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이 되면 가진 걸 모두 버리고 앙상한 알몸으로 견디는 그 초연함에서, 아무리 힘이 들어도 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 한결같음에서, 평생 같은 자리에서 살아야 하는 애꿎은 숙명을 받아들이는 그 의연함에서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살아가려는 그 마음 씀씀이에서 내가 정말 알아야 할 삶의 가치들을 배운 것이다.
- 결혼 전 어느 늦은 밤, 술에 만취해서 나를 찾아온 녀석이 그랬다.
"형, 있잖아. 오늘 우리 애인을 만났는데 감기 몸살에 얼굴이 반쪽이 됐더라. 열이 펄펄 끓는데 병원도 안 가고 그냥 참고만 있었대. 그 돈으로 나 생일 선물 사 주려고."
단칸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한 그들. 어려운 형편에 홀아버지까지 모시느라 허리가 휘는 날들이 계속됐지만, 두 사람은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로 아끼고 사랑하며 서로를 보듬어안았다. 몸이 약한 아내가 안쓰러워 석 달 치 점심값을 아껴 보약을 지어 오는 남편과,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남편이 불쌍하다며 매일 저녁 눈물짓는 아내.
그렇게 둘이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 것 같았는데, 녀석이 이제 길어야 한두 달밖에 못 산단다. 병원비가 없어 항암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터였다.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는 녀석을 보며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그런데 그들 부부는 그런 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늘 웃는 얼굴이었다. 한 번쯤은 나를 붙잡고 울 법도 한데, 그러면 감싸 안고 다독여 줄 준비도 되어 있는데 녀석도 그의 아내도 너무나 씩씩했다.
한 번은 너무나 엉뚱한 녀석의 행동에 오히려 내가 웃었더랬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녀석이 제 아내를 침대에 눕혀 놓고는 자장자장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지난밤 너무 아파 고생을 했는데 그런 자신 때문에 아내도 잠 한숨 못 잤단다. 싫다는 아내를 억지로 눕히고는 우격다짐으로 다독이는 중이었다. 나를 보더니 저도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어느덧 걱정을 잊고 있었다. 또 병원에선 어떻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당사자들이 저렇게 밝고 씩씩하다면 언젠가 기적처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도 생기기 시작했다.
'사랑 앞에서 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바보 같은 착각일 뿐이었다. 녀석의 웃는 모습을 보고 돌아선 며칠 뒤 이른 새벽, 나는 비몽사몽간에 녀석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녀석의 아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마지막까지 웃으며 떠났다고, 모두에게 인사 전하더라며 남편의 죽음을 알렸다.
헐레벌떡 영안실로 달려갔더니 영전을 지키는 건 그녀뿐이었다. 병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이하는 그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제서야 드는 생각, 그 녀석이 정말 죽었구나...
뭐라고 위로의 말도 못 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그녀가 다가와 남편으로부터 주목나무 얘기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입원 수속을 마치고 병실 침대에 누운 남편을 본 순간 울음이 물밀듯 밀려오는데, 남편이 그런 자신을 다독이며 주목나무 얘기를 꺼내더라는 거였다. 태백산의 주목나무가 살아 숨 쉬는 동안 꼭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그러니 나 떠나보내고 나서 울지 말라고...
낮 동안에 내가 보았던 그들의 웃음은 매일 한 차례씩은 찾아오는 고통을 그렇게 이겨 낸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네들의 힘겨운 싸움 한가운데에는 몇백 년을 하루처럼 살아온 주목나무가 있었다.
죽기 바로 전날 밤, 마지막으로 녀석이 아내에게 남긴 말,
"우리 다음에 만날 때는 주목나무처럼 오래오래 같이 살자."
- 누군가는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게 더 많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생을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 사실 한 번 사는 것도 이렇게 힘겨워하는 우리들이다. 왜 그렇게 아프고 구질구질한 일이 많은지... 그래서 가끔은 스스로를 대견해한다. 이렇게 살기 힘든 세상인데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용하다고. 아마도 이 때문일 게다, 내 눈에 아까시 나무가 아름답게 비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 아무리 좋은 환경에 풍족한 영양분을 주어도 잎을 떨구고 죽어 가는 나무들에 비하면,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모습이 기특하지 않은가. 베어 내고 베어 내도 있는 힘을 다 끌어모아 새순을 올리고 꽃을 피우는 아까시 나무를 그래서 나는 감히 나무랄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아까시 나무엔 유독 가시가 많은데, 그것은 하도 많은 사람들에게 구박을 받다 보니 나무가 자기방어책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아까시 나무에 달린 가시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래도 꿋꿋이 살 겁니다"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모든 생명이 기지개를 켜는 봄 한가운데서 눈꽃을 피우고 있는 조팝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지나 버린 과거가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눈꽃의 시리고 처연한 느낌 때문일까. 조팝나무 아래서 내 눈을 스쳐가는 것은 달콤하고 아름답기보다 대부분 아프고 슬픈 모습들이다. 젊은 시절 방황했던 순간들과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남은 인생 일부와 바꾸고서라도 물리고 싶은 기억들... 그러나 그것이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랴. 어느 누구라도 웬만큼 인생을 살다 보면 그런 아픈 기억들은 생기기 마련인 것을.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과거 속 기억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몸에 난 상처는 없어져도 마음에 난 상처는 아무리 작아도 없어지지 않는 법. 아무리 잊으려고 애를 쓰고, 스스로 버렸다고 자위해도 지울 수 없는 상흔이 되어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과거가 아닐까 싶다.
- 과거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얘기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다고, 그러나 그 짐을 안고 살아가기에는 남은 삶이 너무나 고달프다고.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괴로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지나가 버린 시간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사이, 기억 속 과거는 부메랑이 되어 어떤 형태로든 현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왜 아니겠는가. 괴로운 과거를 떠올리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내 현실은 과거라는 덫에 갇혀 버리는 것을.
과거의 삶이 그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이제는 아파하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보듬어 안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천덕꾸러기 취급할 기억조차 우리들 각자가 만든 삶의 흔적이 아니던가. 후회하고 아쉬워하는 것으로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안에 미련이 남을수록 현실의 내가 망가져 간다는 것이다. 아니 앞으로의 남은 삶까지 망치는 독이 될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지울 수 없는 과거라면 애써 떨쳐내려 하지 말자.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오히려 평안함을 되찾고 풀리지 않던 생의 매듭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 후회와 상처 주기의 반복.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서로를 함부로 대하고, 쉽게 상처를 주는 게 지금의 우리들 모습이다.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왜 상처 주기의 강도도 높아지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그런다. 모르는 남 같으면 그렇게 하겠냐고, 사랑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서로의 감정에 솔직하다 보니 그런 게 아니겠냐고.
하지만 상처를 주는 것과 감정에 솔직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은 서로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부분이지만, 상처를 주는 것은 한쪽에서 한쪽으로 향하는 일방통행이다. 그리고 결국 그 상처는 상대를 찌른 만큼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오며, 아픈 후회로 남게 된다.
- 때로는 밉고 때로는 보기 싫을지라도 돌아서면 보고 싶어지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게 얼마나 커다란 삶의 축복인가. 삶은 어쩌면 끝없는 인연 맺기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한데 어우러진 채 끊임없이 서로를 타고 올라가는 등나무처럼 말이다.
등나무를 볼 때마다 나는 가끔 내가 맺은 인연들, 그리고 앞으로 맺어 갈 인연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가깝다는 이유로 오히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적은 없는지 돌이켜보면서.
-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긴 시간 더디 자라며 결국엔 그 값어치를 발휘해 단단한 도장으로 쓰이는 회양목, 그리고 헤이 온 와이를 전 세계적인 책 마을로 만든 부스.
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걸었던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당장은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자기가 가고자 하는 길을 묵묵히 가는 그 모습이 얼마나 위대하고 멋진가. 그리고 생각해 본다. 내 안에는 과연 기나긴 시간 더디면 더딘 대로 그렇게 노력해 온 무언가가 있는지를.
- 모과나무가 아름다운 이유는 눈으론 절대 찾을 수 없는 숨은 매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 노간주나무는 찾아 든 손님을 절대 식객 취급하지 않는다.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찾아오는 거지에게 눌은밥 한 사발이라도 들려 보내는 그 옛날 어머니 인심처럼 진달래를 넉넉한 마음으로 맞아들인다. 그러고는 제 몸 웅크려 자리를 내주고 더불어 함께 산다. 어쩔 땐 객식구가 더 많아 진달래 틈에 노간주가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처음 노간주나무를 봤을 땐 그랬다. 참 바보 같다고, 제 코가 석 자면서 남 다 퍼 주는 놈이 어디 있냐고.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내게는 노간주나무의 그런 바보 같은 모습이 오히려 사랑스럽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제 것만 챙기는 사람보단 형편이 어려워도 주변 사람 도와주며 허허거리는 사람이 더 정겹지 않은가. 겉보기엔 답답해 보일지 몰라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결국에 다시 찾게 되는 건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다.
가끔 사람과의 일로 괴로울 땐, 뭔가 억울한 일이 생길 때 나는 노간주나무를 떠올린다. '일평생 불평 않고 그렇게 사는 놈도 있는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말이다.
도봉산에 있는 노간주나무는 오늘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좀 바보 같으면 어떻습니까? 좀 손해 보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더불어 사는 세상 아닙니까?"
- 대나무는 일반적인 나무의 삶에서 참 많이도 벗어나 있다. 다른 나무들은 살면서 수십 번, 많게는 수천 번까지 꽃을 피우지만, 대나무는 단 한 번 꽃을 피우고 즉시 생을 마감한다.
나무들에게 있어 꽃은 번영과 존속의 기원을 담은 화려한 결정체다. 이른 봄꽃을 피운 나무들이 희망과 기쁨으로 충만해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대나무에게 있어서 꽃은 아픔이요, 고통이다. 단 한 번 개화한다는 운명도 애달픈데 거기에 목숨마저 내놓아야 하는 대나무의 삶.
그러나 대나무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 조금이라도 삶을 연장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거나 다음 해를 기약하며 땅속줄기를 지키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제대로 된 꽃을 피우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그만의 푸르름, 그만의 곧음을 간직한 채 말이다.
이처럼 기구한 자신의 삶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대나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대나무의 꿋꿋한 푸르름이 유독 인상 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싶다.
그런 대나무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이런 기원을 하게 된다. 내 남은 삶이 대나무처럼 주어진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용기 있는 모습이기를. 그래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한세상 잘 살고 간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 가끔씩 나는 내가 나무로 태어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중에서도 만일 은행나무로 태어난다면...
일단은 좋을 것 같다. 은행나무처럼 사람들의 따뜻한 관심 속에 오랜 시간 빛을 발하는 나무도 없을 테니까. 아주 긴 시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때론 치성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연인의 편지에 함께 동봉되기도 하고 지친 발걸음을 쉬게 하는 그늘이 된다는 것. 생각만으로 가슴 벅찬 일이다. 또한 백 년을 일 년같이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건 장수의 표상인 은행나무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깊이 숨겨진 비밀을 생각하면 은행나무가 된다는 것에 선뜻 자신이 서질 않는다. 천 년이고 이천 년이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으며 사는 삶은 결국 철저한 외로움을 전제로 얻은 게 아니던가.
수천 년 버티는 동안 은행나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게 여유로운 모습 속에, 노랗고 화사한 이파리들 속에 그런 고통이 숨어 있다는 걸 누가 알아줄까.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데, 은행나무를 보면 그 말이 실감이 난다.
- 내가 아내를 선택했을 때 그랬듯이 딸아이의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위랑 같이 살 것도 아닌데, 내가 뭐라고 트집을 잡거나 반대하겠는가. 다만 나는 자식이 딸 하나뿐이다 보니 사위를 맞으면 아들 삼아 친구 삼아 지내고 싶다는 바람은 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아버지인 내 욕심일 수 있기에 딸아이에게 내색한 적은 없다.
- 전나무 숲의 나무들은 그렇게 위로만 곧게 자라면서도 절대 흔들리거나 부러지는 예가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저희끼리 적당한 간격으로 무리를 이뤄 각종 풍상을 이겨 내기 때문이다. 만일 전나무가 저 혼자 잘났다고 한 그루씩 떨어져 자랐더라면 그 곧은 줄기가 눈이나 바람, 서리를 이겨 내지 못해 결국엔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가직하게 외대로 자라지만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전나무. 결국 더불어 사는 전나무의 모습은 제 스스로를 더 굵고 강하게 만드는 바탕이 된다.
- 한결같긴 하지만 절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옳다고 우기는 사람들 말이다. 애초의 강직함이 독단으로 변질되어 자기 세계에 갇혀 버리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곧은 삶은 외로운 법이라고. 혼자 가야 하는 길이라고. 그러나 나는 곧은 삶일수록 더불어 남과 함께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혼자 강직하고 혼자 곧으려는 자는 절대 남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초심마저 흐려져 버리면, 종국엔 고집불통으로 남아 모두에게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오로지 자기주장만 하며 끝까지 고집 피우다 무너진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어디 한둘인가.
- 나는 회화나무 앞에 서면 옛사람들처럼 큰 인물이 나오게 해 달라고 기원하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나 같은 서민들이 살기 좋은 세상, 먹을 것 부족해도 웃을 일 많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옛날 궁궐에는 그렇게 많이 심었다는 회화나무를 정작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혹시 내가 못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겠지만, 왠지 정치인들이 회화나무 보기를 꺼리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 한 켠이 씁쓸해진다.
- 나무를 대하면서부터 나는 내 안에 있던 조급증이 많이 사라졌다는 걸 느낀다. 나무를 키우는 일이 끊임없이 기다림의 과정이며, 그 안에서 스스로 여유를 찾아야만 가능한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일분일초를 앞다투며 사는 시대에 기다림을 이야기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는 곡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참고 기다리면 되는데, 그 인내심이 없어서 소중한 꿈을 중도에 포기해 버리는 예를 너무도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더 슬픈 일은 어느 순간부터 기다리고 인내하는 삶이 싫어 아예 꿈조차 꾸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누군가 옆에서 기다려보겠노라고, 견뎌 보겠노라고 말하면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라며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다. 정작 자신의 인생이 어떤지도 모른 채 말이다.
- 나는 가끔 나무를 보며 되뇐다. 내가 눈앞의 이득만 따지고 있지는 않은지, 잘못된 기다림으로 마음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저 편한 길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임시방편은 말 그대로 임시방편일 뿐이다. 그것으로 삶을 다 채울 수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그러기에는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오늘도 나무를 치료하며 기다림의 미학을 배운다. 일등은 아닐지라도 마지막 결승선은 내 두 발로 넘고 싶으니까.
-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가 싫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오로지 혼자 가꾸어야 할 자기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떨어져 있어서 빈 채로 있는 그 여백으로 인해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할 수 있게 된다.
구속하듯 구속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서로 그리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일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꼭 필요하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 주지 않는, 그러면서도 서로의 존재를 늘 느끼고 바라볼 수 있는 그 정도의 간격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 생각해 보면 인간이란 존재는 나무와 견주어 볼 때 버리는 것을 참 못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살이라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한번 손에 쥔 것은 절대로 놓을 줄을 모른다.
손쉬운 예로 이사할 때만 해도 그렇다. 남들이 보면 버릴 것이 하나 가득인데 주인은 나중에 꼭 쓸 데가 있을 거라며 가져가기를 고집한다. 가진 것 때문에 고통을 받더라도 버리면 후회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무리하게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사는 것. 아마도 그것은 우리들 대부분의 삶의 모습일 것이다.
- 버리는 것의 고통은 분명 크다. 버리기 이전에,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해야 할지 판단하는 것부터가 힘이 든다. 내 삶에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더라도 막상 포기하려면 다시 보게 되는 게 사람 마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집착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면, 그래서 어차피 버려야 할 것이라면, 버리는 순간만큼은 나무처럼 모질고 냉정해야 한다. 그렇게 어떤 미련도 남지 않았을 때, 겨울을 넘긴 봄 나무가 그러하듯 비로소 나 자신을 더 크고 풍성하게 키워 갈 수 있다. 버리고 비워 내는 만큼 비로소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 내 주변에는 나무를 잘 키우는 사람들이 몇몇 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항상 관심 있게 나무를 지켜보되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참 무심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절대 방치가 아니다. 품 안에 두지 않고 거리를 두되, 늘 지켜보면서 나무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난을 키워 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안다. 키우기 어려운 대표적인 식물 중의 하나인 난은 아무리 좋은 비료를 주고 매일같이 신경을 써도 곧잘 죽어 버린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난을 병들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지나친 손길이다. 사람 손끝에는 미세한 염분기가 있는데 그 손으로 잎을 자꾸 만지니 난이 스트레스를 받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이다. 염 성분은 난이 자라는데 치명적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끼던 난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평소보다 더 잎을 만지며 호들갑을 떤다. 결국 잘못된 사랑 표현이 난을 죽이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집안에서 식물을 키우며 괜히 영양 주사를 놓고 바람맞는다고 창문을 걸어 잠그고, 매일 가위를 들고 잎을 다듬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키운 식물들이 오래가는 걸 보질 못했다. 사람 손을 많이 탄 분재는 주인이 어느 순간 잠시 손을 놓으면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죽어 버린다. 남이 돌봐 주는 데 이미 익숙해진 탓이다.
누군들 잘못되라고 그랬겠는가. 사랑하는 마음도, 그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표현하고 싶은 심정도 이해한다. 그렇지만 지나친 것은 부족함만 못한 법이다.
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품 안의 자식이라고 무조건 감싸고돈다거나 지나치게 간섭하면 안 된다고, 그저 끊임없이 지켜보자고... 물론 때로는 지켜보는 게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무를 떠올리며 내 마음을 다잡았다.
- 칼릴 지브란이 쓴 <예언자>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식에게 사랑은 줘야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을 자식에게 주입시키려 들지 마라."
- 사무실, 공부방, 책상 위(인공조명): 테이블야자, 러브체인 스투키, 아펠란드라, 접란, 싱고니움, 피토니아, 다육식물류, 아이비, 호야, 페페로미아, 세네시오, 셀라지넬라, 이끼류
밝은 실내(창가): 골드크레스트, 산세비에리아, 시클라멘, 포인세티아, 벤자민고무나무, 칼랑코에, 마란타, 파키라, 게발선인장, 틸란드시아, 멕시코소철, 꽃기린, 미모사
어두운 실내: 디펜바키아, 드라세나(행운목), 히포에스테스, 스파티필름, 트라데스칸디아, 베고니아
침실: 난류, 안스리움
욕실: 프테리스, 아디안텀, 네프로네피스, 보스톤, 펀 등 고사리류나 이끼류
- 수경재배 가능한 식물
관엽식물: 히야신스, 안스리움, 트리안, 피커스푸미라, 피토니아, 보스톤펀, 디펜바키아, 마리안느, 싱고니움, 아스파라거스, 관음죽, 제브리나, 접란, 스파트필름, 개운죽, 백죽, 금천죽, 아이비, 콩란, 러브체인, 테이블야자, 신답서스, 워터코인, 아마릴리스, 금전수, 시페루스 등
식용식물: 콩나물, 무, 양파, 고구마, 당근, 감자, 숙주나물, 토마토, 미나리, 파드득나물, 쑥갓, 시금치, 양상추, 부추, 샐러리, 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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