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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저 / 출판사 창비)

by hyeranKIM 2020.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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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2007년 제15회 오영수문학상,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2012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그리고 2014년 작품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장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상찬을 받으며 장편소설 <토우의 집>으로 제

www.aladin.co.kr

 

1. P24~25

영경은 손을 더듬어 다시 수환의 손을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노보드보로프는 혁명가들 사이에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었으며 또 훌륭한 학자이고 아주 현명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흘류도프는 그를 도덕적 자질로 봐서 일반 수준보다 훨씬 하위의 혁명가 부류로 간주했다."

영경은 계속 읽어나갔다. 이름도 발음하기 어려운 노보드보로프라는 혁명가는, 똘스또이에 따르면, 이지력은 남보다 뛰어나지만 자만심 또한 굉장하여 결국 별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 까닭인즉, 이지력이 분자라면 자만심은 분모여서 분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모가 그보다 측량할 수 없이 더 크면 분자를 초과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2. P25

"내가 생각해봤는데 이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놓고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오는 식이지. 아무리 장점이 많아도 단점이 더 많으면 그 값은 1보다 작고 그 역이면 1보다 크고."

"그러니까 1이 기준인 거네."

수환이 말했다.

"그렇지. 모든 인간은 1보다 크거나 작게 되지."

 

3. P39

요양원 사람들은 수환이 죽었을 때 자신들이 연락 두절인 영경에게 품었던 단단한 적의가 푹 끓인 무처럼 물러져 깊은 동정과 연민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연경의 온전치 못한 정신이 수환을 보낼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견뎠다는 것을, 그리고 수환이 떠난 후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을, 늙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4. P62

자연이든 관계든 오래 지속되어온 것이 파괴되는 데는 번갯불의 찰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들 부부나 케이블카 커플이나 파괴된 논밭에 서 있던 크고 작은 크레인들처럼 가엾고 기괴한 잔여물에 불과하다고 훈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하나의 크레인처럼 여윈 어깨를 으쓱했다.

 

5. P84~85

요리를 할 때 그녀는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함을 느낀다. 요리는 불과 물과 재료에만 집중해야 하는 일이다. 요리를 하면 할수록 그녀는 요리가 창조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요리를 반복해도 결코 똑같은 맛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실망시키기는커녕 더욱 매혹시킨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요리하며 일인분의 음식을 만드는 데도 정성을 다한다. 일인분이라고 아무렇게나 만들면 더 맛이 없다.

 

6. P86

두번째 방문 때 나는 커피와 케이크, 맥주와 담배 같은 것을 잔뜩 사가지고 갔다. 그녀는 그것들에 손도 대지 않다가 내가 돌아갈때 도로 가져가게 했다.

"네가 좋은 생각으로 사온 건 안다. 하지만 나는 내 가난에 익숙하고 그게 싫지 않다. 우리 서로 만나는 동안만은 공평하고 정직해지도록 하자. 나는 네가 글을 쓴다는 것도 좋지만 내 피붙이가 아니라는 게 더 좋다. 피붙이라면 완전히 공평하고 정직해지기는 어렵지. 혹시라도 네가 내 집에 뭘 몰래 두고 가거나 최악의 경우 돈 같은 걸 놓고 간다면 내가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알게 될 거다. 네가 먹을 간식을 사오는 건 괜찮아. 대신 다 먹고 가긴 해야겠지."

그렇다 그녀와 나는 두달 남짓, 나름대로 공평하고 정직하게 월요일 오후에 그녀의 집에서 만나 묽은 블랙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누군가의 삶을 간단히 요약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모의 삶이야말로 가장 간단히 요약될 수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7. P87

그녀의 어머니인 시외할머니는 나도 뵌 적이 있고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하셨다. 나는 그분이 무척 헌신적이면서도 당신의 그런 면을 남 앞에서 극구 내세우지 않는 겸손한 성정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인상을 말하자 그녀는 유감스러운 얘기를 들은 것처럼 입가를 축 늘어뜨리고 말했다.

"그다지 틀린 얘기는 아니야. 희생정신으로 똘똘 뭉친 옛날 여인이니까. 이타적인 면도 있고 인내심도 강하시지. 중요한 건 무엇을 위한 희생이냐, 무엇에만 배타적으로 이타적이냐, 하는 거 아니겠니?"

 

8. P136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9. P164

"그런데 글쎄요, 차라리 다리였다면 어땠을까요? 이렇게 되고 보면 신체의 위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애의 등급이라고 해야 할까요? 뇌가 맏이라면 다리는 막내랄까 하는 식이지요. 눈이 몇번째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막내 쪽에 가깝지는 않아요."

 

10. P165

"저는 직접 먹어보기 전엔 이게 뭔지 모릅니다. 후각이 예민해져서 냄새로 맞히는 경우도 있지만 또 전혀 아닌 경우도 있어요. 아무튼 이걸 입에 집어넣기 전까지 저는 계속 이 맛을 모르고 있는 중이지요. 모두 알고 있는데 저만 모르고 궁금해하는 그 짧은 시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아요. 이건 두부군요."

 

11. P168~169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

 

12. P171

"나는 심지어 나하고도 눈을 마주칠 수 없습니다. 거울을 봐도 내 얼굴에서 분간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죠. 눈동자는커녕 표정, 눈매, 주름 그 어느 것도, 누군가와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아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해가 지면 드리우는 땅거미처럼 자체의 엄격한 가속도로 내 눈에 그물을 찬찬히 드리우는, 도래할 어둠의 시간 외에는 그 어느 것도."

 

13. P176

그 만남이 행인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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