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P6~8
- 행복해지려면 두려움을 저 구석으로 보이지 않게 밀쳐버리든지 아니면 모른 척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대상들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에 우리는 애써 두렵지 않다고 부정하면서 두려움을 쫓아버립니다. '안 돼,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아무리 두려움을 무시하려고 해도 두려움은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습니다. 두려움을 해소하고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두려움이 어디서 왔는지 깊이 보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회피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그 두려움을 의식의 수면 위로 불러낸 뒤 그 모습을 명확하게 깊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배할 수 없는 저 밖에 있는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병에 걸릴까봐 두렵고, 늙어가는 것이 두렵고, 그리고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잃을까봐 두렵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끼는 것들을 꽉 붙잡고 있으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직위, 재산,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이죠. 하지만 꽉 붙잡고 있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어지진 않습니다. 결국 언젠가 그 모든 것들을 놓아버려야 할 날이 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을 무시해버리면 두려움이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려움과 불안을 우리 의식 속에 파묻어버린다면, 그 두려움과 불안이 계속 우리에게 영향을 미쳐 더욱더 슬퍼질 것입니다. 힘을 잃고 무기력해지는 것이 몹시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우리의 두려움을 깊이 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게 깊이 볼 수 있게 되면 두려움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즉 우리에게 두려움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겁니다. 지금 이순간에 온전히 머문다면, 즉 마음을 온전히 알아차리고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두려움을 직면할 용기가 생기게 되고 더 이상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수행한다는 것은 깊이 보는 것, 우리가 서로 연결된 상호유기적인 존재라는 실상과 직접 접하고 그리하여 이 세상에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2. P24~25
- 자궁에서 지낸 열 달은 우리 삶에서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습니다. 이윽고 탄생의 순간이 도래했습니다. 이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전과 다르게 느껴지고 우리는 새로운 환경 속으로 떠밀려 들어갑니다. 처음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느낍니다. 주변의 소리는 너무 시끄럽고 빛은 또 너무 밝습니다. 우리는 처으으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이 바로 원초적 두려움입니다. 아기 궁전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폐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탄생의 순간 누군가 우리의 탯줄을 잘랐고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어머니의 몸에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우리를 대신해 숨을 쉬어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생애 최초로 혼자서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만약 혼자서 숨을 쉴 수 없다면 죽어버릴 것입니다. 탄생은 극히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시간입니다. 궁전에서 쫓겨 나와 고통을 만납니다. 숨을 들이쉬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폐에는 약간의 액체가 들어 있고 숨을 쉬려면 먼저 그 액체를 밀어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났고 그 탄생의 순간 우리의 두려움도 살아야만 한다는 욕망과 함께 태어났습니다. 아기인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돌보아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탯줄이 끊긴 뒤에도 우리는 전적으로 성인에게 생존을 의존해야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에게 또는 무언가에 의존한다는 것은 어떤 고리, 보이지 않는 탯줄이 여전히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라는 중에도 우리의 원초적 두려움과 욕망은 여전히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아기가 아니지만 여전히 살아남지 못할까봐, 아무도 우리를 돌보아주지 않을까봐 두렵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가지게 되는 모든 욕망은 바로 이 원초적인 생존의 욕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기였을 때 생존을 보장받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우리는 매우 무기력하게 느낍니다. 다리가 있지만 걸을 수 없고 손이 있지만 그 무엇도 잡을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하고 돌보아줄 사람을 곁에 둘 방법을 생각해야 하고 그렇게 우리의 생존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누구나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외로움이 두렵고, 버림받는 것이 두렵고, 늙는 것, 죽는 것, 아픈 것이 두렵습니다.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깊이보기를 수행하면 이 두려움이 바로 우리가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생하였을 때 생긴 원초적 두려움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됩니다. 비록 이젠 성인이 되었지만 그 원초적 두려움과 욕망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삶의 동반자를 구하는 욕망 역시 부분적으로는 우리를 돌보아줄 사람에 대한 욕망이 계속 이어진 것입니다.
3. P26~27
- 만약 우리가 이해와 행복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면 그 관계의 기반은 아주 취약합니다. 지금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느 시기가 되면 그 사람이 귀찮아지고 버리고 싶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평화롭고 안전하다'는 느낌이 실은 그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어떤 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즐기더라도 그 카페가 반드시 매우 재미있기 때문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실은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 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을 켤 때도 우리가 보고 싶은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함께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서일 수도 있습니다.
4. P43
- 우리 내면의 작은 아이는 매우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주변의 어른들이 내리는 결정에 깊은 영향을 받습니다. 아이는 무엇이든 쉽게 마음에 새깁니다. 심지어 태어나기 전에도 아이는 소리를 들으면 그것이 고함소린지 노랫소린지 구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진정 아낀다면,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도 아이의 주변을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사랑은 아주 일찍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5. P50~51
- 우리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 속에 머물며 거기 얽매여 살아가기도 하지만, 또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까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이 가진 두려움 중 가장 큰 것입니다. 이 두려움을 은폐하거나 두려움을 피해서 달아나지 않고 두려움의 씨앗을 꿰뚫어보면 그때 비로소 두려움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강력한 방법 중 하나는 '다섯 가지 기억하기'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천천히 알아차림 속에서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며 다음의 '다섯 가지 기억하기'를 자신에게 말해주십시오. 그러면 그 두려움의 본성과 뿌리를 깊이 통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 가지 기억하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나는 늙어가는 본성을 타고 났다. 늙음을 피할 수 없다.
2. 나는 병마에 시달리는 본성을 타고 났다. 병마를 피할 수 없다.
3. 나는 죽어가는 본성을 타고 났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4. 내게 귀중한 모든 것과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하는 본성을 타고 났다. 그들과의 헤어짐을 피할 수 없다.
5. 나는 내 몸과 말, 마음으로 행한 행위의 결과를 물려받는다. 나의 행위는 나의 연속이다.
6. P54
- 평소 건강이 좋을 때 우리는 질병이 남의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걸핏하면 아픈 약골이라고, 항상 약을 먹고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힐난합니다.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언젠가 병이 듭니다. 이런 현실을 지금 부지런히 숙고하지 않는다면 그날이 갑자기 닥칠 때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될 겁니다. 아직 우리 다리는 튼튼합니다. 달릴 수도 있고, 걷기명상도 하고 축구도 할 수 있습니다. 팔로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능력을 우리 자신과 남들을 돌보는데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에너지를 감정적 고뇌를 변화시키고 남들과 자신의 괴로움을 완화하는 수행에 사용하지도 못합니다. 어느 날 우리는 침대에 누워 있게 될 겁니다. 단 하나의 소망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단 한 걸음이라도 걸을 수 있게 해달라는 소박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조차 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언젠가 병이 드는 것이 당연한 일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를 이해하면 건강에 대한 오만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바른 행동의 길이 나타나고, 시간과 에너지를 잘 사용하여 필요한 일을 하고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의미 없는 행동에 열중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7. P57
- 부처님께서는 수행승들이 단 세 벌의 법의, 발우 한 개, 물을 거르는 필터 한 개, 방석 한 개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이 얼마 안 되는 소유물마저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선 우리가 즐겨 수행했거나 잠을 잤던 나무 밑조차도 집착해선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나무 밑에서든 수행을 하고 잠을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복은 어떤 특정 장소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놓아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수행을 하여 놓아버리게 되면 우리는 오늘 당장 자유롭고 행복해집니다. 하지만 놓아버릴 수 없다면, 우리는 마침내 반드시 가야 하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도 고통을 받겠지만, 바로 오늘과 오늘 이후의 매일매일을 고통스럽게 보낼 것입니다. 두려움이 끝없이 우리를 따라다니기 때문이지요.
8. P67~68
-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실로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나 또는 우리 자신에게나 거기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거기 없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우리는 계속해서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잠자는 동안에도 달아나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으려고 그렇게 달아나는 것입니다. 어제 일어난 일을 걱정하며 그리고 내일 일어날 일을 근심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즐겁게 살 수가 없습니다. 만약 항상 두렵다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경이로움과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나날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흔히 행복이 미래에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하긴 하지만 지금은 가지지 않은 '완벽한' 조건들을 항상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벌어진 일들을 제쳐두고, 우리를 좀 더 안전하고 굳건하게 해줄 무언가를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미래가 무엇을 가지고 올지 항상 두렵습니다. 직업을 잃을까봐, 재산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을까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 어딘가에 있을 마법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질 그 순간을 희망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그러면서 삶은 오직 지금 이 순간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삶이 존재하는 오직 한 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9. P70
- 산을 함께 오를 때 우리는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즐기면 됩니다. 그렇게 걸으면서 과거도 미래도 놓아버리고 나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하느님의 왕국과 부처님의 정토를 만날 수 있습니다.
10. P73~75
- 실제의 두 가지를 설명하기 위해 파도와 물의 비유를 사용해 보겠습니다. 파도의 차원, 즉 역사적 차원에서 보면 파도에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파도는 다른 파도에 비해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합니다. 다른 파도에 비해 더 아름답기도 합니다. 파도는 거기 있거나 또는 없습니다. 지금은 거기 있지만 나중에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 역사적 차원을 접하면 이 모든 개념들이 다 있습니다.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 높고 낮음, 가고옴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파도를 좀 더 깊이 접해보면 물을 만나게 됩니다. 물은 파도의 다른 차원입니다. 그것이 바로 궁극적 차원입니다. 역사적 차원에서 우리는 생사, 유무, 고저, 거래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이 모든 개념들이 제거됩니다. 파도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물을 접할 수 있다면, 또한 동시에 파도가 물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파도는 위에서 말한 시작과 끝, 생과 사, 있음과 없음 등의 개념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움이 없을 때 굳건함과 기쁨이 옵니다. 그 파도의 참성품은 생도 없고 사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물의 성품입니다. 우리 모두는 파도와 같습니다. 우리에겐 역사적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어떤 지점에선 존재의 '시작'을 말하고 또 시간의 다른 지점에선 '존재의 끝'을 말합니다. 지금은 존재하지만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이런 개념에 사로잡혀 있기 떄문에 두려움이 있고, 질투가 나고, 갈애가 일어나며, 마음속에 온갖 갈등과 번뇌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지금 여기'에 도착할 수 있다면, 좀 더 굳건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면, 우리의 참성품을 만나고 궁극적 차원을 접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궁극적 차원을 접하면 지금까지 고통을 주었던 모든 개념들을 떨쳐버리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그 힘을 다소 잃으면 우리는 궁극적 차원의 시각으로 우리의 근원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 늙음을 역사적 차원에서 보지만 궁극적 차원에서 생사는 만물의 참성품이 아닙니다. 만물의 참성품은 생사에서 자유롭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역사적 차원에서의 수행이고, 두 번째 단계는 궁극적 차원에서의 수행입니다. 첫 뻔재 단계에서는 우리는 생과 사가 일어난다고 받아들이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는 궁극적 차원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생사가 우리의 개념적 사고에서 온 것이지 참실제에서 온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궁극적 차원과 계속 접촉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는 만물의 실제와 접하게 됩니다.
11. P110~111
-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명상수행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멈추기와 깊이보기입니다. 명상의 첫 부분은 멈추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뒤 계속 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강항 습관이 되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산 수많은 조상들도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습관을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계속 달리고 긴장하고 여러 가지 일에 마음을 휩쓸리면서 우리 마음은 지금 이 순간 속에 완전히 깊숙이 평화롭게 머물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매우 피상적으로 보는 데 익숙해지고 잘못된 인식과 그러인해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에도 휩쓸립니다. 이로 인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되고 삶이 비참해집니다. 이 수행은 우리 자신에게 멈추는 훈련, 즉 이 모든 것들을 좇아 달리는 일을 멈추도록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짜증도 화도 내지 않고, 두려움이나 절망이 없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이러저런 프로젝트와 함께, 또는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달리느라 평화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문제가 전혀 없을 때라도 자신을 이완하고, 멈추고, 지금 이 순간의 경이로움으로 돌아오는 수행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사물을 깊이 보게 됩니다. 멈추기를 제대로 수행하면 깊이보기를 수행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미 사물을 깊이 보고 있으니까요. 멈추기와 깊이보기는 하나입니다. 이 둘은 동일한 실제의 양면입니다. 무언가에 집중하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집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때 우리는 멈추고 싶이 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멈추고, 긍정적인 것들과 접하고 있을 때 우리는 신선하고 명료하며 웃음을 웃고 있습니다. 그렇게 수행의 자양분을 흡수한 우리는 명료한 마음, 웃음, 기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양분을 줄 수가 있습니다.
12. P112
-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평화롭게 머무십시오. 감정이 너무 강렬해서 호흡만으로는 멈출 수도 이완할 수도 없을 때는 밖으로 나가서 걸으십시오. 발걸음에 집중하면 마음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됩니다. 생각이나 판단, 짜증, 강한 감정, 프로젝트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서 모든 것을 멈추고 느긋하게 머무세요. 멈추고 내면의 동요와 긴장을 다 내보내십시오. 지금 강한 감정을 체험하고 있지않다 해도 그렇게 수행을 계속하면 우리가 정말 무언가 생각하고 숙고해야 할 때, 무언가를 깊이 보아야 할 때가 왔을 때 조용히 앉아 깊이 보면서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13. P122~123
- 명상수행은 두 가지 측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멈추기와 고요하게 진정시키기를 하고, 그런 다음에 깊이보기를 하여 내적 변화를 가져옵니다. 알아차림의 에너지가 충분하면 어떤 감정도 깊이보기를 할 수 있고 그 감정의 참성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 할 때 그 감정을 탈바꿈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감정은 뿌리가 깊습니다. 너무도 강해서 그대로 두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감정을 계속 부정하고 억압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폭발하여 자신과 남에게 해를 끼칩니다. 하지만 감정은 그저 감정일 뿐입니다. 감정은 왔다가 잠시 머물고 그리고 다시 돌아갑니다. 단 하나의 감정 때문에 우리가 왜 자신과 남에게 해를 끼쳐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감정보다 훨씬 큰 무엇입니다. 깊이보기를 수행할 수 있다면 그런 고통스런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내어 그 뿌리를 뽑아버릴 겁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감싸안는 수행만으로도 이미 매우 도움이 됩니다. 만약 감정이 올라온 위기상황 중에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귀의해야 할지를 안다면, 만약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아랫배가 올라오고 꺼지는 것에 주의를 15분, 20분 또는 25분까지 집중할 수 있다면, 폭풍은 지나가고 우리가 견딜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강한 감정이 밀려올 때 견디는 데 성공하면 마음의 평화가 더 굳건해집니다. 이런 수행을 체득하면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다음번에 강한 감정이 다시 올라오면 다루기가 쉬워집니다. 우리가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14. P127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의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보았더니 고통 밑에 매우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 있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매서운 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고통을 잘 다루지 못하는 것이다."
15. P129~130
- 때로 자녀, 배우자, 부모 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잔혹한 말이나 행동을 하여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만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대 역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런 고통이 없었다면 그렇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고통을 변화시킬 방법을 찾기 못했고 그래서 모든 두려움과 화를 우리에게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 에너지를 생성하여 먼저 우리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런 다음에 상대를 돕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상대를 벌한다면 그의 고통은 커지고 그리되면 폭력의 악순환은 계속될 겁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나 우리 자신에게나 더 많은 폭력과 불의와 고통만을 초래합니다. 누구나 내면의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깊이 숨 쉴 때 내면에 있는 지혜의 씨앗을 접할 수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지혜와 자비의 에머지에 단 1주일만이라도 자양분을 공급한다면 그로 인해 세상에 만연한 두려움, 화, 증오의 수위가 줄어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한데 모으는 수행을 하여 이미 내면에 있는 지혜와 자비의 씨앗에 물을 주라고, 그리고 깨어 있는 소비를 하라고 독려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것은 진정 평화 혁명일 것입니다. 이 혁명만이 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게 해 줄 수 있습니다.
16. P131~132
- 대부분의 고통은 오해에서 옵니다. 상처를 없애려면 오해부터 없애야만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어. 하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내가 몰랐던 것들이 숨어 있을 수 있어.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더 들어봐야겠어."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에 대해 오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쪽의 이야기를 경청하려는 노력을 할 때 우리의 이해는 커지고 상처는 작아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첫 번째로 할 일은 우리 머리에서 그린 그림이, 즉 우리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인정하는 일입니다. 수행은 우리가 좀 더 마음을 진정시키고 느긋하게 이완할 때까지 호흡명상을 하거나 걷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할 일은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고통스럽다는 것, 그리고 그 고통이 우리 자신의 오해에서 왔을 수도 있다는 걸 알리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비난으로 다가가는 대신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설명해달라고,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이나 말을 했는지 이해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할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아마 제일 어려운 일일겁니다. 이것은 진정으로 이해하고 우리의 인식을 수정하기 위해서 상대의 대답을 주의 깊게 듣는 겁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그동안 오해의 희생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오해의 희생자였을 겁니다.
17. P133~134
- '자비롭게 깊이듣기'란 상대방이나 상대국이 지금까지 기회가 없거나 용기가 없어, 또는 지금까지는 아무도 그들의 말을 깊이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 못했던 말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처음 그들의 말은 비난, 억울함, 힐책으로 가득할 수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침착하게 앉아서 들으십시오. 이렇게 드는 것은 그들의 고통과 오해를 치유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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