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픈데도 아픈 줄 모르는 사람, 슬픈데도 슬픈 줄 모르는 사람,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문제가 많은 법이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터트렸을 때 펼쳐질 상황이 무서워, 언젠가부터 그런 감정이 일어나면 무조건 억눌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절하게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감정은 마음속에서 곪아 터지게 되어 있다. 무조건 감정을 발산하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심한 감정 절제가 안 좋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그녀가 실연당했을 때 우울함을 경험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 저널리스트인 딕 파운틴의 말에 따르면 쿨의 핵심은 언제나 쿨하게 '보이는'데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에 의존하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 볼 때 쿨한 사람은 남의 시선에 무관심하다. 그래서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은 곁에 있으나 없는 듯한 '이방인'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이방인은 쿨한 사람의 눈길을 자신에게 고정시키고 싶어 그를 갈망하는 눈으로 응시하게 된다.
쿨한 사람이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겉으로 무관심한 척할 뿐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갈망하며, 심지어 그것에 좌지우지되기까지 한다.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원하는 감정을 타인에게 던져 버리고 그를 멸시함으로써 그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쿨한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그들은 세상을 자신의 반사경으로 보면서 타인의 눈에 투영된 자신의 이미지 외에는 아무것에도 흥미를 갖지 않는다. 타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반쯤 입을 벌리고 자신을 보며 감탄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만족을 구할 뿐이다.
여기에 한몫 거드는 것이 범람하는 이미지의 세상이다.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이나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다. 어디서든지 당장 꺼낼 수 있는 카메라는 우리의 현실 생활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 버린다. 마치 항상 자신 앞에 카메라가 있고 자신의 행동을 누군가가 보고 있는 양 미소를 짓고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보이는 이미지에 몰두하다 보면 타인의 감정을 돌아볼 여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쿨한 사람이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쿨한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를 닮아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봐 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갓난아이 적 가만히 누워 엄마가 눈을 맞춰 주기를 기다리던 의식의 먼 밖에 있는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는 엄마가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져 더 이상 외부의 시선에 매달리지 않게 된다. 반대로 엄마가 아이를 쳐다보지 않거나 내킬 때만 눈길을 주면 아이는 자신이 열등하다고 느끼며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게 된다. 그리고 그처럼 열등한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방어하기 위해 아이는 남들에게 사랑받는 전지전능한 과대적 자기를 만들어 낸다. 일명 '거짓 자기'이다. 그러고는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져 결국 이루지 못할 사랑의 고통 속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 나르키소스처럼 타인의 눈에 비친 자기 모습과 사랑에 빠진다.
- '역설적 초연함'이란 다른 사람이나 사물은 물론 자신의 감정과도 거리를 두는 것을 말한다. 그때그때의 감정과도 거리를 두는 것을 말한다. 그때그때의 감정에는 충실하나 분노, 슬픔, 외로움 등 오래 지속되면서 거치적거리는 부정적 감정에는 초연한 태도를 취한다. 이는 그 누구와도 정서적으로 얽히는 것을 피하려는 태도이다.
쿨함에 숨어 있는 역설적 초연함은 대인 관계에서 오는 상처로부터 자신을 방어함과 동시에 현대 사회 속에서 겪는 좌절감과 박탈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장치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되고 풍요로우며 화려함이 넘치는 사회이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오히려 막연한 불안과 박탈감에 시달린다. 왜냐하면 자율성의 극대화에는 모든 것을 개인이 혼자 결정하고 그 책임 또한 혼자 져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스타들의 화려한 삶에 비해 우리의 생활은 한없이 초라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성공담은 우리의 무능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어떤 것을 성취해도 나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기에, 개인은 끝없이 비교를 하고 비교를 당하는 '잘못 적용된 사회적 비교'의 틀에 갇혀 막연한 불안과 무력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이러한 박탈감과 무력감, 불안 등에 대처하는 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어넘기거나 모든 불합리함을 기성 사회의 잘못된 유산으로 치부해 비웃어 주는 것이 편리할 수 있다. 역설적 초연함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 모든 것이 급변하는 세상에서 과거의 것들은 금방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사람들의 사고 구조는 테크놀로지의 숨 가쁜 발달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꾸만 뒤처진다. 게다가 유행이나 기술적인 면뿐만 아니라 가치 또한 빠른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미래를 통제하고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의 삶을 계획하기보다는 현재에 몰두하게 만든다.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꼬박꼬박 저금을 하고 있을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 현대의 아이들은 부모의 지나친 사랑과 기대로 인해 감정의 과잉 상태에 빠져 있다. 심지어 아이의 감정을 대신 처리해 주는 부모도 있다. 예컨대 어떤 부모는 아이가 화가 나서 씩씩거리면 그 감정을 아이 스스로 처리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대신 나서서 싸운다. 그러면 아이는 화나는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깨칠 수 없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면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면 자신의 감정을 두려워하게 된다. 또한 어려서부터 지나친 통제 속에서 살아온 사람은 통제받는 것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과 분노를 가진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감정이란 이물질 같은 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그 어떤 감정이든 억압하기 위해 애쓰거나 자신이 '조울증'이란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 불안해한다.
감정은 우리의 삶에서 음악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세계와 외부 세계가 만나서 내는 일종의 합창이다. 따라서 감정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즐겨야 할,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신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감정 기복이 심해 고생하고 있다면 그 감정이 내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라. 그것은 마음에 어떤 갈등이 있다는 신호이므로 그 원인을 알게 되면 문제를 해결할 힘을 얻어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다.
- 세상이 내 모든 것을 빼앗고, 나에게 최악의 상황을 주었더라도 나에게는 절대 빼앗길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내 선택권이다.
- "너를 용서해라. 나는 널 믿는다. 넌 좋은 사람이고 네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제시간에."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하며, 과도한 욕망에서 벗어나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물론 시간은 무한정 기다려 주지 않기에 제시간 안에 선택을 해야 한다.
- 현대 사회의 만남은 짧은 것이 특징이다. 예전에 이동이 적었던 기대에는 만남의 기간 역시 길었다. 사람들은 한 집과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머물렀고 따라서 같은 사람과 오래도록 이웃을 하고 거래를 하며 지냈다. 그 결과 오랜 시간을 두고 상대를 만나면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찬찬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세계가 글로벌화되면서 사람들의 이동 또한 활발해졌다. 서울에서 이른 아침 회의에 참석한 뒤 일본 출장을 다녀와서 밤늦게 부산에서 친구를 만나는 게 가능하다. 여행이나 어학연수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사이버 공안 안에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 게다가 요즘은 3~4년에 한 번씩 직장을 옮기고 이사를 간다. 즉 사람들은 이제 한곳에 정착해 살기보다는 여기저기 이동하면 살게 되었고, 따라서 만남과 이별의 횟수도 늘어났다. 만남의 행태 역시 서로의 이익에 따라 만났다 금방 헤어지는 단기간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 짧은 만남은 상대를 알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가 상대를 파악하는 방법은 첫인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얼마나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느냐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해진다.
한편 현대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이다. 지나간 과거는 쓸모가 없고 미래는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재의 경험만이 중요하게 되고 따라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은 그때그때 보고 느끼는 감각과 직관에 의지하게 된다.
- 우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창피해서 못 살겠다'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실수를 해도 창피하고, 돈이 없어도 창피하다. 차가 낡아도 창피하고, 공부를 못해도 창피하다.
창피함은 내 모습이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결함투성이로서 부적합하고 실패한 모습으로 비쳐질 때 느끼는 감정이다. 보잘것없는 나 자신이 드러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고, 속해 있는 집단으로부터 쫓겨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이런 창피함은 특히 의존적인 사람에게 많이 나타나는 감정이다. 의존적인 사람은 나와 남을 함께 섞여 있는 한 덩어리의 상태로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 지향적'이며 다른 사람의 의견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집단주의 사회다. 가문을 워낙 중요시하다 보니 개인과 가문의 경계가 모호하다. 개인은 전적으로 가문으로부터 보호받고, 가문에 의지하며, 개인의 영광은 곧 '가문의 영광'이다. 오죽하면 '문중에서 쫓겨난다'든지 '호적을 파 버린다'라는 말이 가장 위협적인 말이 되었겠는가. 이런 분위기에서는 체면을 지키는 것이 목숨보다 중요해진다.
창피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창피함을 느끼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창피함을 느끼는 수준은 너무 지나치다.
-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 즉 'Basic Trust'는 세 살 이전 엄마와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아기는 처음에 엄마의 배 속만이 자기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태어나 보니 신기하고 낯선 것이 너무도 많다. 아이는 호기심에 그것들을 만져 보고, 맛을 보고, 촉감을 느껴 보고, 귀를 기울이고, 말을 걸기도 해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겁이 나 주위를 둘러보며 엄마를 찾는다. 그때 엄마가 웃으며 자신을 보고 있으면 안심하게 된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아이는 엄마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갖게 된다. 그래서 엄마가 잠깐 안 보여도 엄마가 곧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마음 놓고 낯선 세상을 탐험한다.
그러나 아이가 쳐다봐도 엄마가 눈을 마주쳐주지 않거나 엄마의 사랑이 너무 변덕스러우면 엄마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흔들리게 된다. 이제 아이는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엄마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까 봐 불안해하면서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애쓰게 된다. 그러면 아이는 마음 놓고 낯선 세상을 마주하지 못한다.
- 마음속 상처 입은 아이를 더 이상 모른 체하면 안 된다. 계속해서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면 그 아이가 성장하고 싶어서 내는 소리임을 알아차리고 그 아이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 아이가 마음껏 울 수 있게 해주고 어디가 아팠는지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 주어야 한다. 그러면 과거의 상처가 아물면서 과거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후 비슷한 경험을 또 반복하게 되더라도 스스로에게 '지금 일어나는 일은 그때의 일과는 상관없어. 단지 내가 그때처럼 무서운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때처럼 아무 힘이 없는 어린아이가 아니야. 그러니까 똑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나는 그 상황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어'라고 속삭여 줄 수 있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알아도 감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큰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마음속 상처 입은 어린아이가 미성숙한 방어 기제 들을 써서 고통을 반복하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발목을 붙잡고 있던 과거에서 풀려나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느끼며 현재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노력들을 멈추지 않으면 언젠가 느끼게 될 것이다. 고통이 멈추고, 상처 입은 아이가 울음을 멈추고 성장을 시작했음을.
- 부모님의 인정과 사랑을 절실히 바라는 진용 씨는 높은 '자아이상(ego-ideal)'을 포기하지 못했다. 자아이상이란 '나는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는 자신에 대한 요구를 의미한다. 자아이상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받은 칭찬이나 부모가 추구하는 가치를 내재화시키는 가운데 형성되는 것으로 양심과 함께 초자아를 구성한다. 그런데 자아이상이 너무 높으면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초라한 자신과 현실에 실망하고 우울해지기 쉽다. 따라서 진용 씨는 점차 나이 들어 갈수록 꿈과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자신 사이의 괴리감이 더 커지면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아이상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받고 싶은 부모로부터 거절당할 수밖에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지배했다.
그의 인생은 이제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이러한 좌절감은 그의 분노를 자극했고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다고 느낀 그는 무력감에 빠져 항상 피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용 씨의 권태는 '고통스러운 고독'이자 '자신에 대한 환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방어 기제는 퇴행과 투사, 그리고 회피이다. 그는 자아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좌절과 분노를 느꼈고 이 두려운 감정을 방어하기 위해 부모님이 모든 것을 해 주고 자신은 가만히 있으면 되었던 어린 시절로 퇴행해 버린다. 또한 외부 현실에서 아무런 자극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내부가 공허하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이 형편없기 때문이고 부모가 자신을 잘못 키운 때문이라며 그 탓을 외부로 투사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좌절만을 안겨 주는 현실을 애써 모른 척 회피하려고만 한다.
그러나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와 이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이별이 아무리 슬프고 싫어도 말이다. 이 떠나보냄의 작업이 바로 '애도'이다.
모든 상실에는 애도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 애도의 과정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고 일련의 과정을 밟는다. 상실을 맞이하면 처음에는 그 상실을 부정하게 된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라며 고개를 젓고 그것이 내 곁에서 멀어졌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차츰 그것이 없는 현실이 반복적으로 펼쳐지면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말하자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냔 말야!"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상실에 분노한다는 것은 그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점차 그것을 영원히 잃어버렸음을 인정하고 슬픔에 잠기게 된다. 이 슬픔의 기간에 우리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를 얻게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슬픔을 이겨 낸 후에는 관념이 찾아온다. 슬픔이 관념으로 바뀔 때 우리의 심장을 후벼 파는 슬픔을 그 힘의 일부를 상실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 자체는 비록 순간적이라 해도 약간의 즐거움을 내뿜게 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것에 대한 추억을 내면에 깊이 간직한 채 새로운 만남을 향해 출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애도란 충분히 슬퍼함이고 받아들임이다. 그리고 떠나보냄이고 새로운 출발이다. 또한 잃어버림이고 그 잃은 것을 내 안에 영원히 간직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 엄마로부터 독립하지 못하고 엄마의 통제 속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에게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물으면, 그들은 대부분 효도를 그 이유로 든다. 어떻게 부모의 뜻을 거역하느냐는 것이다. 청춘과 꿈을 다 포기한 채 자신만 바라보며 살아온 엄마에게 효도는 못할망정 모른 척할 수 없다는 말도 한다. 그러면 난 이런 말을 해준다.
"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살아요. 세상에 그렇지 않은 어머니가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당신을 위해 희생만 한 것은 아니에요. 당신이 태어남으로써, 그리고 바르게 자라 줌으로써 당신은 어머니에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기쁨과 행복을 드린 겁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라며 당신을 기르셨어요. 그러니까 가장 큰 효도는 당신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고,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겁니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은 당신의 자식에게 물려주세요. 그게 바로 효도입니다."
- '동정(Sympathy)'과 '공감(empathy)'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동정은 상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나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슬퍼할 때 나도 같이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동정이다. 그러나 공감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 사람의 고통을 깊이 이해한 후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면 그를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공감이다. 이런 면에서 공감은 동정보다 훨씬 더 성숙한 정신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을 나와 분리된 독립적인 인간으로 볼 수 있으며, 잠시 그의 마음을 내 것처럼 느껴도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건강한 자아의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아의 경계가 약한 사람들은 공감해야 할 순간에 상대방과 하나로 합쳐져 버린다. 공감을 못하는 것이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 공감을 받지도 못한다.
- 오늘은 문득 헤이즐넛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닫혀 있던 가슴을 열고 감춰 온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꼭 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외로웠던 기억을 말하면 내가 곁에 있을게 하는 사람
이별을 말하면 이슬 고인 눈으로 보아 주는 사람
희망을 말하면 꿈에 젖어 행복해하는 사람
험한 세상에 굽이마다 지쳐 가는 삶이지만
때로 차 한 잔의 여유 속에 서러움을 나누어 마실 수 있는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
굳이 인연의 줄을 당겨 묶지 않아도
관계의 틀을 짜 넣지 않아도
찻잔이 식어 갈 무렵 따스한 인생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오늘은 문득 헤이즐넛 커피향이 나는
그런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 배은미,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
- 현대사회는 냉혹한 경쟁 속에서 개인이 혼자만의 능력으로 싸워서 이겨야만 하는 개인 위주의 사회이다. 개인은 쓸모가 엇어지는 순간 그 즉시 폐기당할 수 있는 소모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집단을 위해 나를 희생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내가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이끌어 내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그러니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행동인 것이다.
한편, 사람들의 이동이 적고 한곳에 모여 살면서 공동체 의식이 중요했던 시대에는 내가 무언가를 희생하면 지금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어느 시점엔 가는 집단이 그것을 칭송해 주고 나는 보답을 받았다. 타인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 집단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장기적으로 볼 때 희생은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동이 잦아 금방 만나고 금방 헤어지는 현대사회에서 희생과 손해는 보답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여나 손해를 볼까 봐 촉각을 곤두세우며 살아단다.
-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이드(id)가 있던 곳에 자아(ego)를'이란 말은 본능적 욕구나 감정을 자신에게 숨기지 말라는 뜻이지 그것을 모두 밖으로 표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만일 우리가 내부의 욕망이나 감정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다 표현하면 모두 끔찍한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난 이럴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며 "너는 내가 원하는 걸 모두 들어주어야 해"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피해자 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피해자라고 인식한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과거에 자신의 자아가 상처를 입거나 억압을 받아 손상되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는 과거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어. 난 피해자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이러는 건 당연해. 너희는 나를 이해해 주고 감싸 주어야 해. 그리고 과거에 못 받은 사랑을 너희가 나에게 주어야 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피해자 증후군은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찾아올 수 있다. 그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다음의 세 가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첫째, 과거에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처가 있었다 해도, 현재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 과거에 나를 괴롭힌 사람에게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윤수는 말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일은 바로 내가 한 행동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에 묶여 있어서 고통스러운 것은 나 자신일 뿐이다. 심지어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다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을 수 있다. 충분히!
둘 때, 내가 아무리 선량한 피해자라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이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해서는 안 될 악한 행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내 안에 악마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남들의 욕망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된다. 내 욕망과 타인의 욕망이 서로 손잡고 큰 갈등 없이도 최대한의 만족을 이끌어 내면서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자신의 행복을 외면한 채 희생만을 하려 하는 것은 자학적 경향으로 병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절대 손해 보지 않고 희생을 하지 않으려 하면 인생의 중요한 즐거움을 잃어버린다.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희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만이 기꺼이 손해를 감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도와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을 세상을 살아가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기쁨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희생의 가치를 자꾸만 깎아내리거나 폄하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그만큼 못났음을 드러내는 증거일 수도 있다.
- 아무리 성공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달리 자아이상이 높다. 그래서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초라한 자신에 대해 항상 열등감과 수치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 만족을 모르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인간다움을 유지한다. 작은 일에 기뻐할 줄 알고, 타인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서로의 부족한 면을 함께 나누고 채워 주며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웃어넘길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자아이상이 너무 높거나 성공 강박증에 걸려 있어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간다움'이 부족하다.
완벽이란 어떤 인간에게든 애당초 불가능한 것임을 명심하라. 인간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그가 지극히 '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이다. 그러니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성취하면 그 기쁨을 충분히 누려라. 그렇게 조금씩 당신 안으로 들어온 기쁨들은 당신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당신의 잠재력을 꺼내 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만족의 기쁨을 누릴 줄 알게 되면, 당신은 분명 그전보다 훨씬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면 성공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니까.
- 사람들은 때때로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아까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건 아닌지 초조해한다. '내가 할 일은 이게 아닌데, 더 나은 곳이 분명 있을 텐데...' 하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자신을 탓하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쓸모없는 시간은 없다. 당신의 이성은 떠나라고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주저하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면 아직 주변 여건이 무르익지 않은 건 아닌지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다시 한번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 답은 당신 안에 있을 테니까.
- 현대인들은 권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직장이나 결혼 생활이 권태롭게 느껴지면 뭔가가 잘못된 거라고 더럭 겁을 낸다. 하지만 권태로움은 우리 인생의 한 조건으로, 계속 반복되는 일에 권태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권태의 시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다. 당신이 권태로워하고 있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많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이제까지 쌓아 온 경험을 무의식적으로 분석하고 통합하며 소화해 내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하지 말고, 권태로운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시간을 즐겨라. 너무 오래가지만 않는다면 나중에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의 당신이 있음을 말이다.
- 비교하는 버릇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단기적으로 볼 때는 비교가 경쟁심을 촉발시켜 스스로 더욱 분발하게 되므로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비교는 도전 정신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쁨을 앗아가 버린다. 왜냐하면 비교의 늪에 빠지다 보면 어떻게든 남들 눈에 잘 보이는 게 급선무가 되어 내가 자신 있는 것, 내가 잘하는 것에만 매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금방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 새로운 것, 더 노력해야 하는 것 등은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친 비교는 무척이나 고단하고 비생산적인 인생을 초래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 자기만의 특성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고유한 것으로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남들보다 더 우위에 서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인생을 더 느끼고, 더 즐기고, 행복해지면 된다. 그러니 안 그래도 남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태어난 마당에 비교의 버릇을 또 한 번 덧대려 하지 마라.
- 사랑도 배워 가는 것이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자신의 무차별적인 욕망으로부터 상대를 보호하며 사랑을 지키는 법을 배운다. 그렇다고 사랑을 많이 할수록 좋다는 말은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랑의 경험은 오히려 그 사람이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비슷한 일들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에 주의해서 봐야 한다. 과거의 경험은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밑그림이 된다. 똑같은 경험을 반복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 사랑이 조금이라도 식는 것을 못 견디는 성급한 이 시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랑의 특성이 있다. 애석하게도 사랑은 변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는' 단계에서 출발해 사랑을 '하는' 단계를 지나 사랑에 '머무르는' 단계에 도달하는 하나의 여행과도 같다. 그러므로 열정이 식었다고 해서 사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럴 때 '넌 변했어. 이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고 섣불리 규정짓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사랑에 머무는 단계'는 현실 속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며 따뜻함과 부드러움 속에 사는 것이다. 또한 행복하고 편안한 가운데 서로의 존재를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머문다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사랑의 형태로 라쉬 교수는 이를 '차가운 세상에 있는 천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 사랑에 머물기 위해서는 상대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애정을 가지고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기꺼이 나를 열어 보일 수 있어야 하고 혼자 있는 것에 대한 외로움을 견딜 수 있어야만 한다.
- 우리가 첫사랑을 거쳐 여러 사람과 데이트를 해 본 뒤에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이상적인 사람과 사랑에 대한 환상의 실체를 벗겨 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여러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며 우리는 배우게 된다. 우리는 모두 상처받은 영혼임을, 내가 완벽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이란 이런 것들을 인정하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의 인생을 더 넓고 깊게 확장시키는 것임을... 또한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어떤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지를 배우게 된다.
- 부부가 맺는 관계는 대략 다음의 세 가지 영역에 걸쳐 이루어진다. 우선은 현실적인 영역으로 '결혼으로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와 관련되어 있다. 경제력이 확보된다든가, 심리적 안정을 얻는다든가, 외로움에서 벗어난다든가 등등이 이에 속한다. 두 번째는 문화적 영역으로 두 사람의 문화적 기대가 서로 얼마나 조화를 이루느냐 하는 문제다. 그리고 마지막은 심리적 영역으로, 서로의 무의식이 충돌해서 어떤 결과를 낳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이 세 영역이 얽히고설키면서 결혼 생활은 상당히 역동적이 된다.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실망, 애정과 미움 등 온갖 감정이 끊임없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어느새 부부는 서로에게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목숨 걸고 싸우며 다른 사람한테는 절대 하지 않을 치명적인 말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처럼 한바탕 싸우고 나면 서로 큰 상처를 입지만 '미안해, 앞으로는 잘할게'라는 한마디면 또 모든 것이 괜찮아진다.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이런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리처드 스틸은 "결혼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이미지의 천당과 지옥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부부가 싸우면서 서로에게 유치하고 옹졸한 모습까지 보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사랑과 믿음이 뒷받침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미친 짓을 하더라도 상대가 나를 사랑하니까 결국에는 그것을 껴안아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신뢰가 깨진 관계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럴 경우 싸움은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에 대한 실망과 미움으로 인해 파괴적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면 정말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생활을 잘하려면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지 않도록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특히 신뢰를 깨거나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말과 행동은 삼가야 한다. 결혼 그 자체가 사랑의 무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잘못된 행동과 말이 순식간에 결혼을 사랑의 무덤으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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