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천의 글 중에서
부자들은 가난을 통계 지표로 객관화해서 이해하지만, 가난은 개념이 아니라 생활이다. 가난은 사회적 차별, 모욕, 억압이고 기회화 정보로부터의 단절이다. 간나은 희망의 부재, 목표 설정의 어려움이며 때로는 인간성의 파탄에까지 이른다.
2. P23
최근에 알게 된 사람들은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간판과 직업만 보고서 내가 무슨 천재라도 되는 줄 안다. 특출하게 뛰어난 사람만이 지금의 내 위치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전부 헛소리다. 타고난 재능 따위를 운운할 수도 없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몇몇 사람이 구해주기 전까지 나는 시궁창 같은 삶에서 허덕이며 살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실제로 경험한 인생이며 이 책을 쓴 까닭이다. 나는 자포자기 직전까지 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어쩌다 그런 상황까지 가게 되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인생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신적, 물질적 빈곤이 자녀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길 바랐다. 우리 가족과 내가 마주했던 아메리칸 드림을 이해하길 바랐고, 신분 상승을 이루면 정말로 어떤 느낌이 드는지도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최근에야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운 좋게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더라도 과거에 우리를 괴롭혔던 악령은 여전히 우리의 뒬르 밟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3. P47
"없이 살면서 없는 사람 물건을 빼앗는 놈보다 더 천한 놈은 없단다. 안 그래도 모두가 먹고살기 힘든데, 없는 사람끼리 서로의 처지를 더 힘들게 만들 필요는 없단 얘기다."
4. P76
할모와 할보는 땀 흘려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었다. 두 분은 사는 게 녹록지 않다는 걸 알았으며, 무엇인가 이루려고 할 때 본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더 오랫동안 고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자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할모는 틈만 나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절대 자기 앞길만 높은 벽으로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빌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이면 뭐든 할 수 있단다."
5. P99~100
2011년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과 비교했을 때 2005~2009년 사이 극빈가 거주자들은 백인, 미국 태생, 고등학교 또는 대학 졸업자, 자택 소유자, 정부의 보조를 받지 않는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다시 말해서 안 좋은 동네라는 문제가 비단 도심의 게토에만 해당하는게 아니라 교외로까지 뻗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다. 지미 카터 정부 시절의 '지역재투자법'에서 조지 W. 부시 정부의 '오너십 소사이어티'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연방 주택 정책은 꾸준히 '내 집 마련'을 부추겼다. 그러나 정부의 말을 믿고 내 집을 마련한 미들타운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했다. 동네에서 일자리가 대거 사라졌지만, 집값이 떨어지는 바람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이사를 하고 싶어도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탓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집을 팔아봤자 대출금을 갚지 못한다. 이사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서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은 보통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고, 이사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다들 동네를 떠난다.
6. P118
가족들 누구보다도 엄마는 나와 린지 누나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길 원했다. 엄마의 친구 스콧은 상냥하고 나이가 많은 게이 아저씨였는데, 엄마가 나중에 말해주기로 예기치 않게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또 엄마는 수혈을 받다가 에이즈에 감염된 이후 학교에 돌아가기 위해 법적 싸움을 벌여야 했던 내 또래 소년, 라이언 화이트에 관한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7. P121
언제나 그렇듯 할모는 싸움도 경험을 통해 배우도록 했다. 할모는 한 번도 내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었지만 (아마도 본인이 겪었던 끔찍한 과거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주먹으로 얼굴 부위를 맞으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물었을 때는 망설임 없이 직접 시범을 보여줬다. 할모의 손이 재빠르게 날아와 내 뺨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어떠냐? 그렇게 아프지는 않지?" 정말 그랬다. 얼굴을 맞았는데도 내가 상상했던 것만큼 끔찍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제대로 때릴 줄 아는 사람이 휘두르는 주먹이 아니라면 얼굴도 맞을 만하다. 피하다가 때릴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는 얼굴을 한 대 맞는 게 낫다.; 두 번째로 중요한 기술은 '상대가 가격할 수 있는 면적을 최소화하도록' 왼쪽 어깨를 상대방을 향해 내밀고 비스듬하게 서서 가드를 올리는 것이다. 세 번째 기술은 주먹에 온 힘을, 그중에서도 특히 '엉덩이 힘을 실어 가격하라'는 것이다. 할모는 주먹 힘만으로 펀치를 날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8. P121
할모에게 물었다. "저번에 싸웠을 때는 나더러 잘했다고 하셨잖아요." 할모의 대답은 이랬다. "그랬다면 할모가 그때 틀린 소릴 했구나. 정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싸우지 말거라." 돌이켜보면 참 감동적인 상황이었다. 할모는 결코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9. P124
내가 평생 잊지 못할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가, 살다 보면 자기를 위한 일이 아니더라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단다. 싸우는 게 옳은 선택일 때가 있는 법이야. 내일은 그 친구를 보호해주렴. 너를 보호할 일이 생기거든 그렇게 하고."
10. P152
할모가 내게 가르쳐준 신학은 단순했지만 교훈은 분명했다. 인생을 만만하게 산다는 건 신이 허락한 재능을 낭비하는 것이므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하려면 가족을 잘 보살펴야 했다. 꼭 엄마가 아니라 나 사진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실천해야 했다. 신은 모든 계획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는 결코 절망할 필요가 없었다.
11. P184
할보는 내게 지식이 부족한 것과 지능이 부족한 건 다르다는 사실을 가르쳐줬다. 지식이 부족한 경우에는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지능이 부족한 경우라면? "젠장, 뭐 글러먹은 거지."
12. P185
"자기 집안의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남자를 알 수 있다"
13. P207
그때 내가 그동안 겪어온 복잡하고 상반된 감정을 아빠가 이해하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내겐 아주 의미 있는 일이었다.
14. P210~211
드라마의 등장인물 대다수는 교육이야말로 정당하게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열쇠하고 믿는다. 허구의 대통령이 바우처 제도를 강력히 추구할지 아니면 실패하는 학교를 개혁하는 데만 집중할지를 놓고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우처 제도란 실패하는 학교를 피해서 진학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학생들에게 공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우리 학군에도 오랫동안 바우처 혜택을 받을 정도로 실패한 학교가 많았으니 그 자체는 분명 중요한 토론 주제였다. 하지만 가난한 아이들이 무엇 때문에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하는지, 그 원인을 찾는 회의 내내 공공 기관의 책임만 언급하는 부분은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선생님이 최근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방황하는 아이들의 목자가 돼주길 바라지. 그런 애들 대부분이 늑대에게 길러진다는 현실을 툭 까놓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문제야."
15. P241
이웃집 아주머니는 왜 폭력적인 남편을 떠나지 않았을까? 왜 마약을 사는 데 돈을 썼을까? 자기의 행동이 딸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몰랐을까? 왜 이런 모든 일이 다른 이웃에게서 그치지 않고 우리 엄마에게까지 일어났을까? 그때는 현대 미국 사회의 힐빌리 관련 문제들을 제대로 설명하는 책도 전문가도 분야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몇 년 전이었다. 우리의 엘레지는 물론 사회학적 문제이지만 심리학적 문제이기도 하고 공동체와 문화, 신념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16. P244~247
내가 사는 세상은 정말 미이성적인 행동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우리는 그 가난한 살림에서 지출을 늘려나간다. 거대한 텔레비전과 아이패드를 산다. 이자가 센 신용카드나 고리대금을 얻어서 자식들에게 좋은 옷을 입힌다. 필요하지도 않은 집을 매매하고 그걸로 재융자를 받아 소비를 더욱 늘리다가 결국 쓰레기로 가득찬 집을 떠나며 파산 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절약은 우리의 존재에 반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상류층인 척하려고 돈을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우리를 덮고 있던 거품이 걷히고 나면 (파산을 당하든 식구 하나가 다른 식구들을 우둔함의 구렁텅이에서 끌어내든), 남아 있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의 대학 학비도 없고 재산을 늘릴 투자금도 없고 실업을 대비할 불황 대비 자금도 없다. 물론 이런 식으로 소비를 해서는 안 된다는걸 우리도 잘 안다. 반성하고 자책할 때도 있지만 결국 제 버릇 개 주지 못한다. 가정은 혼돈의 도가니다. 마치 미식축구를 관람하기라고 하듯 소리를 지르거나 서로에게 언성을 높인다. 마약에 빠진 식구가 집집마다 적어도 한 명씩은 꼭 있다. 아버지인 경우도 있고 어머니인 경우도 있으며 둘 다인 경우도 있다. 스트레스를 특히 더 받을 때면, 어린 자녀가 보고 있든 말든 다른 식구들 앞에서 서로를 때리기까지 한다. 이웃들은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듣고 있다. 우리에게 재수가 없는 날이란 싸움을 멈춰달라며 이웃 주민이 경찰에 신고하는 날이다. 자녀들은 위탁 가정으로 보내지지만, 결코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사과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말을 믿는다. 물론 우리도 그때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그러나 며칠만 지나면 우리는 또다시 부끄러운 짓을 일삼는다. 우리는 어릴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부모가 됐을 때도 자녀들에게 공부를 시키지 않는다. 자녀들의 학교 성적은 형편없다. 성적을 핑계로 화를 내는 일은 있지만, 자녀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집을 평화롭고 조용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없다. 아무리 명석하고 총명한 학생일지라도 집에서 가까운 대학교에 진학할 공산이 크다. 물론 그런 학생들이 가정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노터데임에 가든 말든 알게 뭐야. 전문대에 가면 저렴하면서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노터데임대학교에 진학할 때 더 훌륭한 교육을 더 저렴하게 받을 수 있다. 우리는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할 시기에 일을 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구할 때도 있지만, 그조차 얼마 가지 못한다. 밥 먹듯이 지각을 한다거나, 상품을 훔쳐 이베이에서 판매한다거나, 입에서 술 냄새가 난다는 고객 불만이 접수된다거나, 근무 중에 다섯 차례씩이나 화장실에 간다며 매번 30분씩 쉬다 나온다거나 하는 이유로 해고를 당한다. 남들에게는 근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는 부당한 대우 때문에 일을 못 해먹겠다고 합리화한다. 오바마가 탄광을 폐쇄했기 때문이라느니,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죄다 차지했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이유를 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죄다 우리 앞에 놓이 세상과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의 연결고리가 끊어지면서 생겨난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려는 거짓말이다. 우리는 자녀에게 책임과 의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말하지만, 행동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나는 수년간 독일셰퍼드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했다. 어디선가 엄마가 한 마리를 구해다 주었다. 독일셰퍼드는 우리 집에 온 네 번째 강아지였는데도, 나는 강아지를 어떻게 훈련시켜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 집에 왔던 강아지들은 경찰서에 맡겨지거나 다른 가족에게 보내지는 등 죄다 몇 년 만에 사라졌다. 네 번째 강아지를 보내고 난 뒤로는 슬프지도 않았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정을 붙이지 않는 방법을 배운다. 우리의 식습관이나 운동습관을 보면 마치 요절하려고 작정한 사람들 같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켄터키 어느 지역의 기대 수명은 67세로, 인접한 버지니아보다 15년이나 낮다. 최근에 실시한 연구 결과를 보면, 미국 내 모든 인종 중에 유일하게 백인 노동 빈곤층의 기대 수명만 하락하고 있다. 우리는 아침으로 필스버리에서 출시한 시나몬롤을 먹고, 점심은 타코벨에서, 저녁은 맥도날드에서 먹는다. 요리를 해먹는 편이 심신의 건강에 좋을뿐더러 가격도 더 저렴한데도 우리는 거의 요리를 하지 않는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어릴 적에 뛰어논 게 전부다. 살던 동네를 떠나서 군대에 가거나 집에서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진 대학에나 가야 길거리에서 조깅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 물론 백인 노동 계층이라고 해서 모두 비참하게 사는 건 아니다. 나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같은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 서로 다른 도덕관과 사회적 압력의 영향을 받는다는 걸 알았다. 우리 할모와 할보가 고지식하고 성실하며 독집적인 첫 번째 부류에 속했다. 두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우리 엄마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네 사람으로, 그 수는 날이 갈수록 더 늘고 있다. 대개 소비지상주의자들이며 화가 많고 의심이 많은 데다 고립된 채 살아간다.
17. P249~250
"가족들이랑 주말을 보내게 해주는 직장에 취직하려면 대학에 가서 출세해야 한다." 할모 화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한마디였다. 할모는 그저 훈계만 늘어놓거나 비방하거나 다그치기만 하는 일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처럼 피부에 와닿는 미래를 생생하게 제시하며 그걸 이룰 수 있는 방법을 확실히 알게 해줬다.
18. P286~287
나는 에피파니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인생을 바꾸는 순간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을 바꾸는 건 순간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라지겠다는 깊은 갈망에 빠져 있다가 실제로 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고 결국 패기만 잃어버린 사람들을 살면서 너무 많이 봤다. 그러나 그 소년을 만났던 순간은 내 인생을 제법 바꿔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전까지 나는 늘 세상에 부노를 품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에게 화가 나 있었다. 학교에 갈 때 다른 애들은 친구들끼리 차를 타고 가는데 나는 버스를 타야 해서 화가 났고, 내 옷이 아베크롬비에서 산 게 아니라서 화가 났고, 우리 할보가 돌아가셔서 화가 났고, 좁은 집에 살아야 해서 화가 났다. 그런 분노가 한순간에 사라진 건 아니지만,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수많은 아이들과, 그 애들이 다니는 수돗물도 안 나오는 학교, 그곳에서도 매우 기뻐하는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얼마나 행운아였는지 조금씩 깨닫게 됐다. 나는 지구 최대의 강대국에서 태어나 문명의 이기를 누렸다. 다정한 두 힐빌리 노인의 지지를 받으며 자랐고, 벼란 면이 있는 가족들이긴 했어도 그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때 나는 누군가 지우개를 건넬 때 미소 짓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만족할 만큼 이뤄내지는 못했지만, 그날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테다.
19. P287~293
해병대 복무 중 내 인생을 바꿔놓은 또 다른 계기는 한 가지 사건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훈련 교관과 케이크 사건을 겪었던 첫 날부터 제대명령서를 받아들고 집으로 달려간 마지막 날까지, 해병대는 내게 어른답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해병대에서는 사병을 극도로 무식한 사람들로 여긴다. 체력 단련이나 개인위생, 재정 관리에 관한 어떤 것도 배운 적이 없는 깜깜무식쟁이로 간주하는 것이다.
나는 군에서 복무하면서 수표책 쓰는 법, 저축, 투자에 관련한 필수 과목들을 수강했다. 하지만 훈련소에서 받은 1500 달러를 그저 그런 지역 은행의 계좌에 입금하고 휴가를 나왔다. 그때 선임은 나를 평판 좋은 신용 조합인 해군연방신용조합으로 데려가더니 그곳에서 계좌를 개설하라고 명령했다. 또 패혈성 인두염에 걸려 참고 견디려고 했을 때도 내 몸 상태를 알아챈 부대장이 내게 의무실로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나 같은 사병들은 군인이라는 직업과 민간의 직업을 비교하고, 눈에 띄는 차이점을 한없이 불평한다. 민간 세계에서 부하직원은 업무 시간만 지나면 상사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해병 상관은 내가 일을 잘하고 있는지만 확인하는 게 아니라, 방을 깨끗하게 치웠는지, 머리를 단정하게 깎았는지, 제복을 다림질했는지까지 확인했다.
내가 인생의 첫 자동차를 구매하러 갈 때도 해병대에서는 선임을 딸려 보내 내가 사고 싶었던 BMW가 아니라 도요타나 혼다처럼 실용적인 차를 구매하도록 감독했다. 내가 곧장 자동차 대리점을 통해 21퍼센트의 이자율로 대출을 받아 차를 구매하려고 하자, 보호자격이었던 선임은 버럭 화를 내며 내게 해군연방신용조합에 전화를 걸어 다시 대출 견적을 받으라고 명령했다. 시키는 대로 견적을 받아보니 이자율이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사람들이 이런 일들을 하고 산다는 걸 전혀 몰랐다. 은행을 비교한다고?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은행이 모두 똑같은 줄 알았다. 대출을 알아봐서 고른다고? 나는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서 곧바로 서명을 하려고 했다. 해병대는 내가 이러한 결정을 내릴 때 전략적으로 사고하라고 요구하며 그 방법을 하나씩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해병대는 스스로를 향한 기대치도 바꿔놓았다. 훈련소에 있을 때는 9미터 줄타기를 생각하기만 해도 공초가 밀려왔으나, 1년이 지나서는 한 손만 쓰고도 줄을 탈 수 있게 됐다. 또한 입대하기 전에는 1600미터를 쉬지 않고 달려본 적이 없었으나, 마지막 체력 검사에서 나는 1600미터 거리의 경주로 세 바퀴를 19분 만에 돌고 들어왔다.
게다가 나는 해병대에서 처음으로 다 큰 성인에게 명령을 내리고 감독하는 일을 했다. 내게 해병대는 통솔력이란 부하들을 쥐잡듯 잡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존경을 받음으로써 생긴다는 사실과, 내가 어떻게 해야 그런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 곳이다. 그리고 각기 다른 인종과 사회계층 출신의 남녀가 한팀을 이루어 가족과 같은 유대를 맺고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곳이다.
내가 첮러하게 실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주면서 어떻게든 그 기회를 잡도록 하고, 실패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서는 두 번째 기회를 준 곳이 해병대였다. ................ 이 모든 건 "뭐든 할 수 있다. 절대 자기 앞길만 막혀 있다고 생각하는 밀어먹을 낙오자처럼 살지 말거라"라고 통렬하게 꾸짖은 할모 덕분이었다.
입대하기 전에는 할모의 충고가 마음 깊숙이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군에 복무하면서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신통치 못하다는 사실, 미들타운에서 아이비리그 졸업생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건 우리의 유전적 문제가 기질적 결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나는 내 정신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 해병대가 내 형편없던 정신력을, 변명을 혐오하게 만드는 다른 무엇인가로 바꿔놓았다. 헬스장이나 체육 시간에 들어봤을 법한 "최선을 다하자"가 우리의 구호였다. 처음으로 5킬로미터를 달렸을 때 나는 25분이라는 그럭저럭한 기록에 만족했으나 무시무시한 선임 훈련 교관이 결승선에서 나를 맞이하며 고함을 쳤다. "지금 토하지 않는다는 건 게으름을 피웠다는 증거다! 빌어먹을 게으름 따위는 갖다버리지 못하겠나!" 그러고서 내게 내 위치에서 그 교관이 있는 곳까지 세 번 연속으로 전력 질주를 하라고 명령했다. 쓰러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나서야 교관의 화가 누그러졌다. 나는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을 정도로 헐떡거렸다. 그걸 본 교관이 내게 소리쳤다. "매번 뛰고 나면 지금과 같은 느낌이 들어야 한다!" 해병대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능력은 당연히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노력 부족을 능력 부족으로 착각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 이것이 사람들이 내게 백인 노동 계층의 어떤 점을 가장 변화시키고 싶으냐고 물을 때마다, 내가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마음"이라고 대답하는 까닭이다.
20. P304~305
법안을 논의하는 상원들과 정책 참모들은, 나 같은 사람들로 가득한 지하 경제에서 대부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대부업자들은 그저 과도한 이자를 붙여 돈을 빌려주고, 터무니없는 수수료를 받고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등 약탈을 일삼는 사기꾼으로 여겼다. 의원들에게 대부업자란 그저 하루라도 빨리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내게 대부업체는 중대한 재정난을 해결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과거에 내가 재무 의사 결정을 어리석게 내렸던 탓에 (내 잘못이 아니었던 때도 있지만, 거의 내 탓이었다) 신용 등급이 형편없어서 신용카드를 발급받을 자격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데이트를 하고 싶거나 교재가 필요한데 통장에 돈이 없다면,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이모나 삼촌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느 금요일 오전이었다. 월세를 하루만 더 미뤘다가는 50달러의 연체료가 붙겠기에 우선 수표를 써서 월세를 지불했다. 수표를 처리할 만한 돈이 계좌에 없었지만, 그날이 월급날이어서 퇴근하는 길에 월급을 입금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온종일 정신없이 일하는 바람에 퇴근하기 전에 급여 수표를 챙기는 걸 깜빡하고 말았다.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집이었고, 의사당 직원들도 퇴근하고 난 후였다. 그날 몇 달러의 이자만 붙는 대부업체의 3일짜리 대출 덕에, 나는 어마어마한 초과 인출 수수료를 면할 수 있었다. 대부업의 장점을 논하는 의원들 중에도 그런 상황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일까? 힘 있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의 처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우리를 도우려고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21. P381~382
한동안 백악관에서 일했던, 노동 계층의 처지에 상당히 관심을 가진 친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상황을 제대로 들여다보려거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해야 할 것 같아. 문제는 앞으로도 늘 존재할 거야. 소외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을 실어줄 수야 있겠지만."
실제로 내게 힘을 실러준 일이 많았다. 내 삶을 돌이켜보면, 얼마나 많은 변수가 제자리에 꼭 맞아떨어져서 내게 기회가 됐는지 아주 놀라울 정도다.
부모가 아무 때나 집에 드나드는 걸 막으려고 엄마와 의붓아버지가 멀찌감치 이사를 갔을 때조차도 할모와 할보는 항상 내 곁에 있었다. 아버지 후보자들이 꾸준히 드나들었으나, 주변에는 늘 따뜻하고 상냥한 남자 어른들이 있었다. 내게 잘못한 것도 많았지만, 엄마는 배움과 학습을 향한 평생의 열정을 내 안에 심어줬다.
또, 내가 누나보다 몸집이 더 커지고 난 뒤에도 우리 누나는 나를 보호해줬다. 이모부와 이모는 내가 물어보지도 못하고 절절매고 있을 때 내게 대문을 활짝 열어줬다. 그보다 한참 앞서서 이모내외는 사랑스럽고 행복한 결혼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줬다. 여러 선생님, 먼 친척들, 친구들 또한 내게 많은 힘을 실어줬다. 이들 가운데 누구라도 내 삶의 방정식에 변수로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엉망이 됐을 것이다.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성공한 다른 사람들도 내가 겪은 것과 유사한 형식의 개입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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