면서 회사가 이루면 우리가 이루는 겁니다, 라는 유의 근면을 강조하는 문구들에 마음을 기탁해보는 것과, 어떻게 해서든 실적을 내려고 공장들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영업담당자가 원하는 것이 뒷돈이나 접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눈에 띄게 낙담하는 것 사이에 상수가 원하는 세일즈맨의 마음이 있었다. 결국 상수는 마치 추처럼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경애는 그가 그렇듯 갈등하는 것에 고유한 윤리가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수는 막무가내의 이기주의자나 꼴통, 심지어 고문관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만 그런 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뿐이었다.
11. P 205
김부장은 호찌민 사람들이 정이 많고 끈끈하고 온정적인 편이라고 했지만 오과장은 동의하지 않았다. 차갑고 냉혹하며 무섭도록 현실적이라고 했다.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죽더라도 보상이 주어지면 그 처리가 얼마 걸리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상수가 보기에 그것은 호찌민 사람들이 고유하게 지니는 속도라기보다는 자본의 속도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다른 도시에서도 얼마든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상수는 호찌민과 그 인근에서 7만여명이 넘는 한국인이 먹고산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비단 한국에서만 넘어온 것이 아니라 과떼말라나 사이판같이 옛날 미국 기업들의 하청공장들이 있던 지역이나 중국, 말레이시아 같은 아시아 전역에서 몰려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다면 호찌민은 그런 이방인들에 의해서라도 필연적으로 차가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먹고사는 일만 아니라면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적어도 여기는 내 정주지가 아니라는 거부가 그들을 지탱하고 있을 테니까.
12. P 344
예배는 신의 목소리를 옮기는 목사가 중심이었지만 주일의 교회 건물을 채우는 건 이렇게 서로의 일상을 부지런히 살피려는 사람들의 수선스러움이었다. 신의 말을 들을 때는 신의 말을 들었지만 그 한두시간이 지나면 인간들은 다시 인간의 마음으로 돌아와 반나절의 짧은 만남에서도 미움을 주고받고 시기하고 감동하다가 별안간 싸우기도 했다.
13. P 349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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