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은 싫든 좋든 우리가 혼자임을 깨닫게 한다. 혼자라는 걸 깨달았을 때 맛보는 기분은 그때그때 다르다. 어느 때는 불안하고 초조해져서 미래에 나쁜 일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또 어느 때는 혼자서 어디까지나 걸어갈 수 있을 것처럼 묘하게 기운이 난다. 그리고 어느 때는 바로 전까지 함께 있던 사람이 진심으로 소중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기도 한다.
특히 번화가의 밤이 점점 밝아지는 것은, 아마도 그런 사실을 깨닫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혼자라는 사실을 알 수 없도록, 도시는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이나 네온사인으로 밤을 어딘가로 쫓아내려고 한다. 어두운 밤하늘을 부자연스러운 보라색으로 계속해서 물들인다.
- 여행의 시작을 몸소 느끼게 하는 것은 공항에서 시내로 이어지는 밤거리에 있었다.
- 두려우니까 취하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 흠뻑 취하니까 그렇게나 용감무쌍해진다.
- 아주 가끔 불안감에 급격히 휩싸일 때가 있다. 꼭 밤에 그렇다.
그 불안감은 뚜렷한 정체가 없다. 왠지 여러 가지 일이 모두 다 잘 굴러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 '여러 가지 일'이 무엇인가 하면 나도 잘 모른다. 모르는데도 이젠 다 틀렸다는 기분이 든다. 마흔한 해를 살다 보면 이런 기분을 이미 여러 번 맛봤기 때문에 대처법도 달라진다. '지금은 밤이니까 이렇게 불안한 거야'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침이 되면 홀랑 까먹을 게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편안해진다. 바로 잠이 든다.
-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한없이 한가로웠던 나의 그 여행도 앞으로 절대 반복할 수 없으며, 죽은 시인을 떠올리며 촛불 아래서 책을 읽던 그 장소에도 두 번 다시 갈 수 없다는 것을.
- 세상 어디든 우리 동네 같지는 않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 우부야마의 밤길을 걸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로 밤 그 자체였다. 멀리서 개굴개굴하는 소리가 들렸고, 저벅저벅 걷는 내 발소리도 들렸다. 그것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걷는 사람도 하나도 없었다. 내일은 비가 오려나.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별도 달도 없었다. 도착해서 보니 자판기가 팔고 있던 건 담배가 아니라 음료였다. 하얀 불빛에 날벌레와 작은 나방이 몇 번이고 날아와 몸을 부딪쳤다. 담배는 포기할까. 터벅터벅 되돌아갔다. 편의점에 익숙해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편의점 없는 세계에 익숙해지는 것은 이상하게도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
- 비행기 안에서는 시간이 뒤죽박죽이다. 시간과 함께 이동하기 때문이다.
- 이야기를 주고받음으로써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열일곱 살 여름에 처음 알았다.
- 밤을 그저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만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은 나이 듦이나 익숙함이 아니라 사랑이 아닐까 싶다. 사랑을 하면 밤은 더 이상 잠들기 위한 어둠이 아니게 된다.
- 이 느낌, 여행지에서 취한 채 걷고 있을 때와 아주 비슷하다. 취했기 때문에 낯선 장소가 두렵지 않다. 어둠이 두렵지 않다. 누가 덮칠지도 모른다든가 들개가 짖을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단지 들뜬 기분으로 밤 속을 성큼성큼 나아간다. 사랑이라는 것은 술처럼 사람을 들뜨게 한다.
- 플랫폼 지붕 때문에 가늘고 길게 오려진 것처럼 보이는 남색 밤이 천천히 옅어져가는 모습을 나는 계속 지켜보았다. 어딘가에서 까마귀가 울었다. 울음소리가 끊기자 정적에 휩싸였다. 즐거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모르는 동네까지 정신없이 택시를 타고 달려갔던 일, 가벼운 마음으로 밤을 활보했던 일, 계속 걷고 싶다고 생각했던 일.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동안 왠지 아주 예쁜 것만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밤에서 아침으로 모습을 바꾸는 하늘도 이제 막 실연한 나의 앞에서 터무니없이 예뻤다.
- 하루하루 일어나는 일을 진지하게 때로는 적당히 마주하고, 사우기도 하고, 홀로 울기도 하고, 술에 취하기도 하고, 서로 이해하기도 하면서, 내 집이 된 곳에서 잠들도 일어난다.
- 30대 중반부터는 이사를 딱 멈추었다. 이상적인 집을 찾았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고, 이상적인 집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술자리를 갖고 싶을 때는 음식점을 예약하게 되었고, 밤낮으로 마작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도 사라졌다. 그 두 가지 조건에서 벗어나자 이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쾌적한 집을 의외로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불안한 마음은 이제 여행지에서 느끼는 수밖에 없다. 처음 묵는 숙소에서 자그마한 휴대용 배낭을 심란하게 만지작거리고 바깥의 어둠을 불안하게 바라보면서 새삼스레 깨닫는 수밖에 없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고 이렇게 외톨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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