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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누구의 삶도 틀리지 않았다 (박진희 저 / 출판사 앤의서재)

by hyeranKIM 20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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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생각해 보면 시에스타는 그들의 굳건한 약속이자 옳다고 믿는 가치관이었다. 그 마을에 누구 하나가 약속보다 '손님에게 얻는 이익'을 앞세웠다면,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시스템이었다. (아, 물론 아늑한 휴식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민족의 기질이 시에스타를 끝내 구해낼 거지만.)

 

- 아침에 알베르게에서 일어나면 조곤조곤 한국말이 들린다.

"오늘 어디까지 갈 거야?"

"오늘 몇 킬로미터 걸을 거야?"

"거기 가면 늦게까지 문 여는 대형마트 있어?"

오랫동안 출판사 에디터로 살아온 나는, 그런 이야기가 들리면 피식 웃음이 났다. 매일 아침 업무회의에서 하던 말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반드시 해야 할 몫, 마쳐야 할 분량이 주어지고, 퇴근 무렵 업무 일지에 결과를 기록하고, 미처 다하지 못한 분량에 괴로워하거나 내일 닥칠 일들을 두려워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카미노를 걸으며, 그간 내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일을 하는 동안 가슴이 쿵쾅댔구나, 늘 중요한 일을 빠뜨린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구나, 내가 나를 닦달하며 살아왔구나...

 

- 나답게 모든 일을 결정하니 쉽사리 스트레스 받지 않았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결혼식에 찾아가 얼굴도장을 찍던 내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시키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결혼식에 온 사람, 안 온 사람 구분하고 기억해 내며 입술을 삐죽거리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 제주에도 '나만의 시에스타'를 굳건하게 지키며, 또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 조금 편하고 안락한 것들을 포기한 사람들.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어도 괜찮아, 하며 스스로를 도닥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절대 게으르지 않고, 정직한 노동으로 제주를 더 아름답게 가꿔주는 사람들.

그렇게 정리를 하는 중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들을 직접 만나기로 했다. 내가 만난 이들은 나이도, 성별도, 직업도, 처한 상황도 다르다. 이제 막 제주로 이주한 사람도 있고, 서울과 제주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으며, 10년 이상 제주에서 머문 사람도 있다. 그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며, 제주 곳곳에 흩어져 살지만 미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공통의 분모들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면 이렇다.

: 돈보다 소중한, 포기할 수 없는 나만의 가치관

: 그 가치관을 지지해 주는 주변의 사람들

: 제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 제주에 와서 자연스럽게 '몸 쓰는 일'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다. 제주 사람들은 '몸을 쓰는 일'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다. 제주 사람들은 몸을 쓰는 노동을 당연시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몸을 쓸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정직하게 노동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다. 원래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지 않은가. 밭은 갈고 집을 짓고, 충분히 몸을 쓰고 걱정할 틈도 없이 곯아떨어지는 그런 삶 말이다.

 

- "몸을 쓰는 일은 뒤끝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때만 충실하게 일하면 집에 가서 잔업을 하거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생각해 보면, 저는 아주 어릴 적부터 그런 일에 능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 어머니 따라 도배하러도 다니고, 중고등학교 때는 신문 배달도 오래 했죠."

 

- "저는 물 흐르듯이 살아왔어요.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죠. 떠밀리면 떠밀리는 대로 흘러도 가보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았어요. 제주에서 살고픈 마음도 그냥 자연스럽게 든 거예요. 뭐 몇 년 살아보겠다. 그런 마음도 없었어요."

 

- "정작 나는 이렇게 사는 게 너무나 좋고 행복한데... 다들 걱정하시죠. 특히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결혼하지 않는다고, 가족들이 많이 걱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심플하게 살고 싶어요. 앞으로도. 일할 때 열심히 일하고, 놀 때 즐겁게 놀면 그게 내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 생각해요."

맞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걱정한다고 한들,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있을까? 미래를 알 수 있을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의 인생인데, 누구의 삶은 맞고 누구의 삶은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 일용(日傭, 하루의 노동)으로 일용(日用) 할 양식을 얻고 사는 그야말로, 신이 인간을 지은 뜻 그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결국 인생은 혼자 힘으로만 살 수 없고 서로 돕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어요. 특히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은 제가 도시를 떠나 제주에 살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입니다. 뭐든 혼자 책임지고 해결해왔던 제 인생의 전환점이죠."

 

- "아픈 뒤부턴 생각과 걱정이 너무 많았어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는 올레길을 걸으며 너무너무 단순해지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달걀은 몇 개, 물병은 몇 개 챙길까?', '초코바도 좀 챙길까?', '다음 올레 표시는 대체 언제 나타나지?' 이런 생각들을 하느라 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틈타지 못했죠. 그리고 혼자 길을 걷기 시작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어요."

 

- 홀로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런 힘이 있다.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살면서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는 것도 알게 해준다.

하늘과 땅, 몇 모금의 물, 약간의 간식...

그런 하찮고 작은 것들의 '충분함'을 깨닫게 해준다.

 

- 배 시간이 지나도록 그 아이들과 즐겁게 놀았다. 돌멩이, 보말, 스티로폼, 조개껍데기, 그들에게 놀 거리는 충분했다. 오랜만에 불안감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은 꽃도 보며 사는구나, 보말도 잡고 사는구나, 휘황찬란한 장난감 없이도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그 아이들을 보면서 더 가지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 그곳에서 일하고 여전히 강아지와 함께 익숙한 마을을 산책했다.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게 두고, 하지만 끝까지 사랑해야 할 것들은 곁에 두면서 그렇게 계속 자라고 있었다.

 

- "우린 오히려 제주에서 다양한 일들을 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고, 그것마저 경쟁해야 하잖아요. 관련해서 쌓은 포트폴리오가 없으면 아예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요. 제주에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서 좀 생소해 보이는 일들도 '한 번 해볼래?' 제안을 받죠. 또 나는 열심히 해서 포트폴리오를 쌓아가고, 그걸로 또 다른 일들을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 "불안감보다는 '서프라이즈'에 대한 기대를 안고 살고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제주의 삶은 힘드니까요. 대신 우린 서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어요. 서울에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잖아요. 그래서 더 잘하고 싶어져요. 돈과 상관없이."

 

- "어떤 느낌이냐면요. 바다에서 한라산까지 기어가는 느낌이에요. 우리에겐 '일사천리' 같은 게 존재하지 않아요. 겨우겨우 한 발짝씩 가는데, 근데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잖아요. 달팽이처럼 성장하고 있어서, 즐겁게 기어가고 있어요."

 

- 생각해 보면 내가 열심히 하면 회사만 좋아졌다. 회사가 아니라 내가 좋고, 버티는 삶이 아니라 누리는 삶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 안정적인 바운더리 안에서 가장 나답게 사는 것. 그게 '나'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제주에서 더 열정적으로 살고 있어요.

 

- "유년을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나를 정말 아껴주는 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몇몇 선생님이 내 인생에 나비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리지도 못했을 것 같고요. 제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나도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수업을 나가는 곳이 주로 벽촌 학교나 지역아동센터예요. 센터에는 환경이 어려운 친구들이 많이 오는데, 그중에서도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혼자 노는 아이들이 보이죠. 저는 그런 아이에게 특별히 더 신경을 써요. 그리고 오랜 뒤에 변화한 모습을 보면 정말 기쁘죠. 우선희라는 아이를 또 하나 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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